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 국민은행
top-image
logo
2023.06.08 (목)
지면보기
한국법조인대관
김지형의 추상과 구상
재판 이야기
김지형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지평·전 대법관)
2022-10-20 07:53

2022_chu_gu.jpg

 

‘낸시’라는 변호사가 한 남자의 변호를 맡는다. 그 남자는 9·11 테러의 핵심 용의자로 체포된 후 범행을 자백하고 6년 동안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 중인 ‘슬라히’다. 낸시는 슬라히가 심한 고문 끝에 자백한 것을 알아차리고 그의 무죄를 주장한다. 그러나 군검찰관 ‘카우치’는 슬라히의 유죄를 확신한다. 그가 흉악한 테러범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여기고, 그런 자를 변호하는 낸시에게 적개심 가득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조국에게 그토록 극악무도한 범죄를 저지른 자를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변호합니까?”

관종 아니냐는 뉘앙스다. 그러나 낸시는 차분하게 응수한다.

“나는 테러범을 변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조국의 법을 변호하는 겁니다.”

실화에 바탕을 둔 미국 법정 영화 〈모리타니안〉에 나오는 명대사다.

 

182447.jpg


미국 법정 영화 중에는 유명한 것이 많다. 〈12명의 성난 사람들〉〈뉘른베르크의 재판〉〈앵무새 죽이기〉〈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어 퓨 굿맨〉〈필라델피아〉〈레인메이커〉 등은 우리 귀에 익다.

국내에도 〈변호인〉〈재심〉〈의뢰인〉〈부러진 화살〉 등으로 대표되는 법정 영화가 있다. 국내외 드라마에서도 재판 이야기는 흥행을 이끄는 소재다. 얼마 전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가 절정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요즘 TV에서 방영되는 드라마는 재판을 다루는 사례가 넘치고 있다. 넷플릭스와 같은 OTT가 제공하는 드라마 중에서도 법정 드라마는 인기 순위가 높다.

줄거리도 줄거리거니와, 번득이는 대사, 진실과 허위를 가르는 양측의 날카로운 공방, 예상을 뒤엎는 반전과 반전의 연속, 정의의 메시지를 담은 승리의 결말 등이 법정 영화나 드라마에 인기를 더하는 요소 아닐까 짐작한다.

재판 이야기는 좋은 글감이기도 하다. 존 그리샴의 법정 소설 말고도 재판 관련 저술은 아주 많다. 워싱턴포스트 기자 밥 우드워드와 스콧 암스트롱이 쓴 〈지혜의 아홉 기둥(The Brethren)〉이 압권이다. ‘아홉 기둥’은 아홉 명의 미국 연방대법관을 지칭한다. 〈더 나인〉은 그 속편 격이다. 그 밖에도 재판을 다룬 국내외 책이 꽤 많다. 〈대법원, 이의 있습니다〉〈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비롯, 〈미국을 발칵 뒤집은 판결 31〉〈세상을 바꾼 법정〉〈재판으로 본 세계사〉〈이상한 재판의 나라에서〉〈세기의 재판〉〈재판으로 본 한국 현대사〉 등이 그것이다.

정치영역서 해결해야 할 사안
법원의 문 두드리는 경우 잦아
이런 현상이 ‘정치의 사법화’
성찰과 해법은 누구의 몫인가


그러나 영상이나 활자 속 재판과 현실의 재판은 사뭇 다르다. 현실 속 재판은 당자에게는 일종의 게임이고 전쟁이다. 승소와 패소라는 단어에서 유추하듯이 승패가 갈린다. 이기기 위해 또는 지지 않기 위해 절치부심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한다. 때론 분노와 증오, 허위와 모략, 폭력에 가까운 거친 언사도 불사한다.

근자에 정치문제가 법정에 오는 것에 대해 논란이 있다. “입법이나 정치의 영역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한 사안인데도 법원의 문을 두드리는 경우가 많아지고 있습니다.” 최근에 임기를 마친 대법관이 퇴임사에서 한 말이다.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치인도 “정치하는 집단이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를 사법부에 맡기면 안 된다”며 법원의 정치화를 염려했다고 한다.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는 견해도 있겠지만, ‘문제다’는 쪽에 선다면 우려에 그치지 말고 ‘왜 그럴까’까지 생각해야 할 듯하다. 근원을 알아야 처방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재판은 변호사에게는 그의 존재 이유의 하나다. 따라서 재판 결과에 일희일비하는 것, 이는 변호사의 숙명이다. 그러나 정치인에게는 재판이 그의 존재 이유가 아니다. 그런데도 정치인이 재판 결과에 일희일비한다면? 정치인이 정치를 정치로 풀지 않고 재판에 의존하려는 현상을 두고 걱정할 것은, 사법의 정치화가 아니라 정치의 사법화 아닐까? 그런데도 정치인 스스로 그런 결과를 감수하려 든다면? 그 이유가 무엇일까.

정치를 승패를 나누어 재판이든 어떻게든 이기는 쪽만이 살아남는 양자택일의 게임으로 생각하기 때문 아닐까? 이렇게 된 것은 정치에서 승자와 패자를 갈라 승자가 모든 정치권력을 독차지하는 구조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이 구조가 변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이 난제는 정치인의 의지나 자제에 맡기기보다는, 토론하고 타협하며 절충이 이루어지는, 정치가 진정으로 숨 쉬는 제도 개혁으로 풀어야 하지 않을까?

재판 얘기 끝에 어리석은 질문만이 꼬리를 문다. 성찰과 해법은 누구의 몫인가.


김지형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지평·전 대법관)

 

 

리걸 에듀
1/3
legal-edu-img
온라인 과정
전사원이 알아야 할 계약서 작성 상식
고윤기 변호사
bannerbanner
footer-logo
1950년 창간 법조 유일의 정론지
논단·칼럼
인기연재
지면보기
굿모닝LAW747
LawTop
footer-logo
법인명
(주)법률신문사
대표
이수형
사업자등록번호
214-81-99775
등록번호
서울 아00027
등록연월일
2005.8.24
제호
법률신문
발행인
이수형
편집인
차병직 , 이수형
편집국장
배석준
발행소(주소)
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대로 396, 1402호
발행일자
1999.12.1
전화번호
02-3472-0601
청소년보호책임자
김순신
개인정보보호책임자
김순신
인터넷 법률신문의 모든 컨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전제,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인터넷 법률신문은 인터넷신문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