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히 나열된 이 세 단어에서 연상되는 것이 있다면? 형사 재판에 한정한다면 가장 먼저 피고인의 어설픈 변명이 떠오른다. 자신이 한 일을 안 했다고 우기지만 완벽한 거짓말은 쉽지 않다. 사이코패스 같은 흉악범이 연상되기도 한다. 친절한 이웃으로 알고 있던 사람이 실은 연쇄 살인범이었다거나 악명 높은 성 착취물 제작자가 봉사활동을 꾸준히 해 왔다는 등의 뉴스를 장식한 이들 말이다.
그런데 위 세 단어를 나란히 붙여 놓은 출처인 그 유명한 대법원 판례의 맥락은 이런 직관적 연상과는 거리가 멀다. 문제의 문장은 이렇다. ‘검사의 공소사실과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들에서 보이는’ 여러 불일치, 모순, 의문에는 애써 눈감으면서, 오히려 피고인의 주장과 증거에는 불신의 전제에서 현미경의 잣대를 들이대며 엄격한 증명을 요구하는 것은 형사법원이 취할 태도가 아니다(2010도16628). 범죄자들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믿을 수 없는 진술이 아니라 공익의 대표자가 구성한 사실 혹은 정리한 증거에서의 불일치·모순·의문이라니! 당혹감은 이내 열광적인 환호로 변했다. 형사 법정에서 무죄추정주의 원칙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의구심을 품어 본 변호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문장이다.
최근 어떤 사건 변론서면에 인용하기 위해 다시 저 판례를 찾았다가 문득 형사 재판의 맥락을 제거하고 ‘불일치, 모순, 의문’ 부분만을 뚝 떼어내 던져놓아 보았다. 비법률가 친구들에게 물었다. 이 세 단어에서 무엇이 연상되느냐고. 인생 그 자체, 부조리한 삶, 인간 본질, 인간의 한계 같은 답들이 쏟아졌다. 고개가 끄덕여졌다. 과거 젊은 날 가졌던 가치관과 나이 지긋이 든 오늘의 가치관이 다르고, 내가 한 행동을 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때가 많고, 내가 한 행동은 내가 쓴 글과 어긋난다. 내 삶에서도 그렇지만 타인들 삶을 볼 때는 더 하다(내로남불의 연장). 분명히 알 만큼 아는 인간인데 왜 그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어제 한 말과 오늘의 행동이 다르다고 흉을 본다.
공소사실은 이 세 단어 빠져나갈 수 없어
형사 재판은 완전히 해소된 진실이 아닌
의문 정리하고 모순·불일치 분석하는 과정
삶 자체에 불일치, 모순, 의문이 가득한데 삶의 한 단면을 다루는 공소사실이 무슨 수로 그 세 단어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대법원이, 피해자 등 증인의 진술에서 보이는 불일치, 모순, 의문에 대해 트집 잡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태도를 강화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증인의 진술이 주요 부분에서 일관성이 있다면 사소한 사항에 관한 진술에 다소 일관성이 없다는 사정만으로 그 진술의 신빙성을 함부로 부정하여서는 아니 되고(2008도12112), 특히 성폭력 사건의 경우 개별적 구체적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하여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가볍게 배척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어긋난다(2018도7709).
피해자든, 증인이든, 피고인이든 모두가 한계를 지닌 인간이다. 그러니 형사 재판은, 인생의 다른 모든 분야와 마찬가지로, 불일치·모순·의문이 완전히 해소된 진실을 찾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일치·모순·의문 세트를 디폴트 값으로 받아들인 상태에서 의문을 정리해보려고 하고, 모순과 불일치를 분석해가는 과정이 아닐까 싶다.
‘불일치, 모순, 의문’을 처음 내건 저 판례 문구는 너무 당연한 진리를 멋진 표현으로 남겼다. 다만 그렇게 멋진 문구가 판례공보에 등재되지 않고, 법원 종합법률정보에서 검색이 되지 않는 게 마음에 걸린다. 형사 변호인들이 사랑하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언론에도 여러 번 언급되어 찬사를 받은 판례의 존재를 꽁꽁 숨기고 있는 이유가 뭘까. 장삼이사 피고인들이 최후변론에서 저 멋진 문장을 읊어대기 시작하면 감당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은 아니라고 믿고 싶은데,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판례에도 불일치, 모순, 의문이 남는다. 판례도 삶의 한 부분이니까 당연한 건가.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