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가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자신의 행동을 기억 못하는, 이른바 '필름'이 끊긴 상태였다고 해도 이를 준강간죄의 요건인 '심신상실 상태'로 볼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객관적인 증거에 비춰 성관계 당시 피해자에게 의식이 있었다고 볼 여지가 있다면 술이 깬 뒤 그 때 상황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당시 심신상실 상태에 빠져있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이번 판결이 대법원에서 확정되면 그동안 애매해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준강간죄의 판단 기준이 한층 명확해질 전망이다.
노래방 종업원 A씨는 지난해 1월 밤 10시경 서울 강남에서 행인들에게 노래방 전단지를 나눠주다 만취한 여성 B씨 등 2명을 만났다. 당시 B씨는 친구와 둘이서 소주 6병을 나눠 마신 상태였다. 이들은 A씨와 함께 또 다시 술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1시간 가량 함께 어울렸다. 이후 A씨와 B씨 단 둘만 모텔로 갔다. B씨는 걷다가 구토를 하거나 비틀거렸고 모텔 입구 바닥에 주저 앉기도 했다. 모텔에서 이들은 한차례 성관계를 맺었고, 이후 또 한차례 관계를 하려다 술이 깬 B씨의 완강한 거부로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B씨는 A씨를 준강간 및 강간미수 혐의로 고소했다. B씨는 재판에서 '소주를 다섯병째 시킨 것까지는 기억하는데, 술집에서 나와 노래방에 갔다가 모텔까지 가게 된 일이나 모텔에서 성관계를 가진 일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물이 든 욕조에 옷을 벗은 채 누워있었고 옆에 A씨가 옷을 벗고 있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했다.
1심은 'A씨는 만취한 B씨의 항거불능 또는 심신상실 상태를 이용해 B씨를 간음했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판단은 달랐다.
서울고법 형사11부(재판장 김종근 부장판사)는 준강간 및 강간미수 혐의로 기소 된 A씨에 대한 항소심(2014노3517)에서 징역 3년을 선고한 원심을 파기하고 지난달 30일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가 만취해 피해 당시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피고인이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피해자를 간음했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또 '피해자는 의식이 있을 때 한 일을 나중에 기억하지 못하는 일시적 기억상실증인 '블랙아웃(black out)' 증상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블랙아웃이란 알코올이 뇌의 활동을 방해해 정보의 입력과 해석 등에 악영향을 주지만, 뇌의 다른 부분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 현상을 말한다. 재판부는 A씨가 성인 남성 무릎 높이가 넘는 욕조를 넘어가 B씨를 눕히는 일이 쉽지 않고, 만취한 상태의 B씨를 침대에서 간음한 뒤 굳이 욕조로 데리고 들어갈 마땅한 이유도 없다고 봤다. 또 B씨가 스스로 욕조 안으로 걸어 들어갔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고 판단했다. A씨는 B씨가 스스로 모텔 객실로 걸어들어가는 CCTV 장면 등도 무죄 근거로 제시했다. 재판부는 '피해자가 이같이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행동도 기억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피해자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성관계에 응했다는 피고인의 주장이 거짓이라고 단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