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휴기간을 이용해 잠시 대만을 다녀왔다. 휴가를 겸해 코로나 때문에 오래 동안 만나지 못한 대만 검사들을 만날 목적이었다. 대만과의 인연은 초임검사 시절인 1996년부터 시작되었는데 대만영화 <음식남녀>가 계기가 되었다. 대만과 단교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은 때여서 국적항공기도 취항하지 않던 시절이었지만 영화 속의 타이베이가 너무 궁금했다. 총통부 부근 길에서 지도를 보고 있을 때 근처를 지나던 신사 한 분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는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당시 대만 법무부 검찰국 부국장으로 재직 중인 검사였고 현재의 채청상(蔡淸祥) 법무부장관이다.
법무부를 찾아 채청상 장관을 예방한 뒤 대만 검사들의 안내로 바로 옆에 있는 사법원(司法院)을 방문했다.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서소문의 구 대법원 청사와 같은 구조였는데 대법관들이 근무하고 있고 사법행정 담당 부서도 이곳에 있다. 현관을 들어서니 계단으로 연결된 2층 중앙 정면 벽에‘사법위민(司法爲民)’네 글자가 선명하다. 다른 한쪽 벽에는 법관의 사사로움을 경계하는 노자의 글귀도 걸려있다.“사법은 국민을 위한 것이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가 무엇일까.‘사법정의’,‘정의의 최후의 보루’를 말하지만 언젠가부터 사법이 신뢰를 상실하며 국민들로부터 외면받고 지탄받는 존재로 바뀐 탓이 아니었을까.
그 이유는 무엇보다 사법의 존재이유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사법부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해야 하는지, 사법부의 역할은 무엇인지 정체성과 방향에 혼동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김명수 대법원장 재임 6년 동안 사법의 정치화는 심화되었고 법복입은 정치 판사들은 앞다투어 청와대와 국회로 달려가 권력의 품에 안겼다. 권순일 전 대법관이‘50억 클럽’의 당사자로 검찰의 수사대상에 오르는 사상 초유의 일도 벌어졌다. 고등법원 부장 승진제도가 폐지되고 소속 판사들의 투표로 법원장 추천제가 시행되면서 열심히 일할 동기가 사라졌다. 그사이 촉망받던 엘리트 판사들은 희망을 잃고 대거 법원을 떠났다. 법조일원화 10년이 지났지만 재판의 질이 높아지고 사건처리가 빨라졌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대신 2년 이상 악성미제가 사상 최고 수준으로 증가했음이 통계로 확인됐고 단기간 내에 상황이 획기적으로 개선될 가능성도 별로 없어 보인다.
금년 9월 김명수 대법원장 퇴임 후 임명되는 후임 대법원장의 개혁과제는 명확하다. 사법은 국민을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실추된 사법부의 신뢰를 회복해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사법의 정치화로 만신창이가 된 법원을 정상화 시키는 것이다. 실력 있고 성실한 판사가 제대로 평가받고 법관의 사명과 책무를 망각한 판사는 제도가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과감하게 퇴출시키는 것이다.‘옥불탁 불성기(玉不琢 不成器)’. 옥도 갈고 다듬지 않으면 아무 곳에도 쓸 수 없는 돌덩이에 불과하다. 법률지식과 경험이 충분하지 않은 판사들이 경륜있는 부장판사의 지도를 받지 않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법관의 독립은 결코 판사의 무능과 불성실을 보호하는 방패막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과거 산업화 시대의 2차선 도로였던 사법제도를 경제규모와 사회발전에 맞춰 10차선 이상으로 확장하고 병목을 없애는 것도 중요한 숙제다. 법관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글로벌 시대에 맞지 않는 관할규정이나 형사증거법도 전면적으로 손봐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정된 사법자원으로 최고의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법경제학적 관점을 바탕으로 신속·간이절차를 과감히 도입하는 방안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 국가 최고수준의 경호를 받으며 외부와 격리된 거대한 성채 같은 대법원 건물에 근무하는 우리나라 대법관들과는 달리 대만 사법원의 대법관 집무실은 외견상 매우 소박해 보였다. 대만 최고의 국립대만대학 법대 한 학년 재학생만도 1000여 명인데 사법시험을 통해 선발되는 판사와 검사는 매년 60여 명에 불과하다 한다. 그런 대만 법조엘리트들의 겸손하고 소박한 태도,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고 돌아오는 마음이 가볍지만 않다. 일부 비판적 시각도 있지만 건국 후 사법부가 대한민국 발전에 기여한 바는 결코 적지 않다. 국민을 위한 사법이라는 존재이유를 다시 새기면서 국민에게 더욱 다가가는 사법이 될 때 국민들이 사법부와 함께 할 것임을 잊으면 안 된다.
김종민 변호사(전 광주지검 순천지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