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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놉티콘
'한번 망가져본 사람'이 판사라면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2022-10-17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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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도, 한번 망가져본 사람이 좋더군요.”


일본 여성 배우 키키 키린이 남긴 말이다. <걸어도 걸어도>, <바닷마을 다이어리>, <태풍이 지나가고>…. 2018년 가을 75세에 작고한 그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에서 어머니/할머니로 등장했다. 늘 가족과 부대끼면서도 그 울타리 너머에 있는 ‘인간’을 보여주곤 했다.

키키 자신의 말 그대로 그의 삶 역시 사건·사고의 연속이었다. 18세에 배우 생활을 시작. 21세에 결혼을 하고 25세 이혼. 30세에 록 뮤지션과 재혼. 2년 만에남편의 느닷없는 이혼 청구에 맞서 승소. 40여년 간의 별거생활. 34세 때 경매에 예명을 내놓고 키키 키린으로 개명. 60세에 왼쪽 눈을 실명한 뒤 이듬해 유방암 수술. 이후 연기와 투병을 반복하다 자택에서 사망.

그렇다면 그는 왜 망가져본 사람이 좋다는 것일까. “한번은 자기의 밑바닥을 본 사람이 좋다는 거죠. 그런 사람은 아픔이 뭔지 알기 때문에 대화의 폭이 넓고, 동시에 넘어진 자리에서 변화할 수도 있거든요.” (<키키 키린-그녀가 남긴 120가지 말>)

30여 년간 기자 생활을 하면서 정말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한가지 알게 된 것이 있다. 인간의 깊이는 배움의 길고 짧음이나 지위의 높고 낮음과는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부딪혀 처절하게 깨져본 뒤 다시 일어선 사람은 속이 넓고, 유연하며, 경쾌하면서도 무게가 느껴진다. 그들에겐 무언가가 있다. 이를테면, 인간의 내면 같은 것이다.

이 인간의 내면은 소년등과(少年登科)를 했거나 부족함 없이 성장한 이들에게선 느끼기가 쉽지 않다. 지긋지긋한 실패를 겪고도 실패를 인정하지 못해 성장의 계기를 놓쳐버린 이들도 다르지 않다. 실패를 외면한 바로 그 시간대에 정신의 나이테가 멈춰 있다. ‘한번 망가져봤다’는 것은 잘못을 묻는 손가락을 타인이 아닌 스스로에게 돌려봤다는 뜻이다. 넘어진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겠다고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한 번도 망가져 보지 않은 사람
삶의 좌절을 모르는 사람에게
재판받는다면 얼마나 불행한가


그래서 이런 상상을 해보려 한다. 한번 망가져본 사람이 판사가 된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이 판사라면 사건의 이면에 가려진 인간을 바라보려고 노력하지 않을까.심판대에 선 자신과 다름없는 인간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도록 돕는 것이 사법임을 떠올리지 않을까. 무엇이 판례에 맞는 지보다 무엇이 진실인지를 고민하지 않을까. 결론을 놓고 마지막 순간까지 애태우지 않을까. 오판의 가능성에 악몽을 꾸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지 않을까.

그 다음으로 이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지금 한국은 한번 망가져본 사람이 판사가 될 수 있는 사회인가. 돈이 없어서 쩔쩔매본 사람, 부당한 대우에'멘탈'이 붕괴돼 본 사람, ‘비행 청소년’ 딱지가 붙었던 사람이 판사가 될 수 있을까. 안온한 가정에서 소위 명문대, 명문 로스쿨을 나온 사람이 삶의 좌절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거리의 이름 없는 시민들이 하루하루를 어떤 심정으로 살아가는지 가늠할 수 있을까.

한 번도 망가져보지 않은 이들이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있는 사회는 불행하다. 적어도 나라면 그런 사람의 법정에 서는 일만큼은 사절하고 싶다. 차라리 AI(인공지능)에게 내 운명을 맡기는 게 낫지. 만약 키키 키린 같은 판사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아, 나도 망가져봤는데 당신은 좀 심한 거 같네요. 그래도 이해는 합니다. 당신이나 나나 인간이니까.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는 부분 있으면 뭐든지 얘기해봐요. 성질 죽이고 들어볼게요.”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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