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 제1조는 국가가 지향하는 최상위의 가치를 표방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정하고 있다. 우리가 ‘국민주권’, 독일이 ‘인간의 존엄’, 프랑스가 ‘법 앞의 평등’, 일본이 ‘천황제’를 정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요즘 각별히 표현의 자유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고 싶은 마음이 생겨, 수년 전에 읽은 책을 다시 꺼내보았다. 《우리가 싫어하는 생각을 위한 자유(Freedom for the Thought That We Hate)》라는 책이다. 이 제목은 올리버 웬델 홈스 대법관이 판결문에 표현의 자유를 풀어쓴 문구 그대로를 따온 것이다.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역사’라는 부제가 있다. 저자 앤서니 루이스는 퓰리처상을 두 차례나 수상한 저널리스트다. 책 속 몇 군데 대목이 새삼 흥미롭다.
- 미국 헌법 제1조가 웅변하듯, 미국은 처음부터 표현의 자유의 천국이었을까?
「1791년 수정헌법 제1조가 미국 헌법에 더해졌다. 그러나 고작 7년 뒤 의회는 대통령에 대한 무례한 언급을 처벌하는 법을 통과시켰고, 존 애덤스 대통령을 조롱한 혐의로 편집자들이 투옥되었다. 한 세기 후에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을 비판한 사람들에게 징역 20년이 선고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미국 대통령은 비판과 조롱의 대상이다. 미국인들은 어떤 결과가 뒤따를지 전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국가의 통치자를 비난할 수 있다. 헌법 문언은 그대론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인가가 일어난 것이다.」(13~14쪽)
-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뉴욕타임스>가 마틴 루터 킹 박사의 지지자들이 낸 광고를 게재하였다. 광고는 ‘인종주의적인 남부 경찰공무원들이 킹 박사를 날조된 혐의로 일곱 번이나 체포했다’는 내용이었다. 남부 몽고메리 시 경찰서장인 설리번은 <뉴욕타임스>를 고소했다. <뉴욕타임스>는 광고가 진실임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1964년에 연방대법원은 <뉴욕타임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설리번 판결은 수정헌법 제1조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판결로 꼽힌다. 이 판결에서 브래넌 대법관은, 공적 사안에 대한 토론은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는 원칙, 거기에는 정부와 공직자들에 대한 맹렬하고 신랄한, 불쾌하리만큼 날카로운 공격이 포함될 수 있다는 원칙은 국가적 의지로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공적 행동을 비판하려는 사람들이 ‘비판이 진실이거나 진실이라고 여겼다는 점을 법정에서 입증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나 또는 ‘그렇게 하느라 얼마나 많은 비용이 들까’ 하는 우려 때문에 비판을 단념할지 모르므로, 비판자들이 이를 입증해야만 면책받을 수 있다고 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86쪽, 91~92쪽)
- 공직자 비판에 한계는 없는가?
「브래넌 대법관은 수정헌법 제1조가 공직자 비판에 절대적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비판자가 거짓을 알았거나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부주의하게 무시했다는 사실을 공직자가 증명하면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했다. 강연에서 브래넌 대법관은 그 이유를 말했다. “거짓으로 알고 있는 바를 도구로 이용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전제들과도, 또한 변화가 일어나는 질서정연한 방식과도 상충되기 때문이다.”」(93~94쪽)
우리에게도 사례가 있다. 미국산 쇠고기 광우병 사태와 관련하여 ‘협상단 대표와 장관이 협상을 졸속으로 체결했다’고 한 방송 보도, 세월호참사국민대책회의 위원장이 ‘참사 당일 7시간 동안 대통령이 마약이나 보톡스를 했다는 의혹이 사실인지 청와대를 압수수색해서 확인하면 좋겠다’고 한 기자회견 발언 등이 형사 문제된 바 있다.
우리 판례도 설리번 판결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부나 국가기관에 관련된 사항은 항상 국민의 감시와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이런 사항의 보도나 발언으로 인하여 공직자의 사회적 평가가 저하될 수 있더라도 곧바로 명예훼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공직자 개인에 대한 악의적이거나 심히 경솔한 공격으로서 현저히 상당성을 잃은 경우는 예외다」는 것이다. 앞서 든 사례에서는 명예훼손이 부정되었다.
허위 표현도 보호받을 수 있는가. 표현의 자유가 던진 중요 질문 중의 하나다. 가짜뉴스에 대한 우려도 거기서 파생한다. 특히 공직자에 관한 가짜뉴스는 책임을 묻기가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악의적이면 책임을 물을 수 있지만, 증명이 쉽지 않고 증명하더라도 그때는 이미 가짜뉴스가 할 일을 다 마친 다음이다.
그렇다면 일정 부분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답인가? 아니라고 믿는다. 미국의 설리번 판결이나 우리 판례가 경험으로 논증한다. 그보다는 ‘그런 가짜뉴스가 끊이지 않는 현실적 배경이 무엇인지 먼저 봐야 한다, 바로 수요가 있기 때문이다’는 분석에 귀가 쏠린다. 무엇이든지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뉴스의 진위는 더 이상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이렇게 보면 허황된 뉴스 수요를 쫓지 않는 공급자 스스로의 윤리 회복을 기대해야겠지만,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이렇듯 표현에 관한 한 규제 강화나 막연한 기대가 답이 될 수 없다면, 해법은 어디서 찾아야 할까? 결국 시장의 순기능으로 풀어야 하지 않을까? 사상의 시장에서의 자유로운 공개경쟁에 의해 허위가 걸러지게 하자는 것이다. 가짜인지 아닌지, 악의적인지 아닌지는 양식 있는 시민은 공방을 지켜보면 안다. 통제나 억압의 방식은 끝까지 절제하고 시민사회의 검증과 판단에 맡기는 것이 순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김지형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지평·전 대법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