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나무 사이에 드문드문 삼나무가 섞인 숲의 덤불 속에서 한 사내가 죽었다. 일하러 가던 나무꾼이 시신을 발견했다. 승려는 말을 탄 남녀 한 쌍을 목격했는데, 사건 발생 직전의 장면이었다.살해된 자는 가나자와 다케히로라는 사람이었고, 말을 타고 함께 갔던 마사고는 그의 아내였다. 마사고 어머니의 증언으로 밝혀졌다. 포졸은 살인 용의자로 강도 전과의 다조마루를 체포했다.
다조마루가 자백을 했다. “내가 죽인 것은 사실이나, 여자는 해치지 않았다. 격투 끝에 사내를 해치우고 보니 여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마사고가 나타났다. “범인은 바로 저예요.” 다조마루가 남편을 속여 묶어 놓고 그 앞에서 자기를 겁탈했다. 수치심을 이기지 못한 마사고는 경멸의 눈초리로 쳐다보는 남편의 가슴에 칼을 찔러 넣었다고 고백했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 했던가. 무당의 입을 통해 가나자와의 진술이 이루어졌다. 아내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배신감을 느낀 나머지 떨어진 칼을 집어 스스로 자결했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사건을 두고 나무꾼, 승려, 포졸, 노파, 다조마루, 마사고 그리고 가나자와가 차례로 목격하거나 경험한 사실을 말했다. 저마다의 진술은 엇갈렸고, 사건을 둘러싼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심지어 죽은 자의 혼령까지 동원했으나 진실은 미궁 속에 갇히고 말았다.
재판에서나 현실 정치에서나 사실을 둘러싸고 혼란만
정치인이나 피의자나 자기가 바라보는 사실에만 의존
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사실에는 진실과 거짓의 여러 면이 섞여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으로 알려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 <덤불 속>의 줄거리다. 많은 사람들이 구로사와 아키라가 1950년에 만들어 다음 해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라쇼몽>으로 알고 있다. <라쇼몽> 역시 아쿠타가와가 <덤불 속>보다 5년 전인 1917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구로사와는 소설 <라쇼몽>의 무대를 기본틀로 삼고 <덤불 속> 스토리를 집어넣어 영화 <라쇼몽>을 탄생시켰다. 옳고 그름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와 진실은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을 교묘하게 뒤섞어, 일부 영화평론가들조차 동명의 <라쇼몽>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해설할 정도로 제목과 형식에 은유적 혼란을 심어 놓았다.
우리는 사실을 정확하게 확인하기만 한다면 그 진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상은 진실을 말한다. 사실에서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느냐를 따지기 전에,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일이 가능한가가 선결문제다.
필요할 때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고안한 현실의 기계 장치 하나가 폐쇄회로다. 화면에 나타나는 영상은 언제나 한 면만 보여준다. 정확도를 높이기 위해서 여러 개의 카메라를 설치한들, 여러 개의 단면이 나타날 뿐이다. 복수의 단면이 사각지대를 완전히 제거한다는 보장은 없다. 행위자의 말과 표정은 물론, 표시되지 않는 내심의 의도와 심리적 상태 역시 사실을 결정하는 요소다. 진실 판단 이전의 사실 확인은 경우에 따라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사태를 짐작한다. 소설이나 영화가 의미심장하게 일러주듯이, 사건에 직접 관여한 당사자조차 정확한 사실을 모를 수 있다. 사실은 과거의 것이므로 현재에 재현하는 일은 만들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무엇이 사실이냐는 문제가 수사와 재판을 둘러싼 혼란은 물론, 전쟁에 가까운 정치 싸움의 원인으로 작용하는 양상만 보더라도 뭔가 짚이는 것이 있다. 서로 상반된 주장만 일관하는 정치인이나 피의자들은 자기가 바라보는 사실만 믿고 의지할 뿐이다. 그런 사실은 마치 행위자로부터 분리된 행위처럼 보인다. 항상 정체를 분명히 드러내지 않는 ‘사실’이란 존재의 몹쓸 속성 때문에 국민과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하는 여야 정치인들만 곤욕을 치르는 것일까? 잘못이 있다면 모호하기 짝이 없는 무기질의 사실들일까?
차병직 변호사 (법무법인 한결·법률신문 공동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