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인 법학에서는 입법론과 해석론을 엄격히 구별한다. 논의를 전개하다가 법률의 문언만으로 원하는 결론을 얻기 어려우면, 그 부분은 입법이 필요하다고 쓴다. “현행법의 해석론으로는 A라고 해석되지만, 입법론적으로는 B가 옳으니 법개정이 필요하다”는 식이다.
이런 논의를 할 때, 즉 현행법 해석만으로는 원하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부족하니 조문에서 이것 좀 고쳤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입법론”을 얘기할 때,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전제하는 ‘입법’은 어떤 것일까? 그 분야 전문가들이 깔끔하게 다듬은 법안일까? 아니면 국회의원들이 수년간 싸움을 벌이다가 일괄 타결하는 과정에서 얼떨결에 절반쯤 반영된 법안일까? 법률가들이 ‘입법론’을 언급할 때에는 대개 전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은 후자가 점점 늘어난다.
과거 우리나라의 입법과정은 전자에 가까웠다. 의원입법보다 정부입법이 많았고, 엘리트 상사의 지시를 받아 똘똘한 사무관이 깔끔하게 법안을 기안했다. 학계나 현장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위원회가 힘을 보태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살펴본 바로는 정치적 자유가 제한되고 여당 권력이 절대적인 싱가포르의 입법과정은 아직도 그런 것 같다. 유능한 공무원들이 정교한 규제안을 만들고 그게 그대로 법이 된다. 무슨 다른 법안들과의 일괄타결 과정에서 모르는 내용이 슬쩍 들어가거나 빠지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오늘날 입법과정은 정치과정
처음엔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이 사람 저 사람 손대면서
허점이 드러나는 이류 문서로
그러나 민주주의가 무르익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입법과정은 정치의 과정이다. 민감한 쟁점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소관 상임위원회, 법사위, 본회의를 차례로 통과하기는 쉽지 않다. 그 동력을 얻기 위해 법안은 언제나 주고받음의 대상이 된다. 처음엔 정교하게 만들었더라도 이 사람 저 사람이 손대면서 앞뒤가 어긋나고 허점이 드러나는 이류문서가 된다.
그렇다고 지나간 효율적 입법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건 시대착오이리라.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의 신장을 얻으면서, 비효율이라는 부산물도 함께 도래했다고 봄이 현실적일 것이다. 일사불란하게 전문가들의 의사가 관철되는 효율적인 입법과정이 부럽다면, 정치적 자유와 정권교체 가능성도 양보할 준비를 하는 게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아무튼 이제 순진한 입법론의 시대는 가버렸다. 문제의 해결책을 기약 없는 입법론의 영역으로 미뤄버리고 해석론적 작업을 쉽게 포기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 지적인 게으름이 될 수 있다. 근본주의자처럼 개헌과 법률개정만 되뇔 것이 아니라, 법률개정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우회로도 고심할 필요가 있다.
한 예로 최근 등기사항인 주식회사 대표이사의 개인 주소가 인터넷으로 일반에 공개되므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할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많은 분들이 등기 및 공시범위 축소를 위한 상법 개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이미 이사의 주민등록번호는 등기사항임에도 불구하고 대법원 규칙인 상업등기규칙으로 일반열람이 제한되고 있으므로, 입법에 앞서 유사한 접근이 가능할 것이다. “법률가가 째째하게!”라고 질타할 분도 있겠지만, 느리고 믿을 수 없는 입법의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때로 째째함과 슬기로움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필요도 있을 것이다.
천경훈 교수 (서울대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