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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진의 법과 사람 사이
‘다 지난 일’은 없다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
2023-02-20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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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할아버지를 우리 집에 오게 한다고? 싫어. 절대 안 돼!”

대학생 딸이 소리를 질렀다. 늘 무던하고, 자기 의견을 강하게 피력한 적이 거의 없던 딸이었는데. 남편은 딸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혼자되신 할아버지가 불쌍하지도 않아? 그게 손녀로서 할 소리야?”

아내는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는 걸 불안하게 듣고 있었다. 몇 달 전 시어머니가 갑작스런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고 혼자 남으신 팔순 시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와야겠다고 남편이 말을 꺼냈을 때 며느리로서 썩 내키진 않았지만 당연한 도리라 여겼기에 남편을 거들었다.

“방도 여유가 있잖아. 할아버지 오시면 엄마가 할 일이 많지, 너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방해받을 일도 없고…. (아빠한테) 잘못했다 그래.”

딸이 악을 쓰며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엄마는 모르잖아. 아빠도 아무것도 모르잖아. 내가 그동안 얼마나 참고 살았는지 다들 모르잖아.”

부부는 한때 프랜차이즈 가게를 운영하면서 미취학 나이의 딸을 시부모 댁에 3년간 맡겼다. 시부모가 전적으로 애를 봐준 덕분에 부부는 사업에 전념하면서 지금 살고 있는 이 번듯한 집을 마련했다. 사업 성공을 뿌듯하게 여기며 양육의 부담을 덜어준 부모에게 감사했던 그 시절에 그런 일이 있었으리라고는 부부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딸이 15년 만에 폭로한 비밀은 형사 사건이 되었고, 나는 가해자 할아버지의 국선변호인이 되었다. 팔순의 피고인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면서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이 늙은이를 감옥에서 죽게 하는 게 걔가 바라는 거야?”라며 손녀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드러내곤 했다. 아동·청소년에 대한 성범죄 공소시효는 피해를 당한 미성년자가 성년에 달한 날부터 진행되도록 법이 바뀌었다는 설명에는 “다 지난 일을 왜?”라고 화난 표정으로 반문했다.

 

어떤 범죄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피해자와 가족에게 ‘현재진행형’
그 두려운 진실을 가해자만 모른다


할아버지에겐 ‘다 지난 일’이 아들 부부의 삶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남편은 가해자의 아들과 피해자의 아버지 사이에서 방황했다. 그가 아는 아버지는 많이 배우진 않았지만 한평생 정직하고 성실히 사시며 삼남매 자식 교육을 위해 헌신한 분이었다. 아버지가 했다는 행동은 믿을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자꾸 늦어지다 원룸을 구해 집을 나갔다. “미안하다, 내가 가장 역할을 제대로 못 했어. 잠시 나가 살게.” 아내도 딸도 말리지 않았다.

엄마는 시아버지에 대한 배신감의 충격도 컸지만, 시간이 갈수록 딸이 그동안 자신에게 한 번도 그런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자신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걸 견딜 수 없었다. 사랑받고 자란 이는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신뢰하는 이에게 달려가 그 일을 이르기 마련이고, 대개 그 상대는 엄마다. 가족 내에서 성범죄가 발생할 때 피해가 장기화되고 그 일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는 건 대부분의 경우 딸을 보호해 줄 엄마가 엄마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닌가. 그런데 이 ‘멀쩡한’ 엄마를 둔 딸이 그 일을 꼭꼭 숨겨왔다니. 시어머니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일이 없었다면 어쩌면 한 평생 딸의 고통을 몰랐을 수도 있었다. ‘나는 대체 어떤 엄마였나’라는 회의감과 자책감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다.

어떤 범죄는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결코 ‘다 지난 일’이 될 수 없다. 십여 년 만에 외상후 스트레스장애 진단을 받고 치료를 받던 피해자는 오래전의 일을 왜 이제야 끄집어냈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저에겐 한 번도 과거에 끝난 일이 아니었어요.” 피해자에게만이 아니다.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아들네 부부는 ‘현재진행형’ 범죄의 또 다른 피해자들이다. 공소시효의 정지와 상관없이, 법의 심판에 따른 처벌 기간이 끝나더라도, 가족이라는 관계에 엉겨 붙은 고통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그 두려운 진실을 가해자만 모른다.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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