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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의 신(新)과 함께] 법이 그렇습니다 (1)
정거장 검사(서울중앙지검·《슬기로운 검사생활》저자)
2023-03-23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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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마다 다채로운 해산물이 시장을 가득 채우는 작은 어촌. 일곱 평 남짓한 법률구조공단 사무실에 앉아 한껏 여유를 만끽하던 날이었다. 오늘로 냉동고가 고장 나는 바람에 꽃게가 전부 상했다며 냉동고 업자와 소송을 벌였던 김 이장님 사건도 마무리되었고, 내일 있을 ‘어르신을 위한 생활법률’ 강연 준비도 완벽했다. 공익법무관을 마치면 무슨 일을 할지 진득하게 계획을 그려봐야지 싶어 공책을 펼친 그 순간.

어깨에 생수통을 짊어진 청년이 열려 있는 문틈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청년은 쭈뼛쭈뼛 내 앞으로 다가왔다. 얼룩덜룩한 작업복이 신경 쓰이는지 연신 손으로 먼지를 털어냈다. “변호사님 뵈러 오는데 옷이 이 꼴이어서 죄송해요.” 매주 사무실에 생수를 배달해 주는 청년이었던 터라 반갑게 인사를 하며 자리에 앉기를 권했다. 대체 무슨 일 때문일까, 음주운전을 한 걸까?

청년의 어머니는 청년이 어렸을 적에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몇 해 뒤 새어머니와 재혼해 동생을 낳았다. 동생이 걸음마를 뗄 무렵 아버지는 일을 하다가 손목이 잘리는 사고를 당했다. 그 뒤로 아버지는 도통 마음을 잡지 못했다. 종일 술만 들이켜다 잠들기 일쑤였다. 새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족을 지켰다. 새벽 버스를 타고 장에 나가 직접 캔 산나물과 버섯을 팔았다. 그날도 새어머니는 장에 나가다 어둑한 시골길을 달리던 농기계에 변을 당하고 말았다.

공익법무관 시절 만났던 생수배달 청년
배다른 중학생 동생과 사는 그에게
어떤 사연이 숨어 있던 걸까


청년은 도망치고 싶었다. 주정뱅이 아버지와 배다른 동생에 발목 잡히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 날, 동생이 청년의 옷자락만 붙잡고 있더란다. 청년은 새카만 두 개의 눈동자를 외면할 수 없었다. 어렸을 적 어머니를 여의는 아픔을 뼈저리게 알고 있던 탓이었다. 낮에는 생수를 나르고, 밤에는 설거지를 하면서 동생을 키웠다. 띄엄띄엄 글씨를 읽던 동생은 무럭무럭 자라 중학생이 되었다.

어느 날 동생 앞으로 우편물이 왔다. ‘보내는 사람 OO캐피탈’. 허겁지겁 우편물을 뜯었다. 동생에게 1000만 원 빚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녀석이 게임에 빠져 있더니 드디어 사고를 쳤구나!’ 청년은 한 손에 회초리를 들고 학교에서 돌아온 동생을 다그쳤다. 동생은 뚝뚝 눈물을 흘렸다. 친구들이 자랑하는 아이템을 가지고 싶어 형 몰래 휴대전화 소액결제를 한 적은 있지만 그렇게 큰돈을 빌린 적은 없다고 했다.

물어볼 곳이 마땅치 않았다. 서울에서 대학 나온 옆집 둘째 아들에게 물어도 대답이 시원찮았다. 여기저기 발품을 팔고, 전화를 돌렸다. 이게 웬걸. 새어머니에게 빚이 있었다. 여린 몸으로 가족을 지켜내기가 버거울 때마다 한 푼 두 푼 돈을 빌리고, 꼬박꼬박 이자를 갚으셨단다. 새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빚은 고스란히 아버지와 동생에게 상속되었다. 배다른 자식인 청년만 피해 갔다.

캐피탈 회사에 사정을 해도 찬바람만 불었다. 아버지가 상속을 포기하지도, 이름도 생소한 ‘한정승인’을 하지도 않았으니 동생이 1000만 원을 갚아야 한다고 했다. 청년이 하루에 4시간씩 자며 한 달을 꼬박 일해 손에 쥐는 돈은 300만 원 남짓. 공과금, 통신비, 생활비를 쓰고 나면 겨우 적자나 면하는 생활이었다. 잠을 더 줄여 아르바이트를 늘린다고 해도 지금 당장 1000만 원을 갚을 순 없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모른 체 하겠는가. 등짝에 빚을 짊어지고 사회로 뛰어들면 동생의 앞날이 어찌 될지, 불 보듯 뻔하잖은가.

친구들은 큰 도시로 나가 변호사를 알아보라고 했다. 인터넷을 열심히 뒤졌다. 수십 명의 변호사가 컴퓨터 화면을 메웠지만 누구를 찾아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고급 식당에서 영어로 적혀 있는 메뉴판을 뒤적이는 기분이랄까. 누군가 ‘이런 일은 이 변호사가 최고야!’라며 추천해주면 좋으련만 청년의 곁에는 그럴만한 이가 없었다. <계속>


정거장 검사(서울중앙지검·《슬기로운 검사생활》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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