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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법조인대관
정혜진의 법과 사람 사이
왜 부끄러움은 법의 수범자 몫인가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
2023-03-13 0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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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송무변호사인 내게 법은 대체로 추상이 먼저고 구체가 나중이다. 법(추상)은 원래 ‘주어져’ 있는 것이어서 A 사건(구체)에 이 법을 적용하는 게 맞는지, B의 경우에 법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있는지 정도 따위를 고민한다. 추상에서 시작해 구체로 가는 이 사고방식에서는 ‘주어진’ 추상적 법규가 그 자체로 권위를 가지므로 그 내용의 타당성에 의심을 품기 어렵다.

그런데 ‘주어진’ 추상은 언제 어떻게 ‘주어진’ 걸까. 이 질문을 품게 된 건, 사람 이름을 딴 법에 대한 책을 쓰면서였다(졸저 『이름이 법이 될 때』). 어떤 사건이 계기가 되어 법이 개정되거나 만들어지는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구체가 먼저고 추상이 다음이 되는, 기존 사고방식과는 정반대의 방식이 새삼 새롭게 다가왔다. 이 경우에는 ‘주어진’ 게 없다. 기준은 만들기 나름이니 추상의 권위에 짓눌릴 필요가 없었다. 대신, 추상에서 구체로 오는 기존 방식에는 없는 다른 종류의 위험이 있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게 적용되어야 하는데, 구체적인 사건에서 시작하다 보니 보편적인 기준보다는 그 해당 사건에 대한 해결책을 기준으로 세우려는 위험이다. 그 위험에서 벗어나려면 입법의 계기가 된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사례에서 본질만을 뽑고 또 뽑는 숙성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숙성 과정을 건너뛰고 추상을 다듬지 못하면 법을 만드는 계기가 된 그 사건에는 딱 들어맞지만, 그 법으로 규율해야 할 다양한 사건에서 추상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수 있으니 말이다.

지난 달 23일 주거침입강제추행 위헌 결정…
숙성되지 않은 부실 추상의 초라한 종국 보여줘
재심에 드는 수고와 비용을 국회가 알기나 할까


지난 달 23일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주거침입강제추행 위헌 결정은 숙성되지 않은 부실 추상의 초라한 종국을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문제의 조항은 2020. 5. 19. 개정 시행되었고, 이번 결정에는 2021헌가9 등 25개의 위헌법률심판사건과 2021헌바171 등 총 7개의 헌법소원 심판사건이 병합되었다. 사건번호를 보면 법 시행 직후부터 위헌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했음을, ‘헌가’ 사건 수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점에서 추상이 세상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 권위가 흔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별개의견이 입법과정상 중대한 오류가 있었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2020년 4월 말, 20대 국회는 텔레그램을 이용한 성 착취 사건에 대한 국민적 공분이 고조된 상황에서 성폭력 범죄의 법정형을 전반적으로 올렸는데 심판대상조항도 그 결과물 중 하나다. 사이버 성범죄라는 구체적 사건이 성폭력 범죄 법정형 상향이라는 추상을 만들어 낸 건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지만, 숙성 과정 없이 구체에서 추상으로 성급하게 내달려 나간 ‘중대한 오류’의 산물은 법의 권위를 믿고 따라온 대부분의 수범자들에게 허탈감을 안겼다.

위헌의 의심을 품은 당사자와 변호인, 재판부도 많았지만 그보다 훨씬, 절대적으로 더 많은 수의 당사자와 변호인, 재판부는 ‘주어진’ 법을 기본값이자 신뢰의 대상으로 대하고 그 범위 내에서 변론을 하고 판단을 했다. 고백건대 나도 그중 한 명이다. 구체에서 추상으로 나아가는 사례를 보며 법이 ‘주어진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닫기도 했지만, 법을 적용하는 일상에서는 추상의 확고한 지위에 쉽게 의심을 품기 어려웠다. 위헌의 의심을 하지 못한 부실 변론의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묻는다. 왜 부끄러움은 법의 수범자 몫인가.

분주히 재심을 준비할 변호인 개개인이 느끼는 부끄러움 정도라도 입법자들이 부끄러워할까. 입법자들은 부실 추상에 대해 그 흔한 ‘유감’이나 ‘대국민 사과’라도 한 적이 있던가. 위헌을 감별하지 못한 법조인들의 자책과 당사자들의 허탈함, 재심 재판에 드는 수고와 비용을 국회는 대체 알기라도 할까. 내가 맡았던 주거침입 강제추행 사건 외국인 피고인에게, 미처 위헌 생각을 하지 못한 점에 대해 사과하며 재심청구서 쓰는 양식과 제출하는 방법을 자세히 안내한 편지를 써 그가 있는 수감기관으로 등기우편을 보내며, 다시 묻는다. 왜 부끄러움은 법의 권위를 신뢰하고 존중한 수범자만의 몫이냐고.


정혜진 (수원고법 국선전담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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