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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 만나는 법] 숭고하되 자신만 숭고한지를 모르는 사람… 정회철 전통주조 ‘예술’ 대표
김도언 시인(소설가)
2023-01-16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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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고유한 서사를 가지고 있고, 대부분 그 서사를 애착한다. ‘내 삶을 책으로 쓰면 서너 권은 족히 나올 것’이라는 말은 거의 장삼이사들의 췌사가 되다시피 했다. 그런데 정회철(61·사법연수원 30기) 대표가 가진 삶의 내력은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알 만큼 그 형식과 내용의 총량이 압도적인 것이었다.


서울 용문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98년 제40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연수원 수료 후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고시학원에서 강의를 해왔다. 그가 쓴 10권 이상의 수험서는 사법시험 합격생들의 합격기에 단골로 꼽혔고, 신림동 고시촌에서는 '스타강사'로 불렸다. 이후 충남대 로스쿨 교수를 지내다 2012년 전통주 제조에 빠져들어 강원도에서 전통주조 '예술(예로부터 내려온 술)'의 대표로서 전통주를 빚고 있다. 


그의 삶을 짧게 정리하면, 전두환이 집권하던 해 서울법대에 입학해 학생운동을 하다가 2학년 때 제적당하고 군 제대 후 본격적으로 인권·노동운동에 투신, 파업을 주도해 구속·수감되기도 한다. 이후 정부의 특례 재입학 조치로 33세에 학교에 돌아가 사법시험 준비 3년 만에 패스하고 판사 임용을 희망했으나 학생운동과 전과가 문제가 되었는지 좌절한 뒤 변호사로 일하다가 적성이 맞지 않아 변론 활동보다는 사시 수험생 상대로 강의하고 교재를 집필하는 데 집중한다. 이때 발행한 수험서가 소위 ‘대박’을 터뜨려 돈을 벌기도 한다. 그러곤 강의 실력을 인정받아 충남대 로스쿨 교수로 임용되는데 긴장과 과로 속에서 건강을 상해 그만둔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한국 전통주 세계에 빠져들어 지금은 고급 백화점에도 납품하는 명품주를 만드는 장인이 되었다는 것.

어떻게 한 사람의 인생 총량이 이렇게 장강 범람하듯 넘칠 수 있는 건지. 아울러 세속적 욕망의 생리를 거스른 그 내용은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늘 헤매는 범인들에게 판타지를 심어주기 충분하지 않은가. 하지만 그가 있는 춘천을 향해 가면서 나는 그를 섣불리 재단하지 않겠다는 새삼스런 각오를 다졌다. 대부분의 진실은 노출된 텍스트보다 보이지 않는 행간에 숨어 있을 공산이 크리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세거지는 군산인데 4남매 중 막내로 광주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부터 서울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가 전기·전자 관련 사업을 하셔서 중학교 때까지는 유복하게 자랐는데, 고등학교 올라갈 때 큰 사기를 당해 가계가 몰락했고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신림동 단칸방으로 이사를 했어요. 거기서 여섯 식구가 살았죠. 저는 아버지로 표상되는 권위, 수직 관계 이런 걸 정말 싫어했어요. 그래서 나이 많은 남자들과의 관계가 늘 힘들었어요. 오히려 여자들과의 관계가 무난하죠. 지금은 안 그런데 성장 과정 중에 말더듬증이 심했고 좀 담이 작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내성적이었고 고2 때 원인을 알 수 없는 지독한 마비 증세, 가위눌림에 매일 밤 시달렸어요. 손가락 하나 움직이면 풀리는데 그 손가락 하나를 움직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병원에 가보지도 못해 그게 뭔지도 모른 채 견뎌야 했어요.”

노동운동 투신했다가 늦깎이로 사법시험 공부
사시 수험생 강의 · 수험서 집필, 로스쿨 교수로
건강 악화로 떠난 요양길서 전통주 제조에 눈떠
한국 술의 정체성은 ‘누룩’… 제조법 포기 못해


여기까지 듣고 나는 그가 유리처럼 섬세한 영혼을 가진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혼을 잠식한다는 불안의 원천소유자. 그는 자신의 심리적 문제를 자각하면서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는데, 아버지가 법학을 권유해 법학과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 분위기가 학생운동을 안 할 수 없었다고. 자신의 한때 장래희망이 정치가였는데 정치라는 게 혁명이나 변혁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생각했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펄벅의 소설 『대지』나 영화 <닥터 지바고>를 접하면서 가슴이 뛰었다는 고백에 이르니 그에게 낭만적 신념이 있었던 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그 대가로 그는 학교에서 제적당한다. 전두환 정권이 학원가를 단속하기 위해 도입한 졸업정원제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는 군 제대 후 노동, 인권 운동에 진력한다.

“대학에서 언더서클 활동을 하고 이후에 야학이나 노동운동 등을 하면서 제가 비로소 심리적인 문제로부터 해방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삶의 주체자로서 정말 내가 내 인생을 살고 있다는 자각이 들었죠. 지금 아내도 야학하는 친구 소개로 노동운동을 하다가 만났구요. 그래서 결혼도 하고 애도 낳았는데, 먹고 사는 게 정말 쉽지 않았어요. 집 보증금도 노동운동을 하는 데 다 써버렸거든요.”

자신의 곤궁했던 시기를 고백하는 그의 표정과 말투는 진솔했지만 내게는 다만 처절하게 들렸다. 우리나라 최고 학부, 최고 학과를 다녔던 이가, 그리고 옳다고 믿었던 일을 했을 뿐인 이가 그 대가로 빈곤을 돌려 받았을 때, 그때 그는 자신의 자의식을 거울에 비춰보며 상처를 받지는 않았을까. 후회는 없었을까. 그도 인간인데 듣는 귀와 보는 눈이 있을 것 아닌가. 그와 함께 학생운동을 했던 이들이 제도권 공직이나 정치권에 들어가 활동하는 것을 보면서 불편했던 적은 없었을까. 자기 삶은 이렇게 고달픈데 말이다.

“그때는 그게 저에게는 당연하게 다가오는 삶이었어요. 그리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자부심 같은 게 있었기 때문에 고달픔 같은 것도 못 느꼈고요. 학교를 일찍 떠났기 때문에 법대 친구들이 어떤 길을 가고, 어떤 일을 하는지 신경쓸 겨를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어요. 학생운동 이력을 배경으로 정치를 하는 친구들은 대개가 상층운동, 인사운동을 했던 이들인데, 그들이 원망스럽다는 생각도 전혀 없었어요. 우리 사회는 그런 일을 하는 이들도 필요하거든요.”


말을 듣고 보니 그는 타고나길 인간에 대한 선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듯했다. 그런 그가 돌연 서른셋에 모교에 재입학하고 사법시험을 보게 된다. 그런 결정을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고 그때 그와 함께 노동운동을 했던 이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그때는 어느 정도 현장 활동을 정리한 상태였죠. 평택에서 노동상담소장을 하다가 그만뒀는데, 재산이랄 게 없었고 먹고 사는 게 막막했어요. 그래서 우유배달이랑 신문배달을 했어요. 그러던 중 생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에 돌아가서 시험공부를 하기로 한 거예요. 법조인이 되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정말 먹고 살기 위해 사시 공부를 한 거였죠. 아내가 바느질로 뒷바라지를 해줬어요. 하루 종일 바느질을 하면 그때 돈으로 70만 원 정도 벌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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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회철 대표는 필시 달가워하지 않을 테지만 나는 이 대목에서 숭고미까지 느꼈다. 내가 더욱이 감정이입이 되고 감동을 받은 것은 이처럼 곡진한 사연을 정 대표는 마치 남 이야기 하듯 (주관적 감상이나 과장 없이) 너무나도 무심하게 얘기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그가 불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고약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사법시험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국가 체제의 관리자를 양성하기 위한 제도인데, 그는 사시생들을 위해 강의를 하고 그들을 위한 교재와 수험서를 썼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 체제의 강화에 힘을 보태는 것으로 자기 신념에 위배되는 것은 아닌가라는. 그가 바로 반박했다.

“저는 헌법 관련 교재와 수험서를 주로 썼는데, 거기에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민주적인 가치관이라든가 세계관을 많이 넣었어요. 저는 그걸 가르친 거예요. 학생들은 형법이나 민법은 나중에 돈이 되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는데 헌법은 공부를 잘 안 해요. 그래서 제일 어렵게 느끼기도 하죠. 겉으로 봐서는 그게 잘 안 보이지만, 제 강의를 듣고 제가 쓴 수험서를 가지고 공부한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 (제 가치관의) 영향을 받았을 거예요.”

그는 지금은 그런 수험서들의 저작권마저 모두 양도했다고 했다. 개정판이 나오는 과정에서 자꾸 자신의 의도와는 다르게 내용이 바뀌기에 차라리 저작권 정리를 해버렸다고 한다. 그렇게 한 것에 미련도 없단다. 그러던 중 로스쿨 교수 자리에까지 갔다가 건강을 잃고 직을 내려놓은 후 홍천으로 내려가 요양을 하는데 거기서 전통주에 눈을 뜨게 된다. 술 익는 소리를 듣고는 행복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래서 취미로 하던 것을 일생의 사업으로 전환하게 된다.

지금은 강원도 춘천 김유정역 부근에 소재한 양조장 ‘예술’ 안 곳곳에는 깊고 향기로운 술 익는 냄새가 기분 좋게 미만해 있다. 정 대표는 다른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한국 술의 정체성을 찾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말한 적 있는데,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한국 술의 정체성을 뭐라고 생각하냐고. 이에 좀 관념적이면서도 이상적인 대답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외려 상당히 현실적이면서도 전문적인 답이 돌아왔다. 그의 눈빛이 돌연 생기로 빛났다.

“한국 술의 정체성은 간단히 얘기하면, 지난 2천년 동안 우리 조상들이 마신 술이 뭐냐는 데 있는데, 바로 누룩이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어요. 그런데 다들 전통주를 계승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술은 쌀과 누룩과 물로 이뤄지는데, 한국 술은 누룩으로 빚느냐 아니냐가 핵심이에요. 누룩이 바로 미생물인데 여기엔 자연균과 복합균이 있어요. 이게 사람이 인공적으로 조작해서 만드는 게 아니에요. 근데 우리에게 술을 배운 일본은 인공적으로 조작해서 배양한 미생물(백곡균)을 쓰고 있어요. 오히려 지금 대형양조장 등에서 우리가 만드는 술은 모두 일본식이에요. 누룩으로 만드는 게 좋은 한국 술이라는 걸 술 만드는 사람들은 다 아는데, 이게 상당히 어렵고 돈도 많이 드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포기하고 쉬운 길로 가는 거예요. 그들에겐 생존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런데 저는 10년 동안 누룩을 포기하지 않고 해오고 있어요. 국가가 이런 것에 관심을 갖고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그런 게 잘 안 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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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대표의 양조장에서 만든 술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무작(無作)’인데 이 이름 속에 그가 담고자 하는 한국 술의 정체성이 이미 충분히 표현되어 있다. 일부러, 인위적으로 만들지 않음이라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이렇게 어렵게 축적한 귀한 기술을 전수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 걸까. 혹시 두 아들에게 자신의 일궈온 일을 가업으로 물려주고 싶은 생각 같은 건 없을까.

“처음에는 그런 걸 남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양조학교 같은 것도 했는데, 이게 먹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어서 쉽지가 않더라구요. 사실 제가 만드는 술의 품질은 인정받고 있는데, 마케팅이나 영업 쪽에 능력이 없어서 지금 사업이 쉽지 않아요. 두 아들은 이 일을 할 생각은 없는 것 같아요. 큰애는 교사로 일하고 있고 둘째는 서울에서 바를 운영하면서 바텐더로 일하고 있어요.”

지금까지 타인으로부터 다양한 호칭을 들었을 그에게 그중 가장 듣기 불편했던 직함이 뭐였냐고 물으니 ‘변호사님’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자신이 변호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나는 그의 표정에서 언뜻언뜻 비치는 권태로운 자 특유의 텅빈 표정을 보았다고 느꼈다.

한국 사회는 사회적 위신과 체면을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는 사회다. 대부분의 사람이 타인으로부터의 시선이나 품평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정회철 대표에게 사회적 위신으로부터 당신은 자유로운지를 물었다. 그러자 예의 진솔한 답이 돌아왔다.

“사회적인 위신으로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을 존중받기만을 바라지 어떤 지위를 바란 적은 없습니다.”

자신이 소유한 것, 자신이 가진 재능이나 재화를 가지고 성취할 수 있는 것을 끝없이 의심하고 유예하는 것, 나는 그것이 우리 시대에 새롭게 권장될 수 있는 윤리라고 보는데, 정회철 대표의 삶이 바로 그런 징후적 케이스가 아닌가 싶었다. 성취를 유예하는 자는 권태로운 법이다. 그걸 시나브로 실천하고 있는 정 대표는 그래서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특유의 소탈하고 무심한 표정과 말투를 갖게 되었으리라. 숭고하되 자신만 그걸 모르는 이처럼.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 내 두 손에 정 대표는 떠맡기다시피 ‘예술’에서 빚은 술 두 병을 들려주었다. 집에 돌아와 맛을 보니 과연 입과 몸과 마음이 모두 그윽해지는 것이었다. 그예 세상에 대한 모든 욕망도 수심도 다 저물었음은 물론이다.


김도언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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