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도, 한번 망가져본 사람이 좋더군요.”
일본 여성 배우 키키 키린이 남긴 말이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2018년 가을 75세에 작고한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어머니/할머니로 등장했다. 늘 가족과 부대끼면서도 그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인간’을 보여주곤 했다.
키키 자신의 말 그대로 그의 삶 역시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18세에 배우 생활을 시작. 21세에 결혼을 하고 25세 이혼. 30세에 록 뮤지션과 재혼. 2년 만에남편의 느닷없는 이혼 청구에 맞서 승소. 40여년 간의 별거생활. 34세 때 경매에 예명을 내놓고 키키 키린으로 개명. 60세에 왼쪽 눈을 실명한 뒤 이듬해 유방암 수술. 이후 연기와 투병을 반복하다 자택에서 사망.
그렇다면 그는 왜 망가져본 사람이 좋다는 것일까. “한번은 자기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 좋다는 거죠. 그런 사람은 아픔이 뭔지 알기 때문에 대화의 폭이 넓고, 동시에 넘어진 자리에서 변화할 수도 있거든요.” (<키키 키린-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
3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한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인간의 깊이는 배움의 길고 짧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부딪혀 처절하게 깨져본 뒤 다시 일어선 사람은 속이 넓고, 유연하며, 경쾌하면서도 무게가 느껴진다. 그들에겐 무언가가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이다.
이 인간의 내면은 소년등과(少年登科)를 했거나 부족함 없이 성장한 이들에게선 느끼기가 쉽지 않다. 지긋지긋한 실패를 겪고도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성장의 계기를 놓쳐버린 이들도 다르지 않다. 실패를 외면한 바로 그 시간대에 정신의 나이테가 멈춰 있다. ‘한번 망가져봤다’는 것은 잘못을 묻는 손가락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려봤다는 뜻이다. 넘어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한 번도 망가져 보지 않은 사람
삶의 좌절을 모르는 사람에게
재판받는다면 얼마나 불행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