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런(Villain)’이란 용어를 아십니까? 빌런은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평범한 사람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괴짜’라고 정의되고 있는데 이 용어는 라틴어로 고대 로마의 농장 빌라(villa)에서 일하는 농민을 가르키는 빌라누스(villanus)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착취당해 고통받던 농민들이 결국 상인과 귀족들의 재산을 약탈하고 폭력을 휘두르게 되는데 기득권층이 이들을 악당이라고 부른 것 같습니다. 최근에는 냉면에 집착하는 냉면 빌런, 커피가 없으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커피 빌런 등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특이한 행동을 하는 이들을 일컫는 말로 확장되어 사용되기도 하지만 주차 공간을 두 개나 차지하여 거주민들의 불만을 야기하는 주차 빌런, 불쾌한 소리로 사람을 힘들게 하는 소음 빌런 등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고 다니는 진짜 악당들을 우리는 또 빌런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법조계에도 이런 빌런이 존재합니다.
국가가 자신의 머릿속에서 개인정보를 꺼내 악용하고 있다고 계속 주장하는 분, 재판 중인 법정마다 돌아다니며 이해관계도 없는 판사들에게 사회정의가 무너졌다고 항의하는 분, 정자체 글자로 반듯이 적혀있기는 하나 띄어쓰기 없이 문맥도 맞지 않는 장황한 고소장을 수사기관에 끊임없이 제출하는 분, 나아가 근처 상가나 행인들에 대한 피해는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고음 확성기로 크게 노래를 틀거나, 길거리를 막고 통행을 방해하며 자기 주장만을 외치는 바람에 주위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분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당하면 우리 대부분이 눈살을 찌푸립니다. 하지만 마음을 조금 열고 자세히 바라 볼 필요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때 끊임없이 고소장을 제출하여 수사기관으로부터 악성 빌런으로 취급받던 40대 여성의 사건을 다루면서 한 맺힌 그 여성의 목소리에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던 우리들의 잘못을 바로 잡은 적이 있습니다. 그 여성이 과도할 정도로 고소에 매달린 이유가 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억울함을 풀어주고 그 원인제공자를 구속하여 실형을 살게 하였는데 만약 그녀를 빌런으로 치부하며 계속 무시하였다면 마음을 닫은 그녀는 사회를 악으로 규정하며 평생을 끝없는 원망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진실을 외면한 우리들로 인해 억울함으로 가득 찬 진성 빌런인지, 아니면 오로지 사회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스스로 왜곡된 악성 빌런인지를 구분해내는 건 쉽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 앞에 마주한 사람이 1%에 해당하는 진성 빌런인지 알아보려고 노력해 보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 법조인들의 소명(召命) 아닐런지요.
정경진 부장검사(서울고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