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안의 개요
한국 회사인 원고가 일본 회사인 피고에게 러시아에서 선적한 냉동청어를 중국에서 인도하기로 하고, 대금은 선적 당시의 임시검품 결과에 따라 임시로 정하여 지급하되 인도지에서 최종검품을 하여 최종가격을 정한 후 임시가격과의 차액을 정산하기로 하는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피고가 정산금을 미지급하자 원고는 정산금의 지급을 구하는 소를 제기했고, 피고는 적정 매매대금을 초과하여 지급했으므로 부당이득을 반환하라는 반소를 제기했다. 이에 앞서 피고는 원고를 상대로 중국에서 제소했으나 소가 각하되었다.
Ⅱ. 원심판결
원심판결(부산고등법원 2006. 10.11. 선고 2006나2049(본소), 2006나2056(반소) 판결)은 과거 대법원판결의 추상적 법률론을 따라 “… 국내의 재판관할을 인정할지 여부는 … 우리나라의 성문법규도 없는 이상 결국 … 기본이념에 따라 조리에 의하여 결정함이 상당하고, … 민사소송법의 토지관할 규정 또한 위 기본이념에 따라 제정된 것이므로 기본적으로 위 규정에 의한 재판적이 국내에 있을 때에는 우리나라에 재판관할권이 있다”는 취지로 설시하고, 원고인 한국회사의 주소지가 대금지급의무의 이행지라고 보아 민사소송법 제8조를 근거로 한국의 국제재판관할을 긍정했다. 놀랍게도 원심판결과 1심판결은 국제사법의 개정을 몰랐다.
Ⅲ. 대상판결의 요지
대상판결은 “중국에서 이 사건 청어에 대하여 최종검품이 이루어졌는지 여부 및 그 결과가 무엇인지가 주로 문제되므로 분쟁이 된 사안과 가장 실질적 관련이 있는 법원은 청어의 인도지로서 최종 검품 예정지였던 중국 법원이나 … 피고가 원고를 상대로 중국 법원에 제기한 소가 각하된 점, 청어에 포함된 성자(成子)의 비율을 확인할 수 있는 증거인 청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피고가 청어를 인도받고 처분한 시점으로부터 약 5년이 경과하여 이제 와서 한국 법원의 국제재판관할을 부정한다면 당사자의 권리구제를 도외시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는 점, 피고가 반소를 제기했으므로 원·피고 사이의 분쟁을 종국적으로 일거에 해결할 필요성이 있는 점, 원고가 한국에서 관련 서류를 팩스로 전송받는 방법으로 계약을 체결했고, 정산금을 송금받기로 한 곳이 한국인 점 등을 고려할 때, 한국에도 당사자 또는 분쟁이 된 사안과 실질적 관련이 있다”는 근거로 우리 법원의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민사소송법 제8조와, 청구의 기초가 된 의무이행지의 관할을 인정할 수 있다는 설시는 하지 않았다.
Ⅳ. 연구
1. 문제의 제기
섭외사법 하의 과거 대법원판결에 따르면, 대상판결의 사안에서는 청구의 기초가 되는 의무, 즉 대금지급의무의 이행지인 한국의 국제재판관할을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판결은 도메인이름에 관한 대법원 2005. 1.27. 선고 2002다59788 판결을 인용하면서, 계약사건의 의무이행지관할에 관한 별다른 설시 없이 실질적 관련을 기초로 위와 같이 판시했다. 대상판결은 판례공보에 게재되지 않았는데 아래에서는 대상판결에 대해 간단히 논평한다.
2. 국제사법 하의 국제재판관할규칙
섭외사법 하에서 국제재판관할의 배분에 관하여는 逆推知說, 관할배분설과 수정역추지설 등이 있었으나 2001년 7월 개정 국제사법이 시행됨으로써 학설 대립은 의미를 상실했고, 이제는 국제사법에 따라 精緻한 국제재판관할규칙을 정립해야 한다.
국제사법은 소송원인인 분쟁이 된 사안 또는 당사자가 법정지인 한국과 ‘실질적 관련’을 가지는 경우 우리 법원에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하고, 국제재판관할 배분의 이념과 합리적인 원칙에 따라 실질적 관련의 유무를 결정해야 한다고 명시한다(제2조 제1항). 실질적 관련은 국제재판관할을 결정하는 궁극적 잣대로서 기능하는 매우 탄력적인 개념이다. 국제재판관할의 유무를 판단함에 있어서 법원은 민사소송법의 토지관할규정 등 국내법의 관할규정을 참작해야 하나, 재판적에 관한 규정은 국내적 관점에서 제정된 것이므로 국제재판관할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제2조 제2항). 따라서 과거 판례가 발전시킨, 토지관할규칙을 기초로 국제재판관할규칙을 정립하는 접근방법은 상당부분 유지될 수 있으나, 일단 「국제재판관할규칙=토지관할규정」이라고 보고 그 결론이 부당한 경우 특별한 사정을 근거로 결론을 뒤집을 것이 아니라 국제재판관할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올바른 국제재판관할규칙을 정립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토지관할규칙을 ① 국제재판관할규칙으로 삼을 수 없는 것, ② 곧바로 국제재판관할규칙으로 삼을 수 있는 것과 ③ 적절히 수정함으로써 국제재판관할규칙으로 삼을 수 있는 것으로 분류하고, ③의 유형을 어떻게 수정할지를 검토해야 한다. 나아가 ④ 토지관할규칙이 망라적이지 않으므로 그 밖의 국제재판관할의 근거를 검토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물론 매우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3. 계약사건에서 의무이행지에 기초한 국제재판관할-종래의 논의
특별재판적을 정한 민사소송법 제8조에 따르면 재산권에 관한 소는 의무이행지의 법원에 제기할 수 있다. 대법원 1972. 4.20. 선고 72다248 판결은 섭외사법을 적용하여 문제된 국제계약의 객관적 준거법을 일본법이라고 판단하고 그에 따라 의무이행지를 결정한 뒤 구 민사소송법 제6조(민사소송법 제8조에 상응)를 적용하여 의무이행지인 한국의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했다. 문면상으로는 ‘재산권에 관한 소’에 법정채권에 관한 소도 포함되나, 그 경우까지 의무이행지관할을 인정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이유로 학설은 이를 채권계약으로부터 발생하는 채무에 한정한다. 요컨대 제8조는 위 ③의 유형에 속하는 토지관할규칙인데 이를 국제재판관할규칙화함에 있어서는 적절한 수정이 필요하다.
가. 청구의 기초가 된 의무
종래 학설은 제8조의 의무는 계약관계를 특징지우는 의무가 아니라 ‘청구의 기초가 된 계약상 의무’라고 본다. 이에 따르면 의무이행지에 관한 합의가 없는 한, 누가 어느 의무에 기하여 제소하는가에 따라 관할법원이 다르게 되어 한 계약으로부터 발생하는 분쟁의 관할을 집중할 수 없다. 따라서 유럽연합의 브뤼셀Ⅰ규정(제5조 제1호)은 특징적 급부의무에 착안하여, 물품매매계약과 용역제공계약의 경우 청구의 기초가 된 의무에 관계없이 통일적인 이행지를 규정하나, 다른 유형의 계약에 관하여는 여전히 청구의 기초가 된 의무에 착안한다. 나아가 1999년 헤이그 예비초안(제6조)은 브뤼셀Ⅰ규정과 유사하나 매매계약, 용역제공계약과 양자의 혼합계약에 관하여만 의무이행지관할을 인정한다.
나. 이행지의 결정
민사소송법 제8조를 참작하여 국제재판관할을 정하자면 의무의 ‘이행지’를 결정해야 한다. 문제는 당사자가 이행지를 합의하지 않은 경우인데, 이행지를 결정함에 있어서 종래 ① ‘저촉법을 통한 우회공식’을 따르는 견해와 ② 국제민사소송법 독자의 관점에서 이행지를 결정하는 견해가 있다. 전자는 국제사법에 의하여 결정되는 준거실체법상의 의무이행지에 착안하고, 후자는 절차법적 이익에 봉사하는 통일된 절차법적 이행지 개념을 도입한다. 위 대법원 1972년 판결은 우리 섭외사법에 따라 지정된 계약의 준거법을 정하고 그에 의하여 채무의 이행지를 결정함으로써 ①설을 따랐으나 학설은 ②설이 유력하다. ②설의 문제점은 절차법적 이행지 개념이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4. 대상판결에 대한 평가
첫째, 대상판결은 종래 학설 및 1972년 대법원판결과 같은 청구의 기초가 된 의무의 이행지에 착안하는 형태의 의무이행지관할규칙을 따르지 않았다. 둘째, 대상판결은 가장 실질적 관련이 있는 법원은 청어의 인도지이자 최종 검품 예정지인 중국 법원이라고 보았는데, 이는 청구의 기초가 된 정산금지급의무가 아니라 계약의 특징적 급부의무를 중시한 점에서 종래 학설 및 1972년 대법원판결과 다르고, 결과적으로 브뤼셀Ⅰ규정 및 헤이그 예비초안과 유사하다. 그러나 대상판결이 특징적 급부의무에 착안한 것인지 아니면 실질적 관련의 판단과정에서 그런 결론에 이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셋째, 대상판결이 의무이행지관할규칙과 결별하고 실질적 관련만에 기하여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한 것인지도 애매하다. 대상판결이 원고가 정산금을 송금받기로 한 곳이 한국임을 언급하므로 청구의 기초가 된 의무이행지를 고려한 것으로 보이지만, 기타 제사정도 고려하면서 실질적 관련에 기하여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하였다. 의무이행지관할의 정당성에 대하여는 비판이 있고, 미국에서는 계약사건에서 의무이행지라는 이유만으로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하는 대신 적법절차의 맥락에서 법정지와의 어떤 접촉이 특별관할권을 정당화하는가에 관하여 다양한 판결이 있는데(Born/ Rutledge, International Civil Litigation in United States Courts (2006), p.151 이하), 대상판결은 여러 접촉(contacts)을 고려한 점에서 미국 판결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국제사법 제2조 하에서 우리가 미국식 접근방법을 따르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실 국내관할규정에 대한 고려없이 실질적 관련을 근거로 국제재판관할을 인정한 것은 도메인이름에 관한 위 2005년 대법원판결에서 비롯되었으나, 필자는 그것은 도메인이름의 특수성과, 결과발생지 결정의 어려움에 기인한 것으로 선해했다. 하지만 전형적인 계약사건인 이 사건에서 대상판결의 설시는 수긍하기 어렵다. 브뤼셀Ⅰ규정(제5조 제1호)과 일본 국제재판관할연구회의 2009년 7월 중간시안(제2의 1)은 의무이행지관할규칙을 유지하는데, 대상판결이 이를 배척할 의도라면 그 취지와 근거를 밝혀야 했다. 대상판결은 제사정을 열거하고 한국에 국제재판관할이 있다는 결론만을 내렸을 뿐이고, 1972년 대법원판결 및 국제사법 제2조(특히 제2항)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어떤 논리적 과정을 거쳐서 결론에 이르렀는지를 제시하지 않는데 이는 유감이다. 국제사법상 법원은 국내관할규정을 참작해야 하므로 대상판결이 실질적 관련을 판단함에 있어서 대금지급의무의 이행지에 좀더 비중을 두고, 기타 사정을 부수적으로 설시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요컨대 대상판결은 대법원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나 아직 입장이 정리된 것 같지는 않다. 섭외사법 하에서 토지관할규칙에 지나치게 구속되었던 대법원이 이제는 거꾸로 토지관할규칙을 과도하게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비록 국제사법 제2조가 개방적인 일반조항이지만, 법원이 이것을 恣意的 判斷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남용해서는 아니 된다. 법원은 제2조에 따라 우선 토지관할규칙 등 국내관할규정을 참작하여 精緻한 국제재판관할규칙을 정립해야지, 단지 다양한 사정을 열거하고 법원이 원하는 결론을 내리는 것, 즉 실질적 관련을 법원의 恣意的 結論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제2조에도 반하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앞으로는 아무쪼록 대법원이 제2조에 충실한 접근방법을 취해줄 것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