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이가 많은 아버지는 타지로 일을 다니느라 얼굴조차 보기 힘들었고, 엄마는 약물중독에 허덕였다. 부모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지 못한 그의 가정환경은 그 동네에서는 특별히 불행한 수준은 아니었다. 남미 출신 가난한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그 지역에서는 소년원에 다녀오는 일이 청소년들의 통과의례로 여겨질 정도였다. 그도 10대 초중반 갱단 또래와 어울려 다니며 소년법정을 몇 번 들락거렸다. 거기까지는 동네 친구들과 다를 바 없는 그럭저럭 '평범한 삶'이었다. 1999년 무기를 소지한 채 저지른 살인 미수죄로 징역 30년형을 선고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때 그는 열여섯 살이었다.
그로부터 23년 후 그는 징역 30년 형을 선고받았던 주 법원 법정에 다시 섰다. 놀랍게도 이번엔 변호사 선서를 위해서였다. 그는 변호사 신분으로 미국 법무부에 고용되어 '두 번째 기회(Second Chance, 출소자들에게 사회 재통합을 위한 전문가 서비스를 지원하는 프로그램)' 관련 일을 한다. 그의 새로운 출발을 축하하는 자리가 23년 전의 바로 그 법정에서 열린 것이다. 얼마 전 외신에서 접한 엔젤 산체스(Angel Sanchez) 변호사의 이야기다.
감옥에서 비로소 공부를 시작한 그는 12년 복역 후 출소했고(열여섯 소년에게 성인 기준으로 형을 준 것이 잘못된 절차로 판명되어 2011년에 12년형으로 줄었다), 홈리스 보호소에서 생활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대학과 로스쿨을 졸업했다. 졸업 당시에도 거주할 집이 없어 차 안에서 숙박을 해결하는 홈리스인 건 여전했지만 상위 10%에 속하는 우수한 성적이었다.
감옥에서 비로소 공부 시작해
우수한 성적으로 로스쿨 졸업
인생 역전은 의지만으로 안돼
연민 동반한 도움의 손길 필요
기자들의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기자들은 아마도 천성이 반듯하고 머리도 좋은 아이가 운 나쁘게 불우한 가정, 우울한 동네에서 자라면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며 잠시 방황했으나 불굴의 의지로 인생 역전을 이루어낸 이야기를 기대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가 기자들 앞에서 전한 메시지는 전혀 다른 방향이었다. "의지만으로는 해낼 수 없습니다. 연민을 동반한 도움의 손길이 의지와 만나야 가능합니다… 형사 사법 체계가 정말로 정의로우려면 처벌받는 사람에게 회복될 기회 또한 주어져야 합니다."
미국에서 중범죄자 출신 변호사는 산체스 이전에도 여럿 있었다. 그중 몇 사람만 예로 들어보자. 은행을 다섯 번 턴 전력으로 12년을 복역한 숍 홉우드(Shop Hopwood)는 공익변호사이자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이고(그의 회고록은 국내에도 번역 출간되어 있다), 10대 시절 차량절도 비행으로 9년을 감옥에서 지낸 레지날드 베츠(Reginald Betts)는 예일대 로스쿨 졸업 후 시인이자 변호사로 교도소에 문학을 전파하는 재단을 세웠다. 마약과 폭행으로 교도소를 여러 번 오간 데스몬드 미드(Desmond Meade)는 한때 자살 시도까지 하며 삶을 포기하려 했지만, 회복 끝에 변호사가 되어 출소자들의 투표권 회복을 위한 운동에 앞장섰다. 다들 뛰어난 개인이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인생 역전 드라마는 그 사회에서는 '회복될 기회'가 작동되고 있는 걸 보여주기도 한다(산체스는 아직 부족하다고 하지만).
국선변호인으로 맡았던 젊은 혹은 어린 범죄자들이 새삼 떠오른다. 그들 중 상당수는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라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으며, '연민을 동반한 도움의 손길' 또한 거의 받지 못해 출소 후에도 삶이 달라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안타깝지만 그중 어느 누구도 결코 '산체스'나 '홉우드' 같은 이는 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출소 후 형사 법정에 다시 서지 않을 정도의 '회복될 기회'는 누구에게든 반드시 주어져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 처벌의 또 다른 기능이고 교정 당국의 주요 역할인데, 우리 사회는 처벌 자체에만 관심이 쏠리고 처벌 이후의 회복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산체스 이야기에 며칠째 마음이 뺏긴 건 파란만장 드라마 자체보다도 아무 가망 없어 보이는 중범죄자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지는, 처벌 이후의 '회복될 기회'가 실제로 실현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놀랍고도 부럽다.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