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5년9월 유엔의 전체 예산을 심사하는 실권을 가진 위원회 의장이 미국 검찰에 구속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러시아 출신 외교관인 블라디미르 쿠즈네초프가 주인공으로 1980년부터 유엔본부 사무국과 러시아 대표부에서 근무한 고위직이었다. 그는 이라크에 대한 인도적 지원 프로그램과 관련하여 뇌물을 받은 혐의로 이미 구속된 유엔 직원의 자금세탁에 관여한 혐의를 받았다. 총 16명의 위원으로 구성되는 유엔 행정예산자문위원회(ACABQ) 의장을 맡아 매년 사무총장이 제출하는 유엔 전체 예산을 심사하고 최종 수정하여 총회에 넘기는 실권을 쥐고 있는 인물이었다.
유엔 외교가는 물론이고 세계의 언론들은 놀라움으로 술렁댔다. 유엔의 관료주의와 부패를 개혁하기 위해 메스를 들이대야 한다고 대부분 주장해 왔지만, 그와 같은 고위급이 연루되었을 것으로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코피아난 사무총장은 미국 연방검찰의 요청을 받고 쿠즈네초프의 외교적 면책특권을 보류하는 결단을 신속하게 내렸다. 이미 불거진 ‘석유-식량 프로그램(Oil-for-Food Program)’의 부패 스캔들의 파장을 염려했을 것이다. 2005년6월 코피아난 사무총장의 아들이 바그다드 정권과 거래가 있는 민간기업의 부패에 연루되었다는 보도가 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석유-식량 프로그램의 문제점에 대한 지적은 2004년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유 밀매 등 불법에 연루된 개인과 단체의 명단이 이라크 일간지 알마다에서 공개되었다. 미국 언론에서도 이라크의 사담후세인 정권에 악용되어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불법자금이 조달되었다는 내용이 흘러나왔다.
유엔의 석유-식량 프로그램은 1995년 시작된 이라크에 대한 인도적 지원 프로그램이었다. 1991년 안보리의 지휘 하에 쿠웨이트를 공격한 이라크를 상대로 1차 걸프전을 치른 다음에 인도적 지원을 후속조치로 이루어졌다. 안보리의 전면적 제재가 후세인 정권뿐만 아니라 무고한 이라크 국민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비판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안보리는 이라크로 하여금 석유를 국제사회에 팔고, 식량, 의약품 등 인도적 지원물품을 구입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준 것이었다.
프로그램의 부패에 대한 의혹이 확대되자, 2004년3월 코피아난 사무총장은 독립조사위원회를 발족한다고 밝혔고, 안보리 결의를 거쳐 미국의 전 연방준비위 의장 폴 볼커에게 그 책임이 맡겨졌다. 그는 최근 금융위기 이후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경제고문을 맡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의 분리 등 금융규제방안을 마련한 인물이기도 하다. 독립적인 조사를 거쳐 2005년9월 결과가 안보리에 보고되었다.
일명 ‘볼커보고서’로 불리는 조사결과에는 주요 혐의내용에 대한 상세한 내용과 함께, 재발방지를 위한 개혁의 필요성이 담겼다. 결국 프로그램의 미숙한 관리로 인해 비인가된 석유의 밀매와 불법 사례금이 제공되는 부패의 고리를 막지 못했다는 것이다.
보고서 공개 직후, 전 세계인의 유엔부패에 대한 실망은 상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위기는 유엔 개혁을 위한 노력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기회가 되었다. 그동안 추상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부패를 막고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 변화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유엔의 관료시스템은 비효율적이고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는 비판에 줄곧 직면해 왔기 때문이다.
유엔의 행정분야에 대한 개혁은 1990년 중반 이후 시작되었다. 1994년 내부감사실이 설립되어 관료체제의 부패를 막고 조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기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시동은 1997년3월에야 이루어졌다. 코피아난 사무총장이 비용을 늘리지 않으면서 조직을 능률화하기 위한 개혁작업에 착수하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사무국의 행정예산 경비를 38%에서 25%로 감축하여 1억2,300만 달러의 예산을 절감하고 1,000명의 유엔 직원을 줄이는 방안을 발표했고, 기존의 3개국을 통합하여 경제사회이사국(DESA)을 설치했다. 실제로 1985년 기준으로 1만2,000명이던 유엔본부 사무국의 직원은 8,900명으로 줄었다. 그러나 누구도 현재의 유엔이 이러한 조치만으로 투명성과 효율성을 갖추게 되었다고 평가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으로 유엔이 글로벌 가버넌스로서 국제사회에서의 역할이 더욱 커질수록 개혁을 요청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다.
“매일 우리는 인도적 위기, 인권 위반, 무력 충돌, 중대한 보건과 환경의 문제를 포함한 다양한 새로운 도전들을 접하면서 유엔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껏 유엔이 그렇게 많은 분야에서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요청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더욱 강화된 유엔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며, 일관성 있고, 책임있는 모습으로 21세기에 굳건하게 자리잡는 데 있어 새로운 활력과 자신감을 불어넣을 작정입니다.”
반기문 총장은 취임 직후부터 유엔의 개혁을 통해 변화의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관심을 두고 있다. “효율적이고 책임지는 유엔”을 강조하면서 관료주의에 사로잡힌 유엔의 문제에 메쓰를 들이대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엔의 개혁을 위한 노력이 미래를 향한 변화의 목소리로 국제사회에 성공적으로 메아리치길 기대해 본다.
김형준 검사 hjkim.un@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