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9년 쾨니히스베르크의 무명 수학자 칼루자(Kaluza)는 시공간이 5차원일 가능성을 제시했었다(상하, 좌우, 앞뒤, 시간 그리고 '여분'). 이후 더 많은 여분의 차원을 예고한 끈이론, 초끈이론 등이 물리학계를 지배했는데 비과학도인 사람으로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정도로 이해하는 게 전부이다. 이런 여분의 차원들이 헌법재판업무와 대체 무슨 상관일까.
헌법재판에서는 특정한 사실관계보다 사실관계가 던진 법과 제도에 대한 인식과 관점이 판단의 출발점이 된다. 그래서 헌법재판소가 접수한 사건의 기록은 얇지만 사건은 결코 가볍지 않은 경우가 많다. 헌법연구관은 사건의 심판대상인 법과 제도와 관련된 사회현상과 권력관계의 보이지 않는 차원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고 이러한 과정에는 사회학적, 정치철학적 인식과 관점이 동반된다. '집단지성의 힘'이란 바로 이런 것일까. 동료들과 연구부 토론을 하고 나면 '사실은 없고 관점만 있다'라는 관점주의와 자기 관점의 편파성을 인정하는 정직한 지적 자세를 강조한 어느 철학자를 되새기게 된다. 토론에서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인식과 관점들을 접하면서 내가 진리, 정상이라고 믿었던 것이 또 다른 층위의 어떤 '틀 안'에 있었던 것임을, 여분의 차원을 보지 못한 점을 반성하게 될 때가 많다.
여분의 차원을 보지 못하는 인간적 한계와 관점의 편파성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일이 비단 업무에서만 필요하랴. 인간관계에서 특히 더 필요하다. 악의 없이 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대에게는 전혀 옳지 않을 수 있다. 사실은 없고 관점만 있기 때문이다. 진실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시공간과 언어의 한계 속에 갇혀 서로 다른 의미로 존재하고 관점의 편파성은 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해결의 접점을 찾기 어려운 경우도 있다. 그래도 우리들 인간관계는 어느새 밝은 빛으로 다시금 빛나고 배려와 따듯함은 유지된다. 시간은 우리에게 자기정화의 기회를 주고, 보이지 않지만 여분의 차원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공감'과 '이해', 그리고 '연민'이라는 최고의 삶의 기술을 우리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우리 사회든 인간관계든 칼루자가 '아름답기' 때문에 착안하였던 그 보이지 않는 여분의 차원을 오늘도 선하고 관대한 끈들이 가득 채우고 있기를 바라며.
정인경 선임헌법연구관(헌법재판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