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내 사랑은 만년으로 하고 싶다. 영화 '중경삼림'에 나오는 대사다. 최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로 대 웨이드'(이하 ‘로’) 판결을 뒤집으며 수많은 미국 여성들이 지난 50년간 연방정부 차원에서 보장받았던 임신중지에 대한 권리를 잃는 것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권리에도 유통기한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그리고 그 유통기한은 만년은커녕 백 년도 채 가지 못할 수도 있다고.
임신중지권의 유통기한이 50년도 채 안 되어 만료된 이유는 무엇일까? '로' 판결을 파기한 대법원 판결의 다수의견은 그 이유를 '로'의 빈약한 헌법적 토대에서 찾았다. '로' 판결이 헌법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권리인 임신을 중단할 권리를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확대 해석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것이다. 다수의견은 헌법에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은 권리가 기본권으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그 권리가 "미국 역사와 전통에 깊게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하는데 임신중지는 오히려 20세기 후반까지 많은 주에서 범죄로 간주되었다는 점에서 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접근법을 '원론주의'라고 한다. 법은 제정 당시의 시대적 이해를 바탕을 해석되어야 하고 자의적 해석 없이 문언 그대로 엄격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 원론주의의 입장이다. 문제는 이러한 경직된 접근으로는 헌법이 시대의 변화를 반영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법원이 임신을 중단할 권리가 헌법적 보호를 받는 권리인지 판단하기 위해 살펴본 수정헌법 제14조가 비준된 시기는 19세기 중반이다. 당시는 여성이 사회의 구성원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지지조차 않았던 시대다. 그렇다면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존중하고 지켜야 할 전통과 역사로 보는 게 과연 합당할까? 아무리 정교하게 설계된 법이라도 모든 상황에 대한 명확한 지침을 제공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 법체계의 기본 틀 역할을 하는 헌법은 특성상 더욱 함축적이고 모호할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을 고려하지 않고 문언과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만 천착한다면 현재의 권리는 과거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설사 대법원의 접근법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과연 대법원이 임신중지권에 대한 헌법적 근거를 모두 고려했는지 또한 의문이다. 다수의견은 임신중지권을 사생활의 권리, 즉 신체에 대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의 관점에 국한해서 바라보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헌법의 또 다른 핵심 가치인 '평등'이 빠져있다. 실제로 원치 않는 임신을 유지해야 하는 여성은 학업, 진로 및 많은 부분에서 제약을 받게 된다. 게다가 출산을 강제하는 사회는 출산의 사회적 가치와 효용만 인정할 뿐 그로 인해 발생하는 희생과 비용에 대한 책임까지 지지 않는다. 결국 원치 않는 임신을 강제하는 것은 여성을 남성에 비해 종속적인 위치에 놓이게 함으로써 자유 뿐만 아니라 평등의 가치 또한 저해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임신중지권에 대한 논의는 언제나 태아의 생명 보호권과 결부되기 때문에 그 어떤 헌법적 근거를 거론하더라도 강한 반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다각도에서 바라보고, 더욱 단단한 헌법적 근거를 찾아내고, 더욱 격렬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가 지켜지고, 또 그 유통기한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만약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에도 유통기한이 있다면 그 유통기한은 결코 끝나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민규 외국변호사 (미국 뉴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