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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종의 전 장관 회고록 '밤나무 검사 자화상'을 읽고] 내가 알고 있는 고(故) 김인규(金麟圭) 지청장님
남문우 전 홍성지청장
2023-03-05 0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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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 검찰에서 대검 차장검사를 마치고 법제처장을 역임한 송종의 장관으로부터 받은 그의 공직 회고록인 『밤나무 검사의 자화상』을 읽었다. 송 장관이 대구지방검찰청 초임 검사 시절 겪었던 일화를 읽고, 내가 검찰 재직 중 두 번이나 상사로 모셨던 고(故) 김인규 지청장님의 생전 모습이 생생히 떠오른다. 송 장관이 초임 검사 시절 모셨다는 대구지검 차장검사님이 바로 고(故) 김인규 씨이기 때문이다.

그 당시 대구지방검찰청 차장검사는 소위 좋아하는 검사와 싫어하는 검사를 제3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하게 구분하여 대한다는 이야기를 다른 청에 근무하던 나도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분은 당시 송종의 검사, 최영광 검사 등 몇몇 검사들을 좋아했으나, 나도 이름을 알고 있는 더 많은 검사가 미움을 받았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또한 그 차장검사의 소위 ‘문어발 부전지’는 너무도 유명하여 다른 청에 근무하는 전국 검사들도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1969년 6월경 내가 서울지검에 근무하다가 부산지검으로 발령 나서 부산지검에 근무할 때, 김인규 차장검사가 고향인 부산지검 차장검사로 전근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모든 평검사들이 제발 오지 말라고 빌 정도로 무섭고 까다롭다는 소문이 나서 나도 두려워했으나 그분이 부산 차장검사가 아닌 서울지검 부장검사로 전근 가는 바람에 모두 안도한 일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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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당시의 서울지검 의정부지청 모습. 
 <사진제공=대검찰청>

 

그분은 내가 1973년도에 서울지검에 근무할 때 부장검사였고, 1975년 9월에 의정부지청(당시)에서 지청장으로 모시게 되었다. 정작 상사로 모셔보니 무섭고 까다롭다는 소문과는 달리, 누구 보다도 법리에 밝고 열정적이며 소신있고 사명감이 뚜렷하여 검사들이 배워야 할 점이 많은 분이었다. 자상하고 친절하게 부하를 아끼는 상사라는 사실도 체험을 통해서 직접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분 살아 계실 때, 그분은 아는 것도 많고 검사다운 훌륭한 검사라는 점을 동료나 후배들에게 일깨워준 일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그분한테 미움을 받았다는 분들이 대부분이 돌아가시고, 그분도 이미 이 세상 분이 아니어서 구태어 옛 이야기를 들추어내는 것이 별 의미는 없고, 괜스리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 고인의 명예에 흠이 갈까 두렵지만 아직도 그분에 대한 오해를 하고 계신 분이 한 분이라도 남아 있다면 생각을 바꿔드리려는 의미에서 용기를 내어 그분의 실명을 밝히면서 이 글을 쓴다.

1973년 1월경 나는 서울지검에 발령받아 형사1부에 배속되었다. 그때 부장님이 그 유명한 김인규 부장님이셨다. 처음에 나는 이제부터 부장님 밑에서 고생 좀 하겠구나 생각하며 긴장 속에서 나날을 보냈다.

지금은 경찰이 수사독립권을 주장하며 검찰의 지휘를 받지 않으려고 야단이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수사 주체는 엄연히 검사이고, 경찰은 검사의 지휘를 받는 보조 기관에 불과했으므로 모든 형사사건은 검사의 지휘를 받아 처리했다. 따라서 경찰에서 작성하는 사건기록이 부실한 점이 많아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형사사건을 송치하기 전에 미리 기록을 검사에게 보내 송치해도 좋다는 검사의 결재를 받은 후에 송치하도록 수사지휘 제도가 생겼다.

모든 형사사건 기록이 검사에게 올라와 검사가 기록을 검토하여 수사 미비점이나 보완할 점을 지적하여 다시 경찰에 보내 이를 보완시켜 송치케 하고 있었다. 그러니 당시 수사검사는 자기에게 배당된 사건을 처리하랴, 수사지휘 받으러 온 기록을 검토하랴, 업무가 배로 늘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당시 다른 형사부 검사들은 부장 결재가 까다롭지 않아 검사가 수사지휘 기록을 대충 검토하고 결재를 올리면 그대로 통과되었으나 우리 부에서는 부장실에 결재를 올리면 예외 없이 소위 문어발식으로 부전지가 달려 내려와 검사실마다 경찰에서 올라온 수사지휘 사건기록이 캐비넷에 꽉 차서 다른 수사기록을 넣을 자리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 후에 부장님이 마련한 회식 자리에서 부장님은 예상과는 달리 우리를 편하게 대해주시면서 그동안 많은 업무를 처리하느라고 수고 많았으나 오늘은 모든 것을 다 잊고 즐겁게 마시고,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어려워 말고 무슨 이야기든지 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두려워서 망설이다가 술김에 용기를 내어 내 생각을 털어놓았다.

“소문대로 저의들은 문어발에 칭칭 감겨 아무 일도 못 하고 죽겠습니다. 제발 좀 적당히 봐주십시오”하고 애걸 겸 하소연했다. 뜻밖에도 부장님은 화를 내기는커녕 웃으면서 “여러분이 바쁜 거 나도 잘 압니다. 나는 별로 할 일이 없어 도와줄 터이니 경찰에서 올라온 수사지휘 사건기록을 나에게 보내시오. 내가 검토하여 돌려줄 터이니, 여러분 이름으로 지휘하여 경찰에 내려보내면 됩니다.”고 말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느 검사가 부장님이 술좌석에서 하신 말씀을 듣고 검토 안 한 기록을 부장님께 드리겠는가?

아무도 기록을 안 보내자, 그다음 날 오후에 부장님이 직접 검사실에 오셔서 “왜 검토할 기록을 보내라고 했는데 아무도 안 보내느냐? 내가 가지고 갈 테니 기록을 주시오”라고 말씀하셔서 “부장님이 말씀하셨어도 어떻게 직접 검토해주시라고 하겠습니까? 빨리 검토하여 결재 올릴 터이니 그대로 가십시요” 하고 말씀드려도 듣지 않고 기록을 가지고 가시려고 해서 할 수 없이 기록을 부장실에 갖다 드리고 말았다. 그다음 날부터 아닌게 아니라 한 기록에 부전지가 주렁주렁 매달려서 부장님께서 검토하신 기록이 내려와서 우리 검사들은 도장만 찍어서 경찰에 내려 보낼 수 있었다.

1985년 9월경 내가 의정부지청으로 전보 발령을 받고 부임해보니, 그분이 지청장으로 계셔서 두 번째 모시게 되었다. 서울지검에서 모시면서 그분의 성품을 대충 알게 되었기 때문에 두 번째 만날 때는 편한 마음으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인사드리자마자 "영감 집이 어디요?" 묻기에 "서울 마포구 망원동입니다"고 대답했더니 “영감! 나도 서울이지만 여기서 하숙하고 있고, 다른 검사들도 모두 서울에 집이 있지만 여기서 하숙하고 있으니 같이 하숙합시다.”고 강권하다시피 말씀하는 것이 아닌가?

사실 나는 1년간 혼자 객지 생활을 했기 때문에 집에서 다니려고 마음먹고 있었으나 지청장의 강권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청 근처에 방을 얻어 다른 검사와 같이 자취를 하게 되었다 지청장님은 근무시간에는 여전히 부전지를 달면서 엄격하게 검사들을 지도했지만, 퇴근 시간에는 딴사람이 되어 각방에 다니면서 “영감들! 나갑시다”고 함께 퇴근하여 같이 저녁을 먹고 담소하다가 헤어지곤 하였다.

하루는 나에게 “영감! 마작을 할 줄 아쇼?”하시기에 “예 조금 할 줄 압니다”라고 대답했더니 “그러면 오늘부터 나에게 마작을 좀 가르쳐 주시요”해서 그날부터 매일 저녁만 먹으면 모든 검사들과 같이 마작을 했다. 검사들 중 두 사람 빼고 모두 마작을 처음 배우게 되어 마작 족보(규칙)를 만들어 가르쳐 가면서 마작을 했다. 물론 검사들끼리 오락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판돈은 최소로 정하여 내가 따면 반만 받고, 잃으면 전액을 주고 그만하고 일어날 때, 내가 딴 돈이 있으면 잃은 사람에게 돌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마작을 가르치면서도 항상 돈을 잃는 결과가 되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퇴근 시간에 각방에 오셔서 “오늘 서울 가는데, 집에 갈 사람은 같이 갑시다”라고 말씀하시어 덕분에 지청장님 차 타고 집에 다녀올 수도 있었다.

내가 경험한 바로는 지청장님은 항상 다정하고 친절하며 부하를 아껴주는 그런 분이셨다. 또 그분이 부전지를 달아 지적해주시는 내용을 살펴보면 모두 올바른 지적이라고 수긍하게 되었고, 미처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 많아 공감하고 많은 것을 배워서 오히려 잘 가르쳐주셨다고 고마워할망정, 불평하거나 불만을 표한 일이 전혀 없다. 그리고 결재 올릴 때마다 부전지를 안 받으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실력도 향상되어 점차 부전지가 안 달리게 되어 기뻐하곤 했다.

후일 내가 결재권자가 되었을 때, 그분한테 배운 것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밝힌다. 또한 그분한테 많은 부전지를 받고 그분을 욕하거나 불만을 표출하는 사람을 나도 만난 사실이 있다. 처음에는 불평한 사람의 말이 옳다고 느꼈으나 그분을 두 번 모셔본 후로는 불평불만을 표출한 사람이 오해하였거나, 너무 이기적인 판단을 한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분은 검사장에 승진되기를 바라고 많이 노력하는 것 같았으나 가망이 없어 보이자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지고 고향인 부산에 귀향하여 변호사로 개업했다.

개업한 지 몇 달 후에 그분으로부터 장문의 편지를 받고 감격스러워 한 일도 있다. 편지지 10여 장에 부전지에 썼던 것 같은 명필의 예쁜 정자체(한문은 해서 또는 행서)로 쓴 편지 내용은 대부분 잊어버려 기억에 없으나 “영감이 마작을 친절하게 잘 가르쳐주어 이곳에서 변호사 하면서 잘 써먹고 있어 감사하다”는 구절은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김인규 지청장님! 청장님은 누가 뭐라 해도 내가 존경하고 인정하는 검사 중의 명검사였습니다. 훌륭한 가르침을 지금까지 새기고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디 편안히 영면하소서!


남문우 전 홍성지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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