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따금 법원의 판결이 국민들의 큰 관심사가 되는 경우가 있다. 최근에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판결을 두고 말이 많았다.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사법부의 재판에 대한 비판이 지나쳐 사법부의 독립이 우려된다고 걱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필자는 그런 견해에 대하여 동조할 수 없다. 비판 없이 발전하는 경우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의 경우는 그렇다.
로스쿨에서 많은 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강의를 대형강의라고 한다. 필자의 경우 대형강의가 끝나고 나면 학생들이 우르르 - 정말 아프리카의 물소떼처럼 수십명이 몰려나오는 것은 아니다. 강단에 서있는 사람의 입장에서 네다섯 명의 학생들이 책을 들고 계단을 서둘러 내려와도 우르르 몰려오는 것같이 느껴진다 - 몰려나온다. 질문을 하기 위해서다. 필자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지적해주는 경우, 학생 자신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는 경우, 최근의 판례를 알려주는 경우, 이상한 판례가 있다며 그 취지를 물어보는 경우 등 내용도 다양하다. 침까지 튀겨가며 맹렬히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경우도 있다. 필자의 경우 질문들에 즉답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실력이 부족한 탓에 더 연구해서 다음 시간에 설명하겠다고 하기도 한다.
과거 ‘사각모’가 대학생을 상징하였다면, 교수들의 게으름을 상징하는 단어는 ‘누렇게 바랜 대학노트’였다. 10년, 20년을 일관되게 똑같은 대학노트로 계속 강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런 교수는 없을 것이다. 왜 그럴까? 교수들이 성실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컴퓨터가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출력만 새로 하면 강의원고의 색은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컴퓨터에 남아 10년, 20년 최소한으로만 변하고 있는 강의원고는 여전히 많을 것이다. 누가 그런 교수를 만들었을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바로 학생이다. 학생들도 공부하지 않았고, 질문하지 않았으며, 비판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 혼자서 노력하고, 알아서 열심히 하고, 스스로 발전해 나가는 것은 정말 어렵다. 다른 사람들과 경쟁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호되게 비판도 받으면서, 잘한 것에 대한 칭찬과 보상도 받으면서 발전하는 것이 오히려 쉽다.
그래서 필자는 질문하고 따지는 학생들에게 고맙다. 나를 반성하게 하고, 연구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내 강의노트에 침을 튀겨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