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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병직 편집인 칼럼
[차병직 편집인 칼럼] 미래의 기억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2022-12-22 0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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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사회가 붕괴하고 있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농촌 인구는 줄고, 군대 기강은 엉망이며, 자살이 점점 늘어나는 데다, 광기와 정신박약 그리고 폐 질환이 자꾸 증가하고, 신경쇠약과 활력 감소의 징후가 농후하고, 음주벽과 약물 남용이 곳곳에 만연해 있으며, 아이들의 시력은 갈수록 약해진다.”

이것은 루돌프 아른하임이 1979년 쾰른에서 펴낸 《엔트로피와 예술》에 들어 있는 구절인데, 스스로 만든 것이 아니라 1949년에 나온 핸리 애덤스의 《민주주의 교리의 쇠퇴》에서 인용한 문장이다. 애덤스 역시 창작자는 아니었는데, 실은 1910년경 독일과 프랑스의 신문에서 거의 매일 떠들어 대던 말을 옮긴 것이었다.

113년 전 유럽에서 유행하던 주장이 39년 뒤에 미국의 책에 등장하고, 30년이 더 흐른 다음에 독일 책에 재인용되고, 17년 뒤에 한국에서 번역되었는데, 그로부터 또 27년이 지나 2023년이라는 새해를 열흘쯤 앞둔 이때 신문에 써도 아무렇지도 않다. 아마 19세기 이전에도 시대의 조류인 양 그런 말은 떠돌았을 것이다.

한 세기도 더 이전의 유럽 시대 상황은 지금 우리 실정에 비추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왜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일까? 변화는 인간의 착시 현상이고, 삶의 실질이나 근본은 애당초 잘 바뀌지 않기 때문일까? 일정한 양상은 반복되기 마련인가? 사회 환경에 대한 인간의 인식 패턴이 그렇게 만드는 것일까?

낡은 과거를 파괴하기보다
참신한 미래 건설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밑을 맞으면 조금은 들뜬 기분이 된다. 새해의 입구가 쳇바퀴의 회전수를 하나 더 올리는 발판이 아니라, 새로운 판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희망의 문으로 비치기 때문이다. 신년으로 접어드는 순간 마음에 차지 않는 지난 것을 버릴 수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여태까지 지녔던 것을 잊거나 폐기하면, 앞으로 생기는 것은 새것일 수밖에 없다는 단순 논리가 쾌감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망년은 한때 불가결의 연례행사였다. 송년으로 용례가 바뀐 것은 어감 탓이었겠지만, 그 형식에 불과한 용어 선택의 정치적 올바름의 뉘앙스에는 여전히 망년의 위로가 담겨 있기에 유효하다. 그러나 등 뒤에 둔다고 잊히는 것은 아니다. 뒤돌아보면 사라지지 않고 거기에 쌓여 있다. 지난 한 해는 버려서 가벼워지기는커녕, 등에 얹혀 현재의 삶을 더 무겁게 만들 우려가 클 뿐이다.

우리는 과거가 없으면 살지 못할 존재처럼 지나간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잦은 반성이나 성찰의 시간은 물론이고, 미래를 지향한다는 명분으로 펼치는 기획 프로그램조차 지난 일에 기댄다. 과거의 사건을 파헤쳐 청산하고자 애쓰는 노력으로 역사적 의무를 수행한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내용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옛 지식과 정보들이다. 정치 무대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가장 자주 동원되는 무기는 어제 저지른 상대방의 실수다. 어린 시절 비행이 하나만 드러나도 개인의 미래는 일순 먹구름 속에 빠져든다. 모든 뉴스는 어제의 일이며, 창조는 세계의 모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법조의 영역은 말해 무엇 하겠는가. 수사나 재판이나 변론이나 판례평석이나, 지난 것이 소멸해버리면 존립이 불가능하다.

마냥 과거에 떠밀리다시피 새날을 맞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낡은 과거를 파괴하기보다 참신한 미래를 건설하는 일에 몰두할 수 있다면 우리의 기분은 한결 나아질 수 있으리라, 새 달력을 본다. 루이스 캐럴의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151년 전 이즈음에 나온 책인데, 한 페이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지나간 일만 안다면, 그건 기억력이 무척 나쁜 거란다.”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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