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사가 직원들 관사 제공을 위해 마련한 아파트의 임대차계약이 종료하고 직원들도 퇴거하였는데, 임대인은 이런저런 핑계로 2년간 임차보증금을 반환하지 아니하였다. 이에 회사는 법원으로부터 임차보증금반환 지급명령을 받았으나, 이의신청으로 정식재판 절차가 진행되었다. 재판부는 변론을 열기 전에 조정에 회부하였다. 임대차계약이 종료하고 직원들은 이미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기 때문에 임대인이 보증금을 반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였다. 그럼에도 임대인은 오랫동안 보증금을 반환하지 않고 있어 회사는 조정 불성립으로 조정절차를 종료하고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하여 확정판결을 받은 다음 강제집행을 하기로 입장을 정리하였기 때문에 소송대리인으로서 긴장감을 가지고 법원 조정센터로 향하였다.
그런데 센터에 들어서자마자 법정 앞의 분위기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법정 앞에서 볼 수 있는 격한 모습이나 고성은 없었다. 당사자로 보이는 사람들에게서 편안하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팽팽한 대립각 같은 예리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조정실에 들어서자 조정위원은 사건의 개요 및 쟁점을 요약한 다음 각 당사자의 입장을 경청하였다. 임대인은 변호사 없이 배우자와 함께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였는데, 회사로부터 들었던 내용과 다른 부분이 있어 이를 강하게 반박하였다. 그러나 상대방 설명을 차분히 들어보니 상호 간에 다소 오해도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 서로 마주 보며 서로 대화를 하는 중에 ‘임대인의 주장을 법정에서 들었으면 어땠을까, 바로 공격적으로 다투는 것부터 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법률 및 법리상 조정의 여지가 없던 사건을
조정위원 원숙한 조정으로 원만하게 합의
분쟁서 모두 만족할 수 있는 판결 드물지만
스스로 결정한 조정, 억울함은 덜할 수 있어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 법정이면 드문 광경
이런 상념 중에 임대인이 관리비와 수리비를 초과하는 감액을 조건으로 보증금반환을 하겠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어이가 없기도 하였다. 회사는 임대차계약 종료시점부터 발생한 이자를 추가하여야 하지 않나 고민하는데, 임대인은 오히려 상당한 감액을 요구하니 조정위원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회사가 이를 수용하더라도 임대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회사는 감액만 해주고 분쟁은 계속될 수 있었다. 조정위원은 고민하다가 회사가 임대인의 요구를 수용해주는 대신, 불이행 시 위약벌 조항을 추가하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였다. 다음 기일에 최종 결정을 하기로 하고 조정실을 나오는데, 임대인이 붙잡더니 자신의 입장을 하소연하였다. 이 또한 법정이라면 보기 드문 광경일 것이다.
회사에 기일보고를 하고 임대인의 제안을 전달하였다. 그러면서 회사가 알려준 내용과 다른 ‘임대인의 주장’을 확인해 보고 경영판단에 고려해보시라고 조언하였다. 회사 입장에서는 억울한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진지한 논의가 있었으나, 회사는 제반사정을 종합하여 조정위원의 수정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조정위원은 회사의 통 큰 배려를 환영하였고 판사님도 각 당사자에게 오해가 없도록 친절한 설명을 해주셨다.
법률 및 법리상 너무나 명백하여 조정의 여지가 없어 보였던 사건이 판사의 적절한 조정회부와 조정위원의 원숙한 조정 진행을 통해 원만하게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보면서 한편의 오케스트라 합주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조정실을 나오는데, 임대인이 다시 붙잡으며 그간 마음속에 담았던 말을 하였다. 솔직히 곧이곧대로 납득되지는 않았지만 조정센터를 나서는 임대인 부부를 보면서 편안한 마음이 든 것은 판결과 또 다른 결론에 이른 것 때문이 아닐까?
분쟁에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판결이라는 것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뭔가 아쉬움이 남더라도 스스로 결정한 조정이라면 가슴 속에 한 맺힌 억울함은 남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조정실의 풍경은 법정의 그것과 다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조정욱 대표변호사 (법무법인 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