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평범해 보이는 중년 남성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다. 그 자리에서 죽을지 재판을 받을지 의견을 물었는데, 알아서 하라고 답했다. 이스라엘로 옮겨진 아돌프 아이히만은 5백만 명이 넘는 유대인을 학살한 범죄로 재판을 받았다.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재판 과정을 취재하고 보고서를 남겼다. 법정의 아이히만은 우리 동네 주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중년 남성이었다. 외모와 말투조차 저지른 범죄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평범했다. 나치 이념에 광분하지 않았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한 공무원에 불과했다. 단지 명령에 문제가 있는지 의문을 품지 않고 충실히 따랐을 뿐이었다. 좋은 세상이면 국민을 위해 훌륭한 공무원이 되었을 사람이 나쁜 세상에서 인류에게 가장 악랄한 일을 했던 공무원이 되고 말았다. 그렇다. 죄악은 지극히 평범한 형태로 우리 가까이 있다. 한나 아렌트는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지 않는 생각의 무능이 말하기와 행동의 무능을 낳고 파국을 가져온다고 진단했다.
인공지능으로 대변되는 디지털 시대는 언제 어디서 누구나 온라인, 모바일, 메타버스에 접속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한다. 사람의 상처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사람은 생계에 필요한 부를 획득하고, 생활에 필요한 재화와 서비스를 얻고, 사회적 교류를 위해 온라인에 접속한다. 접속 규모 증가 및 접속 형태 다양화가 이뤄지며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받는 일이 늘고 있다. 비대면 디지털 공간에서 폭력을 당하는 일이 많다. 언어폭력, 따돌림, 명예훼손, 성폭력, 스토킹, 개인정보 유포 등 디지털 폭력이 온라인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간악한 범죄조직도 있지만 그야말로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에 의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컴퓨터 또는 휴대폰 화면 너머 피해자 얼굴이 보이지 않기에 죄책감이 들지 않아서일까. 디지털 공간은 그래도 되는 것인가.
언론과 기업은 세대 나누기를 한다. 사회현상을 분석, 진단하고 마케팅을 위해서다. 그러나 MZ세대 등 다양한 세대 구분은 고령 세대와 젊은 세대 등 칸막이를 만들어 갈등을 조장한다. 갑통알, 구취가 무슨 말인가. 갑자기 통장을 보니 아르바이트 해야겠다, 구독을 취소한다는 뜻이다. 세대별로 달리 쓰는 비속어와 약어가 범람한다. 사람의 성격을 16개로 나누는 MBTI테스트를 이용해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만나기조차 꺼려한다. 이것이 옳은가. 인간관계의 상처는 공포와 고립을 낳는다.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진다.
디지털 공간에서 명예훼손, 모욕 등 위법행위는 형법, 정보통신망법 등에 의하여 당연히 처벌된다.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편법을 부추길 뿐이다, 타인의 고통을 곰곰이 생각하고 깊이 배려하는 디지털 문화가 절실하다. 이것이 정립되지 않으면 디지털 폭력은 끝이 없다.
이상직 변호사(법무법인 태평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