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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사일반
강제징용 소송과 청구권협정 검토
Ⅰ. 대상 판결 원고들은 구 일본제철이 운영하는 제철소에서 강제노역에 종사하였다. 원고들은 일본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2001년 3월 27일 청구기각 판결을, 2003년 10월 9일 최고재판소에서 패소 판결을 각 받았다. 원고들은 2005년 2월 28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는데, 1심과 2심에서 패소하였으나, 대법원 2012. 5. 24. 선고 2009다68620호로 파기환송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2018년 10월 30일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닌 점 등에 비추어, 원고들이 주장하는 신일철주금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라고 하여 원고승소 판결하였다. Ⅱ. 역사적 검토 이 사건에서는 국제 재판관할권, 일본판결의 승인, 피고의 법적 동일성, 소멸시효 등 다양한 쟁점들이 있으나, 논의의 방향을 청구권협정으로 모으고, 청구권협정의 탄생 배경, 역사적 평가 등에 관하여 살펴본다. 조선의 멸망 과정, 일제의 억압과 수탈, 친일파 청산의 좌절, 박정희 정권과 친일파의 역사 등에 대해서는 먼저 역사책을 보기 바란다. 사실 매국노와 친일파를 빼놓고 우리 현대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 청구권협정도 마찬가지이다.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정확한 법적 판단이 가능하다. 1961년 5월 16일 새벽 박정희 소장이 이끄는 군대가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 자본을 도입하기 위하여 한일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반대 시위를 진압한 후 1965년 6월 22일 한일 기본조약(청구권협정 포함)을 체결했고, 그해 12월 18일 발효되었다. 조약 내용은 “일본 정부가 박정희 정부에 무상 3억불, 유상 2억불을 제공하는데, 식민지배에 대한 사과와 배상은 하지 않고, 한국과 한국민의 일본에 대한 청구권은 모두 포기한다”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정희 정부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의 대부분을 포항제철, 소양강댐 등 국가 기반시설의 확충에 사용했다. 한일 기본조약은 공개되지 않았다가, 노무현 정부 때인 2005월 1월에서야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청구권협정 원문은 찾아보기 바란다. 살펴보면, 친일파들은 해방 후 대한민국의 권력기관뿐만 아니라 언론·교육 등 각 분야를 주도한 지배세력이 되었다. 청구권협정도 그들의 주도로 탄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일 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은 다음과 같이 비판을 받는다. ① 박정희 정부는 ‘식민지배 청산’에 관한 국민적 합의 없이 추진하였는데, 한일회담은 청구권 교섭에 밀려 식민지배 청산이라는 본질을 추구하지 못하였다. ② 청구권 문제, 어업 및 문화재 문제 등에서 한국이 지나치게 양보함으로써 매우 굴욕적이었다. ③ 국가와 국민에게 큰 영향을 미치는 조약임에도, 그 내용 및 일본으로부터 받은 돈의 사용처도 제대로 공개하지 않았다. ④ 일제의 식민지배로 수많은 국민들이 피해를 보았는데도, 박정희 정부는 그들을 보호하거나 피해를 배상하지 않았고, 그들의 고통과 권리를 억압하였다. Ⅲ. 법률적 검토 1.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는지 여부 가. 불포함설 개인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다수설, 대법원 판례이다.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청구권협정은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청구하기 위한 협상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샌프란시스코 조약 제4조에 근거하여 한일 양국 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하여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인다. (2) 청구권협정 제1조에 따라 일본 정부가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이 제2조에 의한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인 대가관계에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3) 일본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 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이에 한일 정부는 일제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관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4) 대한민국이 요구한 12억 2000만 달러에 미치지 못하는 3억 달러만 받은 상황에서 강제동원 위자료청구권도 적용대상에 포함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나. 포함설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하는 견해로서 소수설이다. 논거는 아래와 같다. (1)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은 청구권협정상 청구권의 대상에 ‘피징용 청구권’도 포함됨을 분명히 하고 있다. (2) 위 피징용 청구권은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까지도 포함한 것이고, 청구권협정 제1조에서 정한 경제협력자금은 제2조에서 정한 권리관계의 해결에 대한 대가 내지 보상으로서의 성질을 포함하고 있다. (3) 양국은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전제로 한 배상’도 당연히 청구권협정의 대상에 포함하는 것으로 상호 인식하고 있었다. (4) 대한민국은 청구권협정에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포함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여, 이후 장기간 그에 따른 보상 등 후속 조치를 취하였다. 다. 검토 조약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문언뿐만 아니라 체결 당사국의 의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 일본은 개인의 손해배상청구를 포함한 일체의 청구권을 더는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고, 완전히 최종적으로 종결하고자 했다. 박정희 정부는 쿠데타로 잡은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개발과 그 자금 마련이 절실히 필요했던 점, 박정희와 정일권 등 집권자들의 친일 성향과 청구권협정의 체결 과정 등을 고려하면, 일본의 의사와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조약 문언, 당사자의 의사, 후속 조치 등을 종합해보면,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봄이 타당하다. 다만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은 이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즉 청구권협정 체결시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하여 알려진 바 없었고, 전혀 논의대상이 되지도 않았던 점, 청구권협정에 대한 합의의사록(Ⅰ) 제2조 (g)항에서 말하는 대일청구요강(소위 8개 항목)에 위안부 문제가 포함되어 있지도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위안부 피해자의 배상청구권에 관하여는 불포함설이 타당하다고 본다. 2.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지 여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보는 경우에도 가능설, 불가능설로 견해가 나뉜다. 가. 가능설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는 견해이다. 논거는 다음과 같다. (1)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에 관하여 양국 정부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다. (2) 청구권협정에서 양국 정부의 의사는 개인청구권은 포기되지 아니함을 전제로 정부 간에만 청구권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하자는 것, 즉 ‘외교적 보호권에 한정하여 포기하자’는 것이었다고 봄이 타당하다. (3) 청구권협정을 이탈리아와 서독 사이의 조약과 단순 비교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나. 불가능설 소송으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는 견해이다. 논거는 아래와 같다. (1) 양국의 진정한 의사가 외교적 보호권만 포기하기로 했다고 볼 수 없다. (2) 청구권협정은 당시 국제적으로 통용되던 일괄처리협정에 해당한다. (3) 청구권협정 제2조에서 규정한 '완전하고도 최종적인 해결'이나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라는 문언의 의미는 "소로써 권리를 행사하는 것은 제한된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 검토 청구권협정의 문언과 해석, 양국 정부의 의사 등을 종합해보면,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편 2015. 12. 28. 박근혜 정부는 한일 외교부 장관 사이의 합의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될 것임을 확인한다”는 내용의 발표를 하였다. 위 합의 문언상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도 없고, 양국 정부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볼 명확한 근거도 없다. 따라서 위안부 합의에도 불구하고, 피해자들은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본다. Ⅳ. 결론 대상 판결은 역사적·법률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우리의 아픈 역사와 그에 대한 최고 법관들의 법적 판단이 두루 담겨 있는 귀중한 판결이다. 논거의 차이는 있지만,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를 인용한 대상 판결의 결론도 지극히 타당하다. 다수의견이든 소수의견이든 그 논거는 모두 설득력이 있다. 다만 피해를 당한 국민들의 고통과 억울함을 외면하기 어렵다. 나라가 망하여 피해를 보았고, 과거 정부가 잘못하여 피해를 배상받지도 못하였기에 더욱 그렇다. 이 비극과 치욕적인 역사를 부디 잊지 말고 교훈으로 삼기를 바란다. 허용구 부장판사 (대구지방법원)
일제강제징용피해자
일본전범기업
손해배상청구소송
전원합의체
허용구 부장판사 (대구지방법원)
2019-05-14
민사일반
방응모 재판 고찰
- 대법원 2016. 11. 9. 선고 2012두3767 판결 - Ⅰ. 대상 판결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이하 ‘진상규명위원회’라 한다)는 2009년 6월 29일 망 방응모의 행위를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하 ‘반민족규명법’이라 한다) 제2조 제13호, 제14호, 제17호의 친일 반민족행위에 해당한다고 결정하였다. 서울고등법원은 2011년 12월 1일 제13호, 제14호 부분은 적법하나, 제17호 결정 부분은 위법하다고 판결하였다. 대법원은 제14호 결정 부분을 파기·환송하고, 나머지 부분에 대해 상고기각하는 판결을 선고하였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가. 13호 부분 : 망인이 자신이 운영하던 잡지 ‘조광’에 일제의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내선일체를 강조하는 문예물과 논문을 게재하고, ‘임전대책협력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하여 직접 전쟁협력을 선전하며 전시채권을 가두에서 판매한 행위는 문화기관이나 단체를 통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내선융화 또는 황민화운동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것으로 봄이 타당하다. 따라서 13호 결정 부분은 적법하다. 나. 14호 부분 : 비록 망인이 조선항공공업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그 주식 1%를 보유하면서 감사역으로 선임되었다 하더라도, 조선항공공업을 ‘운영’하였다고 보기에는 충분하지 아니하다. 따라서 원심은 제14호에서 정한 군수품 제조업체의 ‘운영’에 관한 법리를 오해하였다. 다. 17호 부분 : 상고이유서를 제출기간 내에 제출하지 않아 상고기각함 Ⅱ. 친일파 청산 역사 1. 친일파의 활약 우리 역사에서 친일파란? 일본의 침략 및 강점 시기에 한국인으로서 일제의 침략과 통치에 적극 협력하여 우리 민족에게 중대한 해악을 끼친 자들, 즉 ‘민족 반역자 집단’을 의미한다. 조선 멸망 당시 일진회,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구적(이완용·윤덕영·민병석·고영희·박제순·조중응·이병무·조민희·이재면), 병합 시 일제로부터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황족 3명(공족)과 조선 귀족들 68명(후작·백작·자작·남작) 등이 대표적이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으로 일본 제국의회 의원이 된 자는 박영효 등 총11명이 있었다. 중추원 부의장이던 이완용, 박영효, 이진호, 박중양을 비롯하여 중추원 고문 또는 참의로 활동한 자들이 대략 305명가량 된다. 조선총독부 국장에 오른 한국인은 2명(이진호와 엄창섭)이었다. 군인으로 중장까지 오른 이병무, 조동윤, 조성근, 홍사익 등을 비롯하여 일본군 장교가 된 자들이 다수 있었다. 해방 때까지 한국인이 오른 일본 경찰 최고위직인 경시에 올랐던 인물은 21명뿐인데, 그중 해방 당시 경시로 재직하던 인물은 8명으로 알려졌다. 일제하 부장판사까지 올랐던 한국인은 2명(조진만, 김준평)이었다. 그 외 친일파 기업인과 예술가를 비롯하여 밀정 등으로 친일의 주구가 된 자들이 많았다. 2. 친일파 청산의 좌절 1948년 9월 제헌 국회는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 처벌법’(반민법)을 제정하였고, ‘반민족행위 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 악질 기업가였던 박흥식의 체포를 시작으로 밀정이었던 이종형을 비롯하여 최린, 박중양, 김연수 등을 체포하였다. 그해 2월에는 최남선과 이광수, 배정자 등을, 3월에는 엄창섭 등을 각 체포하였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1949년 1월 일제 고등계 경시 출신인 서울시경 수사과장 노덕술을 체포하자, 대통령 이승만이 노덕술의 석방을 종용하는 등 이승만 정부는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한다는 명분 아래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하였다. 1949년 3~8월에는 남북통일 협상 등 북한의 주장과 비슷한 주장을 했다는 이유로 사건을 조작하여 국회 부의장 김약수 등 반민법을 주도한 총 13명의 소장파 국회의원을 구속하는 사건이 일어났다(국회 프락치 조작 사건). 1949년 6월에 친일 경찰인 서울시경 사찰과장 최운하를 체포하자, 그달 6일 내무부차관 장경근의 지휘로 경찰들이 반민특위 사무실을 습격하여 특별경찰대를 무장해제시키고 강제연행하였다(6·6 사건). 그해 7월에는 공소시효를 ‘1950년 6월 20일에서 1949년 8월 31일까지’로 단축하는 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이 사임한 뒤 이인이 위원장에 임명되어 강제해산에 앞장섰다. 이어 10월에는 반민특위와 특별검찰부·특별재판부를 모두 해체했다. 1951년 2월에는 반민법 폐지법률이 공포되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31일까지 총 221명을 기소하였다. 하지만 광복 후 한국군의 상층부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장교 출신들을 전혀 조사하지 못하였다. 재판에서도 대부분 무죄 또는 집행유예로 풀려났고, 유죄판결을 받은 자들도 형이 면제됨으로써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1949년 6월 6일에 반민특위를 무장해제시키고, 그달 26일에 김구를 암살하면서 이때 이미 친일파들은 자신들을 위협하는 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으로 보인다. 3. 노무현 정부의 친일 청산 해방 후에도 친일파들은 이승만과 미군정의 후원으로 인적청산을 피할 수 있었고, ‘반공주의’를 면죄부로 이용하면서 군대·경찰 등 권력기관을 비롯하여 교육·문화 분야에까지 실권자가 되었다. 봉천·신경 군관학교 등을 졸업하고 만주에서 활약했던 친일파들은 1961년 5·16 쿠데타의 주도세력으로 등장한 후 박정희의 도움으로 대부분 고위직에 올랐다. 유신체제가 한창인 1973년부터 1978년까지는 행정부(박정희), 입법부(정일권), 사법부(민복기) 등 3부 수장 모두 친일파가 차지하는 상황이 되었다(자세한 내용은 졸고, ‘방응모 사건의 법률적·역사적 고찰’, 법원 코트넷 지식광장, 2017. 4. 게시 등 참조). 친일파 청산이 전혀 이루어지지 못하던 중 2004년 3월 22일 반민족규명법이 제정되었다. 2005년 5월 발족한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11월까지 총 1005명의 친일 반민족 행위자 명단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법률이 정한 엄격한 요건을 충족한 ‘특A급 친일파’로 분류된다. 한편 민간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는 2009년 11월에 ‘A급 친일파’ 4776명의 목록을 정리한 ‘친일 인명사전’을 출간하였다. 2005년 12월 29일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 재산의 국가귀속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개혁입법은 훼손된 민족정기와 사회 정의를 회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발판을 마련하는 작업이었다. Ⅲ. 대상 판결의 평가 방응모 재판은, 그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 등을 고려하면 친일파 단죄 등에 있어서 법률적·역사적 의미가 매우 크다. 비교적 간단한 쟁점임에도 대법원의 재판 기간만 4년 이상 걸려 신속의 이념에 반하는 흠은 있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적정해 보인다. 하급심 법원의 법률 해석 및 판단에 있어서 다소 혼선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① 국회에서 법률 요건을 간단명료하게 입법하지 않고, ‘적극 주도’, ‘적극 협력’ 등 불명확한 용어를 사용하여 친일 반민족행위의 요건들을 추가하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법률 요건에 대해 법원은 엄격하게 해석하지 않을 수 없는 점, ② 법에서 정한 친일 반민족행위에 해당하려면 반민족행위의 내용과 방법이 상당한 정도로 증명되어야 하는데, 진상규명위원회의 활동기간이 이미 만료되어 소송수행 과정이 부실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③ 친일파 잔재를 청산하려는 사람과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 자들 사이의 적당한 타협으로 인한 입법상의 한계도 있어 보이는 점, ④ 그 외 판사 개개인의 지식·경험·가치관 차이 등 사정 때문으로 보인다. 다만 제17호 부분에 있어서 “방응모가 오랫동안 국민총력 조선연맹 등 단체의 간부 지위에 있었음을 인정하면서도, 간부로서 일제의 식민통치 및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하였다고 인정하기에 부족하고, 구체적인 협력행위에 관한 아무런 자료가 없다”고 판시한 제2심판결에 대하여 피고가 상고하였는데도, 상고이유서를 제때 제출하지 않아 대법원의 판단도 받아보지 못한 채 상고기각된 점은 큰 아쉬움을 남긴다. 동아일보 사장이었던 김성수의 경우, ‘제11호 및 제17호의 친일 반민족행위에도 해당한다’고 본 대법원 2017. 4. 13. 선고 2016두346 판결과 비교해보면 더욱 그러하다. 피고 소송수행자인 행정자치부 공무원들의 불성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된 지 70년이 넘었다. 선대의 친일 행위를 자손들이라도 먼저 사죄하고 반성한다면, 국민들이 용서하지 않을 리 없다. 그런데 반성은 않고 거짓으로 변명한다면, 국민들의 용서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법적인 단죄를 피했다고 해서 자만하기보다는, 뼈저리게 반성하면서 국민과 나라를 위해 희생·봉사하는 것이 속죄하는 방법일 것이다. 아직도 못다 한 친일파 청산은 훼손된 민족정기와 가치관을 바로 세우는 일이다. 허용구 부장판사(대구지법)
방응모
반민족행위
친일파
허용구 부장판사 (대구지법)
2017-09-18
상표권 침해소송에서 등록무효사유에 대한 심리 판단
Ⅰ. 사실의 개요(법률신문 2012년 10월 25일 5면 보도) 1) 원고와 피고는 동일한 상호를 사용하는 서로 다른 법인이다. `원고는 2006.10.부터 2008.5. 사이에 건축용 비금속제 문틀/창틀/천정판 등과 그 상품들의 판매대행/알선업 등에 대하여 , , 와 같은 상표/서비스표를 등록받았다. 2) 소외 김○○는 1994.4.에 Hi-Wood가 작게 표시되어 포함된 상표를 창문틀, 천정판 등에 대하여 등록받았다. 피고는 2004.3.에 김○○으로부터 영업권과 상표권을 양수하였고(상표권은 그 직후에 관리소홀로 소멸함), , 등의 상표를 원고의 지정상품과 동일·유사한 상품에 사용하였다. Ⅱ. 판결의 요지 상고 기각. 상표법의 목적과 재산권의 행사에 관한 정의와 공평의 이념에 비추어 볼 때, 등록상표에 대한 등록무효심결이 확정되기 전이라고 하더라도 그 상표등록이 무효심판에 의하여 무효로 될 것임이 명백한 경우에는 그 상표권에 기초한 침해금지 또는 손해배상 등의 청구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권리남용에 해당하여 허용되지 아니하며, 상표권침해소송을 담당하는 법원으로서도 상표권자의 그러한 청구가 권리남용에 해당한다는 항변이 있는 경우 그 당부를 살피기 위한 전제로서 상표등록의 무효 여부에 대하여 심리·판단할 수 있다. Ⅲ. 해설 1. 학설 및 판례 가. 우리나라 특허법의 경우 행정행위의 공정력 이론이나 특허청과 법원의 권한분배론 등에 입각하여 대법원은 특허권 또는 상표권 침해소송을 담당하는 법원이 그 전제로서 당해 특허 또는 상표등록의 무효에 대하여 심리 판단할 수 없다는 원칙을 고수해 왔다. 그러나 이 원칙을 그대로 따르면 침해소송에서 침해 여부가 다투어지고 있는 당해 특허에 무효사유가 있음이 인정됨에도 불구하고 법원이 침해행위의 금지와 손해배상 등을 명하여야 하는 불합리가 발생하게 되어 소송경제와 구체적 타당성에 반하게 되고, 판결 후에 특허가 무효로 확정되면 그 판결은 재심사유로 된다. 따라서 대법원은 기존의 판례에 반하지 않으면서도 구체적 타당성을 꾀하기 위하여 특허발명의 보호범위에서 공지기술을 제외하거나 확인대상발명이 자유실시기술이라는 이유로 침해를 부정하는 방법을 취해 왔고, 최근에는 침해사건 담당 법원이 권리남용의 항변의 당부를 판단하기 위하여 특허발명의 진보성 여부까지 심리·판단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대법원 2012. 1. 19. 선고 2010다95390 전원합의체 판결). 나. 일본 특허법과 상표법의 경우 상기 전원합의체 판결은 일본 최고재판소의 소위 킬비 사건의 판결(최고재판소 2000. 4. 11. 제3소법정 판결)을 따른 것이다. 일본은 킬비 판결 이후에 특허법 제104조의3을 신설하여 "특허권 또는 전용실시권의 침해에 관한 소송에서 당해 특허가 특허무효심판에 의해 무효로 될 것으로 인정되는 때에는 특허권자 또는 전용실시권자는 상대방에게 그 권리를 행사할 수 없다"고 규정하였고, 이 규정을 일본 상표법 제39조가 준용하고 있다. 상표법의 영역에서 권리남용을 들어 상표권의 행사를 부정한 것은 대부분 타인이 선취득한 권리 또는 선사용한 상표에 대하여 상표권을 행사하였거나, 부정한 목적으로 불사용 상표를 양수하여 상표권을 행사한 경우, 금반언에 반하는 행위를 한 경우 등에 그치고, 등록상표가 식별력 흠결을 이유로 등록무효로 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상표권의 행사를 권리남용이라고 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 우리나라 상표법의 경우 대법원이 상표법의 영역에서 처음으로 권리남용이론을 적용한 것은 1993. 1. 19. 선고 92도2054 판결(소위 사임당가구 사건)에서 이다. 그 후로 대법원은 K2 사건(2008. 9. 11.자 2007마1569결정), 헬로키티 사건(2001. 4. 10. 선고 2000다4487 판결), 캠브리지멤버스 사건(2007. 6. 14. 선고 2006도8958 판결), 비제바노 사건(2000. 5. 12. 선고 98다49142 판결) 등에서, 타인의 선사용 유명상표가 미등록임을 기화로 모방상표를 등록한 자가 자기의 등록상표를 사용하는 행위에 대하여 그것은 상표법을 악용하거나 남용한 것이 되어 적법한 권리의 행사라고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또한 대법원은 진한커피 사건(2007. 1. 25. 선고 2005다67223 판결), 에이씨엠파이워터 사건(2007. 2. 22. 선고 2005다39099 판결), 스타스위트 사건(2008. 7. 24. 선고 2006다40461, 40478 판결) 등에서, 타인의 미등록 유명상표를 모방한 상표를 등록받은 자가 그 타인이나 그 타인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상표를 사용하는 자에게 상표권을 행사하는 것은 권리남용으로 허용될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 이처럼 대법원은 주로 모방상표등록에 한하여 상표권의 효력을 부정하여 왔으며, 최근에는 후등록 상표권에 대하여 선등록 상표권자가 무효심판을 청구한 경우에 있어서 그 무효심결 확정 전이라도 후등록 상표권자에 의한 상표의 사용에 대하여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하거나(2009. 6. 11. 선고 2007다65139 판결), 형사상 상표권 침해죄를 인정한 사례가 있다(2012.4.12. 선고 2011도4037 판결). 2. 이 사건 판결의 타당성 여부 대상판결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어 그 적용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 대상판결은 상표등록이 무효로 될 것임이 '인정'될 것을 넘어 '명백'하여야 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이것은 행정행위의 공정력 및 특허법원과 일반법원의 결론이 달라질 수 있는 문제를 고려한 것으로 생각된다. 실무상 명백성의 판단이 쉽지 않고, 하자가 중대하고 명백하여 당연무효로 되는 것과의 구별도 쉽지 않으므로 이 요건이 불필요하다는 견해가 있지만( 박정희, '특허침해소송 등에서의 당해 특허의 무효사유에 대한 심리판단', 특허판례연구(개정판), 523면), 현 상황에서 명백성의 요건을 폐기하기 보다는 어떤 경우가 명백한 것인지 구체적인 판단요소(factor)를 제시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둘째, 명백성의 요건에 비추어 볼 때, 대상판결이 이 사건 등록상표/서비스표가 무효사유가 있음이 명백하다고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면이 있다. '하이우드'는 상품의 특성을 직감하게 하기 보다는 암시하는 정도의 상표라고 볼 여지가 있고, 상품류구분 제19류에는 건축용 재료/자재에 대하여 '하이샤시', '하이도어', '하이멘트', '하이패널시스템', '하이텍스' 등의 상표가 다수 등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이 사건 등록상표/서비스표가 '고급 목재, 좋은 목재' 등의 의미로 직감되어 그 등록이 무효로 될 것임이 '명백하다'고 판단한 것은 명백성 요건에 비추어 의문이다. 오히려 피고의 상표가 상표법 제51조 제1항 제2호의 상표권의 효력이 미치지 아니하는 범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여 원고의 상표권의 행사를 부정하는 것이 간명하지 않았을까? 셋째, 대상판결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권리남용에 해당한다고 하였는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하지 아니하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킬비 판결에서 정정심판이 청구되어 있는 경우를 예로 들었지만, 상표 분야에서는 그 의미를 상정하기가 쉽지 않다. 넷째, 선사용 유명상표의 모방상표에 대해서는 권리남용의 항변을 인정할 여지가 있지만 모방상표와 관련이 없는 선원의 존재, 조약위반, 공익적 부등록사유 등의 무효사유가 있는 상표등록에 대해서는 그러한 무효사유 해당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상표권의 행사를 권리남용이라고 보는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Ⅳ. 결론 대상판결은 특허법에서의 대법원 2012. 1. 19. 선고 2010다95390 전원합의체 판결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서, 등록무효사유가 명백한 상표권의 행사에 대해서 권리남용의 법리를 확대하고 그 기준을 제시한 점에서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러나 ⅰ)상표등록 무효사유는 해당성 여부가 명백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점, ⅱ)대부분은 상표법 제51조 제1항(상표권의 효력이 미치지 아니하는 범위)을 적용하거나 또는 상표적 사용의 법리, 불사용 등록상표의 권리행사 제한의 법리 등을 적용하여 구체적 타당성을 도모할 수 있다는 점, ⅲ)권리남용이론은 일반조항에 기초한 법리로 성문법체계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그 적용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점, ⅳ)우리나라는 심판전치주의를 취하고 있고, 심결취소소송과 침해소송의 관할을 달리하고 있다는 점, ⅴ)특허와 달리 상표는 선택의 문제이므로 타인은 계쟁상표와 다른 상표를 선택할 수 있어 상표권의 행사를 부정할 논리필연성이 특허만큼 크지 않다는 점, ⅵ) 2010다95390 판결과 달리 대상판결은 무효사유에 제한을 두고 있지 않다는 점, ⅶ)권리남용은 추상적이고 주관적 판단의 영역이므로 당사자가 쉽게 수긍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상표법의 영역에서 권리남용이론의 확대 적용에는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유명상표의 모방상표등록과 같은 경우에 한하여 권리남용을 인정하는 것으로 하되, 굳이 대상판결과 같이 상표등록에 무효사유가 있음이 명백하다는 이유를 들어 그 권리행사를 부정하고자 한다면 권리남용이론에 의할 것이 아니라 일본 특허법 제104조의3과 같이 '무효의 항변'을 입법화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며, 그 경우에는 상표권 침해소송의 항소심 관할을 특허법원으로 집중하는 조치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일반법원의 심리능력이 강화되고, 상표권 침해소송의 항소심 관할이 집중되면 명백성의 요건을 폐기하는 것도 검토할 여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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