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며2020. 04. 21.,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국가배상 소송이 제기되었다. 그로부터 약 2년 10개월이 지난 2023. 2. 7. 청구액인 30,000,100원을 전부 인용하는 판결이 선고되었다. 소장이 제출된 것은 2020. 4. 21. 이지만, 이 사건의 소송의 시작은 가장 중요한 증거인 주월미군감찰보고서가 작성된 1969년부터인지도 모른다. 아래에서는 이 사건의 담당 변호사의 한 사람으로서, 이러한 과정과 함께 이 판결의 의미를 짚어 보고자 한다.
2. 사실관계원고는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인으로 1960년 베트남 꽝남성 디엔반현 탄퐁사 퐁니촌에서 태어나 사건이 발생한 1968. 2. 12.까지 그 곳에서 가족[어머니, 오빠(1953년생), 언니(1957년생), 남동생(1963년생), 이모, 이모 아들(생후 10개월)]과 함께 살고 있었다. 해병 제2여단 제1대대 제1중대(이하 ‘이 사건 1중대’라 함) 소속 군인들은 1968. 2. 12. 퐁니 마을에 진입하여 비무장 민간인들에게 총격을 가하였고, 이로 인해 70명 이상이 사망하고 20여명이 상해를 입었다(이하 '퐁니 사건'이라 함). 원고의 가족은 원고와 오빠를 제외하고는 모두 사망하였으며, 원고와 오빠는 총상을 입고 오랜 기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3. 2020년, 소장이 제출되기까지의 과정
가. 1969년 - 주월미군감찰보고서군대에 의한 민간인 학살 사건은 피해자들에게는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사건이지만, 사건 발생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쉽지 않다. 법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을 정도로 사회가 성숙되었을 때는 이미 사건 발생일로부터 상당한 시간이 지났을 가능성이 높고, 전쟁 중에 발생한 사건이기 때문에 증거를 확보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사건 직후 미군이 조사를 실시하여 작성된 주월미군감찰보고서가 있었다.
1969. 11.경 미국에서는‘미라이 학살 사건’이 보도되면서 반전여론과 함께 민간인 학살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었다. 그러자 비밀리에 파월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도 조사를 실시하여 보고서를 작성하였는데, 조사 대상이 된 3건의 사건 중 하나가 이 사건이었다. 해당 보고서에는 사건을 목격하고 피해자들을 구조한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원들의 진술, 생존자들의 진술, 미군 병사가 찍은 피해 사진들이 설명과 함께 첨부되어 있었다. 이 보고서는 2000년 미국에서 기밀해제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에 모 주간지에 보도되었다.
나. 2000년부터 - 모 주간지 기자의 취재2000년에 주월미군감찰보고서를 보도한 모 주간지 기자는 해당 보고서를 바탕으로 베트남에 가서 피해자, 목격자들을 만나고, 이 사건 1중대의 소대장들을 비롯한 부대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였다. 피해자와 목격자 들은 한국군이 가해자라고 했고, 중대원들은 자신의 부대의 일부 소대원이 한 일로 기억하고 있었다. 취재를 위해 해당 기자는 15회 이상 베트남을 방문하였으며, 50여 차례 이상 기사를 썼다. 이 사건 소송에는 해당 기자가 작성한 인터뷰 기사와 자료, 기억들이 사건의 진행에 중요한 증거나 단서가 되어 주었다.
다. 2018년 -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사건은 2018. 4. 21.부터 같은 달 22.까지 시민단체와 변호사들의 주도 하에 당시까지 모아진 자료를 바탕으로 ‘베트남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을 개최하였다. 당시 김영란 전 대법관이 재판부의 일원으로 참석하였다.
시민평화법정을 준비하면서 대리인단은 베트남에 직접 방문하여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을 만나 진술을 청취하고, 주월미군감찰보고서를 번역하고 분석하는 등 준비작업을 하였으며, 시민평화법정이 끝난 후에는 증인으로 출석하거나 영상으로 증언한 피해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을 번역하는 작업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았으며, 해당 자료들은 이 사건 소송의 증거로 제출되기도 하고, 기초자료로도 활용되었다.
4. 법원의 판단위와 같은 긴 시간과 과정을 거쳐 2020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장이 제출되었다.
피고는 ①한·월 군사실무 약정서, 한·미 군사실무 약정서에 따라 정부 간 협의 절차를 거쳐야 함에도 바로 소제기를 한 것은 부적법하다는 주장, ②준거법은 대한민국의 국가배상법이 아닌 남베트남 법률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③가해자가 북베트남군, 베트콩 또는 북한군일 가능성을 배제 할 수 없어 가해자를 한국군으로 특정할 수 없다는 주장, ④한국군에 의하여 발생한 사건이라 하더라도, 원고를 비롯한 퐁니 마을 주민들을 베트콩이나 그 동조세력으로 오인할 만한 정당한 사정이 있는 상황에서 교전 중 발생한 전투행위이거나 사고로서 정당행위라는 주장, ⑤손해배상 청구권이 인정된다고 하더라도 소멸시효가 완성되었다는 등 다양한 주장을 하였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위와 같은 피고 항변의 당부를 일일이 판단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이유로 판결문은 43쪽에 이른다.
대부분은 법리적인 주장이었고, 사실관계와 관련한 주장은 ③, ④번이었다.
우선, 피고는 퐁니 사건이 국군복장을 한 베트콩이나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주장하였다. 당시 생존자들, 사건을 목격한 미군과 남베트남 민병대, 이 사건 1중대의 소대장들 및 소대원 등이 모두 대한민국 군인이 마을 주민들을 사살하였다고 공통적으로 진술하고 있었다. 이에 법원은 이를 바탕으로 대한민국 군인이 퐁니 사건에 관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보았다.
또한, 피고는 원고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베트콩 내지 그 동조 세력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이에 적과의 교전 중 발생한 전투행위나 사고로서 정당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법원은 “전쟁 중이어도 적대 행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였다거나 참여한 것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는 상태에서 적대행위를 한 사람과 이를 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하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살상하는 것이 허용된다고 볼 수 없다. 이는 당시 베트콩이 군복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전투행위에 참여한 경우가 있었다고 하여 정당화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보았다. 이에 한국군이 마을을 수색하면서 적을 색출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볼 만한 사정이 없었으며, 미군 병사가 촬영한 사진을 보면 사망자들이 가까운 거리에서 총에 맞았거나 총검에 찔렸고, 십여 명의 주민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총으로 사살하고 수류탄을 던지는 것이 목격되었고, 실제로 집단적으로 살해당한 주민들의 시체 더미가 발견되었다는 점 등을 근거로 교전 중에 발생한 사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5. 이 사건 판결의 의미이 사건은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의 공무수행 중 민간인 학살을 인정하여 국가배상을 인용한 최초의 사건이다. 우리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이라는 아픈 역사를 겪었고, 이 과정에서 반인륜적 인권침해의 피해자가 되어 왔다. 이에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사건, 일본군 위안부 사건,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 사건 등의 많은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판결이 축척되어 있고, 이와 관련한 국민적 공감대도 형성되어 있다. 반면, 일본은 현재까지도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사건에 대해서 사과하지 않고 있다. 우리 법원은 베트남전 당시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최초의 사건에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원고의 청구를 모두 인용하는 판결을 하였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스스로 피해자였던 인권 침해 사건을 겪으면서, 이에 대한 인권감수성과 법리가 충분히 축척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위 사건에서 피고의 항변을 기각한 대부분의 법리는 이러한 사건들에서 확립된 것들이었다.
대리인단은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이냐에 따라서 결론이 달라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즉, 이 사건과 우리가 피해자였던 인권침해 사건을 다르게 취급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고, 법원도 동일한 시각으로 이 사건을 검토해주기를 희망했다. 그래서 마지막 변론기일에 2차 세계대전의 전범 국가인 일본과 독일의 종전 후 태도 차이를 언급하면서, 국가의 과오와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묻는 것으로 변론을 마무리하였다. 이에 대해 법원은 우리는 일본과 다른 길을 가겠다고 대답해주었다.
김선영 변호사(법무법인 시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