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무릎 위에 다른 쪽 다리를 올려 가좌(跏坐)를 반(半)만 취한 자세. 살짝 고개 숙인 얼굴의 한쪽 뺨에 손가락 끝마디를 살짝 대어 사유하는 자세. 그러나 무엇보다 압권은 살짝 올라간 다문 입 꼬리로 미소 짓는 모습 아닐까? 도대체 이 반가사유 보살상은 1400년을 뛰어넘은 긴 세월의 묵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적어도 반가사유의 심오한 미소에서 험담·경멸·모욕·증오·배제·보복·폭력을 담은 언어를 떠올릴 수는 없지 않을까? 도리어 그러한 말 짓을 일삼는 세상 사람의 어리석음을 온화하게 꾸짖는 것은 아닐까? 아니, 꾸짖기보다는 너그러이 그들의 온갖 허물을 감싸 안아주는 것 아닐까? 세상사를 옳고 그름으로 가릴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을 일깨워 주는 것 아닐까?
‘知者는 不言이고, 言者는 不知니라.’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아니하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느니라.’ 이렇게 풀이할 수도 있겠다.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말이 많지 않고, 말이 많은 사람일수록 잘 모르는 사람이다.’ 되도록 말을 아끼자는 말이다.
1400년을 뛰어넘은 긴 긴 세월
묵언으로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참다운 말·글에 목마른 이즈음
도덕경의 ‘지자불언’이 떠올라
국어사전의 우리말 어휘나 웹스터·옥스퍼드 사전의 영어단어는 몇 개일까. 거의 50만 개에 가깝다고 한다.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는 단어의 숫자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상상해보자. 오늘 자정이 지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단어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다만, 당신이 꼭 남기고 싶은 단어 하나는 남겨둘 수 있다. 당신은 어떤 단어를 고를 것인가? 당신이 그것을 쓰거나 말하는 것은 지자불언(知者不言)이라 해서 주저할 일이 아니지 않을까?
그러나 글을 쓰는 것은 말 못지않게 업을 쌓기 쉬운 일이다. 그래서 항상 어렵고 피하고 싶은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땅으로 넘어진 자 땅으로 일어나듯이, 업은 업으로 갚아야 하지 않을까? ‘악업’ 말고 ‘선업’으로 말이다.
마지막으로 남기려는 한 단어가 무엇이든, 마치 전쟁과도 같은 분열과 대결을 부추기는 말/글은 악업이다. 평화롭게 공존 공생하고 화합을 길어내는 말/글이 선업이다. 누군가의 언동을 쓰레기 대하듯이 멸시하고 깎아내리며 혐오와 냉소를 퍼부어 상처를 내는 말/글은 악업이다. 넉넉히 여유를 갖고 상대를 이해하고 존중하면서도 점잖고 격조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품격과 관용의 말/글이 선업이다.
참다운 말/글에 목마른 이즈음에 반가사유를 만나 지자불언을 떠올리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비약일까?
김지형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지평·전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