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여름 로스쿨 1학년생들을 데리고 해외교류를 다녀왔다. 교류기관 탐방을 마치고 막간의 시간에 장기를 뽐내는데, 깜짝 놀란 것은 하나같이 노래를 잘 부른다는 사실이었으며, 춤까지 걸그룹 뺨치게(?) 추는 학생들도 있었다는 점이다. 전국민이 가수인 것이 요즈음의 추세지만, 고루(固陋)한 법학 교육을 받아 온 필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현상이 로스쿨 재학생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요즘 젊은 판사들 사이에는 가수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숨은 인재가 많다고 한다.
과거 법조계는 특정 학맥이 주요 직위를 결정하고, 엄격한 서열사회화가 다양한 의견의 표출을 막는다는 평가를 받아왔는데, 최근에는 특정 외고 출신 법조인이 주류를 이룸에 따라 독점화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 필자 역시 이러한 현상이 우려되기는 마찬가지이다. 강남에서 나고 자라 강남을 벗어난 적이 없는 법조인들이 서민들의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헤아릴 수 있을까? 필자는 다양한 논의를 가로막는 학문의 동종교배는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고 때때로 퇴보를 가져온다는 점을 목격해왔다. 마찬가지로 특정 가치와 이념을 당연시 여기는 사법부 구성의 경직화는 대법원 판결의 맹목적 추종을 불러와 재판의 당사자인 국민에게 괴리감을 가져올 수 있으며, 이는 사법, 나아가 법조계에 대한 불신과 불만으로 표출될 것이다.
최근까지 우리나라는 법조일원화 등을 통해 다양한 이력을 가진 법률가의 사법부와 검찰 진출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법조 다양성의 확보는 검사 경력을 가진 판사, 의사 출신의 검사가 아니라, 사회문제에 대한 가치관과 생(生)에 대한 사고방식, 생활환경, 정치적 이념 등에서 법조인의 다양성이 보장될 때 가능하다.
그런데 필자는 노래 잘하는 판사, 농사짓는 변호사, 그림 그리는 검사들을 보면서 다원주의의 가능성을 조심스레 발견했다. 특정 학맥과 인맥 속에서도 우리 법조인들이 다양한 국민들의 요구와 눈높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다원적 가치를 스스로 만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성전환자에 대한 강간을 인정하고, 동성애자라는 사실의 적시를 명예훼손으로 긍정하는 판결과 같이 다원화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반영할 수 있는 판결은 이처럼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법조인들에 의해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노래 잘 부르는 판사! 더욱 많아지면 좋겠다. 이러한 이들이 많아질수록 신선하고 용기 있는 하급심 판결도 많아질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