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우리는 기후 변화 위기의 한가운데를 통과 중이다.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지구법학(Earth Jurisprudence)의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현재의 지재법 차원에서 환경보호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일까?
현 단계에서 실천 가능한 것은 유한한 자원의 순환이용, 즉 재사용·수리·재생산을 포괄하는 ‘재활용(recycling)’이 허용되는 방안을 찾아보는 것이다. 그중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특허권 소진 이론(patent exhaustion doctrine)’이다. 특허권의 소진이란 특허권자 등이 특허품을 양도한 경우 해당 특허품에 대해 특허권은 그 목적을 달성하여 소진하므로 그 특허품을 사용하거나 다시 양도하더라도 더 이상 특허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판례도 인정하는 이론이다.
문제는 어디까지 소진을 인정할 것인지 그 한계를 정하는 일이다. 예컨대, 특허품을 제3자가 국내 혹은 외국에서 구입한 후 부품을 교체하여 사용하거나 재판매하는 경우, 사용이 끝난 특허품을 재활용하는 경우 이를 특허권 침해라고 할 것인지, 아니면 특허권이 소진되었다고 할 것인지의 문제이다.
美연방대법원, Lexmark사 카트리지 재활용 판결
자원 재활용 전반에 활로를 열어준 기념비적 판단
지재법, 기후 위기 극복 위해 자세 낮출 필요 있어
사용이 끝난 특허품을 재활용하는 것은 환경보호의 관점에서는 환영받을 일이다. 그러나 특허품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에 구체적 사안에 따라 국내외적으로 판례와 학설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일률적으로 답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눈에 띄는 판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로 미국 연방대법원이 2017년 5월 30일 선고한 Impression 대 Lexmark 사건 판결이다. 사안은 Lexmark사가 재판매 금지 조건 아래 레이저 프린터용 토너 카트리지를 판매하였는데 Impression사가 사용이 끝난 카트리지를 국내외에서 회수하여 이를 재생한 다음 재판매한 사건이다. 연방대법원은 특허권자가 적법한 제한을 가해 특허품을 판매하거나 외국에서 판매하였더라도 특허권이 소진된다고 판결하고 이를 부정한 연방순회항소법원(CAFC) 판결을 뒤집었다.
미국에서 연방대법원 판결은 찬성보다 비판을 더 많이 받았다. 이 사건이 상고되었을 때 미국 로스쿨의 지재법 전공 교수 44명은 원심판결을 지지하는 법정조언자 의견서(amicus curiae brief)를 제출하였다. 대법원판결 직후 열린 2017년 미국지적재산법협회(AIPLA) 총회에서는 조건부 판매, 국외 판매 모두에 특허권 소진을 인정함으로써 미국 산업에 불이익을 초래한 판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이 판결은 환경보호라는 관점에서 자원의 재활용 전반에 활로를 열어준 기념비적 판결이다. 특허제품의 교체부품을 재활용하는 것이 특허법 관점에서도 적법하다는 것을 인정한 판결이기 때문이다.
우리 실무와 학계도 이 판결을 특허권자의 교체부품 시장의 잠식이라든가 혹은 병행수입의 활성화라는 측면에서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한다. 이 판결은 기후 위기를 헤쳐 나가는 지재법의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준 판결이다. 기후 위기의 극복을 위해서라면 지재법은 좀 더 자세를 낮출 필요가 있다.
박성호 교수(한양대 로스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