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디즈니플러스 드라마 ‘카지노’ 시즌 1에서 차무식(최민식)과 서태석(허성태)은 앙숙이다. 필리핀 호텔 카지노를 운영하는 민 회장의 오른팔과 왼팔로 서로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차무식이 “언제까지 필리핀에 있을 거냐”고 묻자 서태석이 으르렁거린다.
“아니, 남이사 있든 말든 뭔 상관인데, 응? 내가 여기 있는 게 그렇게 X 같아요?” “너는 이 전구 다마처럼 언제든 빼서 갈아 끼울 수 있는 존재야.”
현실세계에서는 이렇게 거칠게 막 나가진 않는다. 상대를 향한 악의가 감춰져 있는 만큼 더 음험하고 무시무시하다. 오죽하면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2년 5개월간의 청와대 생활을 마치며 이렇게 토로했을까. “남자의 질투는 여자의 질투보다 무섭더라. 남자는 칼로 찌른다.”(2010년 7월 조선일보 인터뷰)
공직사회는 인사철, 정치권은 공천 시즌이 되면 마타도어가 횡행한다. “우리끼리 얘긴데 혹시 이런 소문 들어봤어요?” 가끔은 바람결을 타고 기사화돼 유력 후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이런 남자들의 암투를 보노라면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처럼 웃기는 말도 없는 듯하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고?
전근대적 남성 문화 속
여성들이 승리하는 방식
JTBC 드라마 ‘대행사’가 묻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재벌그룹의 광고 대행사를 배경으로 한 이 드라마에 내장된 프로그램은 전근대적인 남성 문화다.
“시키는 거나 똑바로 하고, 주는 돈이나 받으면서 남들보다 좀 더 거들먹거리면서 살면 되지. 왜 기어올라 오실까?”
재벌 3세인 회장 아들은 오로지 돈과 권력으로 찍어 누른다. 남성, 명문대, 공채 출신이란 ‘승진의 3대 키워드’를 앞세운 최 상무(조성하)는 회장 아들을 동아줄 삼아 출세의 비탈길을 기어오르려 한다. 남성 임원들의 경쟁 수법은 명확하다. 연줄과 자리, 이권의 뒷거래로 연대하다 수틀리면 망설임 없이 등을 돌린다.
유리천정을 깨고 '그룹 최초의 여성 임원'이 된 고아인(이보영)이 회장 딸 강한나(손나은)와 연대하는 방식은 다르다. 고아인이 코너에 몰리자 강한나가 찾아와 “나를 이용하세요”라고 제의한다. “그럼, 콜?” 강한나가 악수를 청하자 고아인은 자신과 강한나의 손에 세정제를 뿌린다. “이왕 시작하는 거 깔끔하게 하시죠.”
오해 말기 바란다. 여성이 특별히 숭고하거나 순수한 건 아니라는 것, 나도 안다. 여성을 베아뜨리체나 소냐로 이상화하는 것 자체가 성차별이란 이름의 유리벽에 가두는 짓이다.
고아인이 남성 권력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은 지극히 합리적인 판단이다. 남성들의 방식으로 싸워선 승산이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강자에게 딸랑거리며 경쟁자 뒤통수나 치는 ‘최 상무’들의 본능을 따라잡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그런데 이런 판단이 남성들에겐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할 일은 여자들에게도 남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아직도 여성이 욕망을 드러내면 죄의식을 강요한다. “고아인, 왜 이렇게 욕심이 많아!” 그러나 인류사의 차원에서 여성들의 욕망은 남성들의 욕망보다 한걸음 진화한 가치다. “여적여”는 여성을 소수의 ‘T.O.’ 안에 몰아넣고 경쟁시킬 때나 쓰는 구닥다리 프레임일 뿐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성을 쉽게 보고 까불다간 뼈도 못 추린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노력해서 거둔 성과를 얼굴마담용 ‘1년짜리 임원’으로 기만했음을 알게 된 고아인은 차갑게 분노한다. ‘대행사’는 제대로 보여준다. ‘전략적으로 생각하고 미친년처럼 행동한다’(2회 제목)는 게 무슨 의미인지.
권석천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전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