
과욕이었다. 미리 말했어야 했다. 결국 다 해내지 못할 것이라고 고백했어야 했다. 신입인데 일 좀 한다는 인사치레의 칭찬에 취해 내 능력을 망각해서는 안 되었다. 첫 휴가를 앞두고 밤을 새우고 일하며 많은 서면을 약속대로 써 냈지만, L 변호사님이 지시한 의견서는 아직 초안도 완성하지 못했다. 일을 받은 지는 꽤 되었지만, 그 뒤로 배당된 긴급한 사건들을 처리하느라 착수가 늦어졌다. 일이 늦어진 이유를 대라면, 백만 개는 댈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도 밤을 새울 각이다. 평소 같으면, 하루 더 밤새우는 것으로 끝날 일이지만, 문제는 입사하고 처음으로 맞이하는 휴가이자 오랫동안 꿈꾸며 계획했던 이탈리아 여행을 내일 새벽 비행기로 출발하는데 아직 아무런 준비를 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오후 8시가 되자 L 변호사님이 호출했다. 내일부터 휴가인데 지금까지 왜 퇴근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당신에게 제출하기로 약속한 의견서를 아직까지 완성하지 못했다고 답했다. 오늘 중으로 끝내겠고 안 되면 휴가기간에라도 마무리하겠다고 말했다. 화끈거렸다. 그간 도취되었던 자신감은 이미 온데간데없고, 자존감은 인형뽑기에 실패하고 지켜보던 초등학생에게 위로받던 수준으로 떨어졌다. "지금 당장 방으로 가서 지금까지 작성된 상태 그대로 보내주시죠." 완성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다시 L 변호사님 사무실의 방문을 노크했을 때, 나를 얼마나 한심한 눈으로 볼지 눈에 선했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자신의 능력을 망각하고 일에 욕심내던 꼴이라니. "메일 잘 확인했습니다. 귀가하셔서 휴가 준비 하시지요." "네?" 이게 뭘까. 약속도 못지키는 변호사는 이제 집에서 푹 쉬고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얘기일까? 또 다른 혼돈 속으로 빠져들 찰나에 L 변호사님이 말했다. "지금 바로 귀가하시지요. 이미 제가 확인했으니 여기서 한 글자도 추가하면 안 됩니다. 제출기한이 남았으니 다녀와서 마무리하세요. 그 사이 급한 일이 생기면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사소하지만 거대한 배려였다. 부드럽지만 힘 있는 마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사건은 이겼고, 이후로 L 변호사님과 함께 하는 일은 그 어떤 일보다 최선을 다하게 되었다. 어느덧 파트너가 된 나도 L 변호사님이 보여줬던 배려와 여유로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결국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햇님이지 않은가.
조웅규 변호사 (법무법인 바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