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5만달러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한명숙 전 국무총리에 대해 1심 재판부가 무죄를 선고했다. 유일한 직접증거인 곽 전 사장의 뇌물공여 진술이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신빙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검찰은 이에대해 즉각 항소할 뜻을 밝혀 이 사건에 대한 최종판단은 상급법원의 판단에 따르게 됐다.
재판부의 선고를 방청석에서 지켜보던 한 전 총리의 지지자와 야권 인사들은 재판부의 판결선고 이후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하지만, 보수단체 회원들은 "재판부는 반성하라"며 소동을 벌여 이번 재판을 둘러싼 공방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을 예고했다.
◇ 재판부, "곽씨 진술 신빙성 없다"=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형두 부장판사)는 이날 311호 법정에서 열린 선고공판에서 한 전 총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2009고합1500).
재판부는 선고에서 이번 사건의 쟁점을 △곽 전 사장이 문제의 총리공관오찬에서 5만달러를 건네주었는지 여부 △공기업 사장취임에 관한 청탁 및 한 전 총리의 지원 여부 △5만달러 수수사실이 인정된다면 청탁에 따른 대가관계인지 여부 △5만달러가 공기업 사장 인선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주는 것을 알면서도 돈을 받았는지 여부 등 4가지로 정리했다.
재판부는 우선 첫번째 쟁점인 5만달러 수수사실과 관련해 이 사건의 유일한 직접증거인 곽 전 사장의 진술이 신빙성이 있느냐는 점에 초점을 뒀다.
재판부는 "형사소송법 제307조2항은 '범죄사실의 인정은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에 이르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금원수수 여부가 쟁점이 된 사건에서 금원수수자로 지목된 피고인이 수수사실을 부인하고 있고 이를 뒷받침할 금융자료 등 객관적 물증이 없는 경우 금원을 제공했다는 사람의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하기 위한 기준을 제시한 대법원판례(▼하단관련기사·법률신문 2010년4월5일자 3면 참조)는 금원 제공자의 진술이 증거능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 합리적인 의심을 배제할 만한 신빙성이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또 "신빙성 유무를 판단할 때는 진술내용 자체의 합리성, 객관적 상당성, 전후의 일관성 뿐만 아니라 그의 인간됨, 그 진술로 얻게 되는 이해관계 유무 등을 아울러 살펴야 하며 특히 그에게 어떤 범죄혐의가 있고 그 혐의에 대해 수사가 개시될 가능성이 있거나 수사가 진행중인 때에는 이를 이용한 협박이나 회유 등의 의심이 있어 그 진술의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정도까지 이르지 않는 경우에도 그로 인한 궁박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진술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여부 등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어 "이 사건의 유일한 직접증거인 피고인 곽씨의 뇌물공여진술은 전후의 일관성이나 임의성, 합리성, 객관적 상당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법정증언 등을 볼 때 자신의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본인의 기억과 다른 진술을 쉽게 할 수 있는 성격임이 드러나고 있다"며 "특히 업무상 횡령 혐의로 기소돼 있고 구 증권거래법위반 혐의로 내사를 받았으며, 건강악화로 극도의 공포를 느낀 점 등을 고려할 때 곽씨가 자신의 궁박한 처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하나로 이 사건 뇌물공여부분에 대해 검사에게 협조적인 진술을 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어 곽씨진술의 신빙성이나 진정성에 의심스러운 점이 상당하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다른 쟁점의 전제조건인 5만달러 수수사실 자체를 인정하기 어렵고 달리 이를 인정할 증거도 없어 나머지 쟁점에 대해서는 살펴 볼 필요없이 범죄사실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결론냈다.
한편 재판부는 뇌물공여 및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혐의로 기소된 곽 전 사장에게는 뇌물공여와 전체 횡령액 55만달러 중 5만달러 횡령혐의는 무죄로, 나머지 50만달러 횡령혐의는 유죄로 판단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 검찰 "항소하겠다", 또다른 뇌관 H사 9억여원 수수 수사로 불씨 이어가= 검찰은 재판부가 한 전 총리에게 무죄판결을 하자 이날 "즉각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검찰은 앞서 선고 하루 전인 8일 경기도 고양에 위치한 건설업체 H사 본사와 자회사, 이들 회사의 회계감사를 담당했던 회계법인 등에 대해 전격 압수수색을 실시하며 불씨를 이어갔다. H사는 한 전 총리에게 9억여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건넸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공판과정에서 새로운 제보가 들어와 확인하는 것"이라며 "기존 뇌물사건과는 무관한 것으로 선고결과에 상관없이 수사할 방침"이라고 밝혔었다.
한편 이날 선고공판이 열린 서울중앙지법에는 야당 인사들과 한 전 총리 지지자, 시민단체, 보수단체회원, 취재진 등 수백여명이 몰려 경찰 2개중대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법원주변에 배치됐으며, 법정에도 250여명의 방청객이 몰려 15명이 넘는 경비인력이 법정내에 투입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