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래에는 예외가 생긴 것 같지만, 예전에는 예외 없이 적용되던 대한민국 형사사법의 대원칙이 있었다. 대기업 총수들의 범죄경력조회를 보면, 모두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업무상 횡령, 배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 기재되어 있다.
범죄와 그에 상응하는 형량은 사안별로 천차만별일 것인데, 신기하게도 모두 똑같은 죄명과 형량이 기재되어 있다.
여러 복잡한 사정에 의해 대기업 비자금 수사가 개시되면, 수사 결과 그 횡령 배임 액수가 수백억 또는 수천억에 이르는 것으로 밝혀진다.
이득액이 50억 원 이상이면 형량이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으로 법률에 정해져 있다. 최하한의 형을 선택해도 징역 5년인데, 집행유예 선고가 가능한 형은 징역 3년 이하이다. 법관은 형량을 정할 때 ‘작량감경’이라고 해서 재량으로 형량을 절반까지 깎아줄 수 있다. 최하한의 형량인 5년을 선택한 후, “경제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참작하여 3년으로 작량감경하고, 집행유예 5년을 붙인다. 절반을 감경하면 2년 6월이지만 눈치가 보여서인지 3년으로 한다. 간단한 원칙이다.
이 원칙이 깨지게 된 계기였던 것 같기도 하고, 역사상 지금까지 검찰수사가 전 국민의 박수와 응원을 받았던 유일한 사례가 아닌가 하는 사건이 있었다. 2003년 대선자금 수사이다.
2002년 대선에서 대기업들이 현금을 사과 상자에 담아 트럭 적재함에 가득 싣고 트럭 채로 정치자금을 전달했다. 한나라당에 ‘차떼기 정당’이란 별명이 생겼고, 당시 대통령은 ‘수사 결과 우리가 한나라당의 10분의 1 이상 받은 것으로 밝혀지면 대통령 그만두겠다’라고도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누가 누가 많이 받았나, 적게 받은 사람은 잘했다는 것인가 하는 '웃픈' 현실이었다. 아무튼 당시 온 국민의 응원을 받으며 수사가 진행되었고, 대검 중수부 앞으로 꽃다발과 떡이 배송되고, 안대희 중수부장은 ‘국민 검사’라는 칭호를 얻었다. 필자의 기억으론 아마 이때에도 재판 결과는 원칙이 지켜졌던 것 같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소액주주들의 권리의식이 높아졌고, 각종 기업공시제도와 감시 시스템이 구축되어 예전과 같이 차떼기로 돈을 갖다주는 일은 일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필자도 먹고살아야 하는 데 갈수록 일거리가 없어져서 걱정이지만, ‘정경유착’이란 단어가 옛말이 되고, 기업회계가 투명해지는 건 좋은 일이고 더 투명해져야 할 것이다.
대선자금 수사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미국의 엔론 사태에서, 엔론의 회장은 분식회계 혐의가 인정되어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몇 년 후 옥중에서 병사하였다.
김명석 수사1부장(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