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점 가까워진다.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나. 꿈인가. 이게 뭐지? 휴대폰 알람이다. 새벽 5시를 알리는 알람이 시끄럽게 울리고 있다. 눈을 깜빡였을 뿐인데 벌써 새벽이 밝았다니. 현실을 부정하며 뒤척이다 시간에 쫓긴다. 허겁지겁 기록을 챙겨 집을 나선 후 다행히도 제 시간에 울산행 SRT에 올랐다.
잠시 숨을 고르고 노트북으로 밤사이 수신된 이메일에 답신한 후 오늘 스케줄을 확인한다. 상속, 신탁 그리고 기업승계 키워드로 검색된 웹페이지가 열리지만, 기사를 읽을 마음의 여유가 없다. 자세를 가다듬고 기록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손때가 묻을 만큼 여러 번 본 기록이지만 볼 때마다 새롭다. 기억에서 잊혀지는 속도를 이겨내기 위해 오늘도 반복해서 기록을 새긴다. 반수면 상태로 기록과 대치하다 안내방송에 정신을 차리고, 오늘 재판에서 나올 수 있는 쟁점들을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알람을 설정한 덕분에 놓치지 않고 무사히 울산역에 내려 택시를 타고 법원에 도착했다.
여유를 두고 기차를 예매했더니 재판까지 한 시간이 남았다. 복도에 앉아 기록을 펼친다. 이쯤 되면 기록을 가져올 필요가 없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기록을 완전히 외운 것만 같은 느낌이다. 시간이 다 되어 법정으로 들어가 앉는다. 드디어 내 차례다. "양측 추가로 하실 것 있으신가요?" "원고 측은 없습니다." "피고 측도 없습니다." "그럼 종결하겠습니다. 선고일은….” 내심 지적하지 않길 바랐던 쟁점을 상대방이 마지막까지 지적하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재판을 마쳤다.
딱 2분 걸렸다. 상호 열띤 공방을 할 수도, 앞 사건들의 재판이 밀릴 수도 있다는 생각에 여유 있게 서울행 SRT를 예매했던 게 떠올랐다. 승소 예감에 들뜬 마음도 두 시간 가까이 남은 기차 시간을 당겨주진 못했다. 이미 서울행 기차는 만석이었다. 택시를 타고 울산역에 도착해 카페에 자리를 잡는다. 어김없이 멤버십 카드를 권하는 점원의 제안에 이번에도 심각한 고민에 빠진다. 카페와 SRT를 사무실 삼아 쌓여있는 업무를 처리하고 늦은 오후에서야 사무실에 복귀했다.
오늘처럼 SRT에서 일하면, 나도 링컨차를 타는 변호사처럼 SRT를 타는 변호사라고 해야하는 건가? 이동에만 한나절을 바쳐 2분을 얻어야 하는 시대도 이제 영상재판의 등장으로 잊혀진 과거가 될지 모르겠다. 언젠가 컴퓨터 화면 속 사람들과의 대화보다 단 1분이라도 사람 냄새 나는 만남이 그리워질 즈음, SRT를 타는 변호사 시절을 추억할 수 있지 않을까 상상해본다.
조웅규 변호사 (법무법인 바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