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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편집인 칼럼
[차병직 편집인 칼럼] 법이 개인의 초상에 미치는 영향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2022-12-0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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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발간된 책 한 권이 눈에 띈다. 정수일 회고록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이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시대를 살기 마련인데 굳이 ‘시대인’이라 표현한 것은 남북 분단의 시대에 그 경계를 넘기 위하여 무수한 국가를 거쳐야 했던 자신의 파란만장한 삶을 투영한 결과로 짐작한다.

그의 출생지는 옌볜의 쯔신, 중국 영토이나 태어난 해가 1934년이었으니 형식상으로는 만주국이었다. 할아버지가 함경북도 명천에서 이주한 화전민이었기에 집에서는 조선어를, 바깥에서는 중국어를, 학교에서는 일본어를 사용하는 환경이었다. 종전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에 이어, 1952년 새 시험제도가 시행되면서 중국 젊은이들도 원하는 대학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첫해 옌볜 전역에서 단 두 명이 베이징대학에 합격했는데, 그중 하나가 정수일이었다. 이불과 봇짐을 꾸려 며칠을 여행한 끝에 베이징에 닿았고, 동방학부에 들어가 아랍어를 전공했다. 헌법이 채택된 다음 해인 1955년 이집트와 문화협정을 체결하면서 중국 정부는 정수일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해 카이로대학에 보냈다.

졸업 후에는 모로코 대사관에 파견되었다. 중국 외교관으로서 아프리카 독립 과정을 지켜보던 그는 어떻게든 자신의 조국 통일에 기여하리라는 열망을 열병처럼 지니게 되었다. 총리 겸 외교부장 저우언라이에게 청원하여 중국 국적을 버리고 북한으로 갔다.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분리된 평양외국어대학 교수로 재직 중 특수공작원 교육을 받았고, 아내와 세 딸을 둔 채 길을 나섰다. 5년 남짓 세계 각국을 전전하다 레바논에서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타갈로그어까지 익혀 필리핀으로 국적을 변경한 끝에 1984년 서울에 도착했다. 아랍어 실력을 인정받아 방송과 강단에서 활동하다 다시 결혼했고,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에 자리를 잡았다.

세상 떠들썩하게 했던 위장 간첩 ‘깐수’ 사건 주인공
교도소에서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 완역 학자로
드라마틱한 삶의 변화에 법조인 등의 보조가 기여


실크로드와 문명교류 분야에서 연구 성과를 남기며 가장 한국인다운 외국인으로 인지도를 넓혀 가던 중, 1996년 위장 간첩으로 체포되었다. 변호사들이 달려갔으나, 모든 것을 시인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것으로 공적인 삶은 종국을 맞기 마련일 텐데, 오히려 그때부터 새로운 인생을 모색했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던 날, 그는 최후진술에서 목숨보다 압수된 고대동서교류사 원고를 살려달라고 했다. 선고를 이틀 앞두고 검사는 컴퓨터 기술자와 함께 그를 소환해 원고를 복원했다. 구치소에서 헨리 율의 《중국으로 가는 길》을 초역했고, 교도소로 옮겨서는 아랍-아랍어 사전 한 권에 의지해 방대한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완역했다. 오직 책만 펼치고 있는 모습에 감복한 교도관은 다른 재소자들이 잠든 깊은 밤에 복도의 조도를 조심스럽게 올려 그의 독서와 집필을 도왔다.

국가보안법위반이라는 죄명과 12년의 확정형에도 불구하고 이례적으로 4년 만에 형집행이 정지되었고, 다시 3년 뒤에는 사면 복권까지 이루어졌다. 2007년에는 서울고등법원과 대법원에서 보안관찰처분마저 취소하여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우여곡절 끝에 발급받은 여권을 쥐고 현장의 정신과 혜초의 마음으로 이븐 바투타보다 긴 답사에 나서며 해마다 저서를 냈다.

수많은 언어를 구사하며 집요한 정신력과 강인한 체력으로 이룬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릴 수 있으나,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사건의 주인공이 파도와 같은 궤적을 남기며 구순을 맞아 회고록을 낸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미망의 세상에서 미로를 헤치고 한 송이 꽃으로 남은 느낌이다. 깐수가 간첩에 머물지 않고 학자 정수일로 거듭 태어난 것은 드라마틱한 삶의 주인공으로서 발휘한 자신의 의지 때문만은 아니다. 격정의 일생이 긍정적으로 비칠 수 있다면 거기에는 드러나지 않게 변호사, 검사, 판사, 법무부 장관에서 교도관에 이르는 공무원들의 보조가 기여했다. 사회 체계 안에서 개인의 삶이 어떤 형태와 질을 갖추게 될 것인가에 법제도와 법률가의 역할이 결정적 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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