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처럼 휴대전화 앱을 통해 택시를 부르는 시스템이 갖춰지지 않았을 적 얘기이다. 지방의 한 작은 지원에서 형사재판 선고기일에 출석해야 하는 피고인이 어렵사리 부른 택시로 법원 앞에 도착했다. 피고인은 택시 운전사에게 ‘판결선고만 듣고 5분 내에 나올 것이고 택시비는 왕복비용보다 더 쳐줄 테니 가지 말고 기다려 달라'고 부탁해 택시 운전사의 동의를 받고 내렸다. 하지만, 결과는 법정구속. 실형을 전혀 예상치 못한 채 택시비를 내지 않고 법정으로 들어간 승객을 기다리던 택시 운전사의 마음은 어땠을까. 시골까지 돌아갈 택시 잡기가 쉽지 않을 걸 알고 양해해 준 것일 수 있지만 어쨌거나 승객의 말을 믿고 기다려 주었던 택시 운전사의 감정은 불안, 걱정, 지침, 분노의 여러 단계를 거쳤을 것이고, 결과적으로 그 신뢰는 깨지게 되었다. 설령 법원 구성원의 기지로 구속된 피고인의 영치금에서 택시비를 받았고 뒤늦게나마 승객의 사정을 알게 되었더라도 뒷맛은 개운치 않았을 것이다.
좋은 일을 기다리는 입장에서는 기대감과 긴장감이 공존할 수 있겠지만, 보통 기다림 속에는 앞으로의 일이 예상과 다르게 전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나 불확실성도 함께 존재한다. 기다림은 신뢰에 기반하지만, 그 결과가 좋지 않으면 믿었던 상대방에 대한 실망과 신뢰 상실은 피할 수 없게 된다. 법원에 사건을 접수한 당사자는 소송서류를 접수한 시점부터 기다림의 연속이다. 소장이나 답변서를 법원에 제출한 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첫 재판기일마저 잡히지 않는다면, 법원을 통해 분쟁을 해결하려던 당사자의 신뢰는 점점 무너지게 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체로 사건 접수 후 약 3개월 무렵에 첫 재판이 열렸었고, 그 시점이 당사자가 참을 수 있었던 한도 내지 임계점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법원에 사건을 접수한 당사자의 기다림의 시간이 심상치 않다. 전국 법원 1심 민사 본안 사건의 접수부터 1회 기일까지의 기간이 2022년 평균 4.5개월(137.7일)이 걸렸다고 한다. 당사자로서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은 아닌지, 처리 과정에서 오류가 발생한 것은 아닌지 등의 온갖 걱정과 불안감 속에 기다리다가 지치게 되고, 분노로까지 이어지다가 결국 법원에 실망하고 사법 신뢰가 깨지는 상황까지 이를 수도 있다.
믿고 기다려주는 것도 한계에 이르렀다는 재판당사자의 반응이 나올 정도에 이르러서는 안 될 것이다. 국민이 법원에 대해 가지는 신뢰의 임계점이 무너지지 않도록, 재판부의 일원으로서 당사자의 기다리는 마음을 헤아리고 조금씩이라도 상황을 개선해 보려는 마음가짐을 가져보게 된다.
정문경 고법판사(서울고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