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가 의뢰인에게 법률자문을 한 내용을 적은 '법률의견서'는 형사소송법상 전문증거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따라서 법률의견서를 의뢰인에 대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작성자인 변호사가 법정에 직접 출석해 법률의견서가 진정하게 작성됐다는 점을 진술해야 하고, 변호사가 법정에 출석했더라도 정당하게 증언 거부권을 행사해 진술하지 않으면 그 법률의견서를 증거로 할 수 없다.
전문증거란 피해자의 법정 진술이 아닌 진술조서나 다른 사람의 증언을 말한다. 형사소송법은 피고인의 방어권 보장을 위해 원칙적으로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형소법 제314조는 '공판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진술을 요하는 자가 사망·질병·외국거주·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해 진술할 수 없는 때에는 그 조서 및 그 밖의 서류를 증거로 할 수 있다'고 규정, 예외적으로 증거능력을 인정한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17일 주택재개발사업 수주를 목적으로 회사에 우호적인 재개발 조합장을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 비용을 불법 지원한 혐의(건설산업기본법 위반)로 기소된 S물산 영업본부장 박모(57)씨 등 5명에 대한 상고심(2009도6788)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검찰이 압수한 디지털 저장 매체에서 출력해 유죄의 증거로 제출한 이 사건의 법률의견서는 S사가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받은 내용으로, 그 실질은 형사소송법 제313조 1항에 규정된 '피고인 아닌 자가 작성한 진술서나 그 진술을 기재한 서류(전문증거)'에 해당한다"며 "공판 준비 또는 공판기일에 그 작성자 또는 진술자인 변호사의 진술에 의해 성립의 진정함이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이 사건 법률의견서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예외적인 경우 전문증거의 증거능력을 인정한)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문언과 개정 취지, 증언거부권 관련 규정의 내용 등에 비춰 보면, 법정에 출석한 증인이 형사소송법 제148조와 149조 등에서 정한 바에 따라 정당하게 증언거부권을 행사해 증언을 거부한 경우는 형사소송법 제314조의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하여 진술할 수 없는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증언거부권 행사가 형사소송법 제314조에서 정한 예외적인 전문증거의 증거능력 인정사유가 아니라고 판단한 첫 사례다.
하지만 안대희 대법관은 "증명을 요하는 사실을 체험한 내용과 관계없이 단지 자기의 의견을 표명하는 것에 불과한 서면은 전문증거라고 볼 수 없다"며 "법률의견서는 S사의 자문의뢰에 따라 변호사가 밝힌 법적 의견을 내용으로 하는 서면으로 이를 전문증거로 보고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설령 법률의견서를 전문증거로 보더라도 형소법 제314조의 '진술을 요하는 자가 사망·질병·외국거주·소재불명, 그 밖에 이에 준하는 사유로 인해 진술할 수 없는 때'에는 원 진술자나 서류 작성자가 법정에 출석해 증언거부권을 행사한 경우도 포함되므로 이 사건 법률의견서는 증거능력이 인정될 수 있다"는 반대의견을 냈다.
검찰은 2004년 S사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S사가 변호사에게 법률자문을 받은 내용이 담긴 법률의견서를 확보해 유죄의 증거로 제출했다. 당시 검찰은 법률 의견서에 S사가 조합장 선거비용 지원을 사실상 시인하는 내용이 있어 공소사실을 입증할 유력한 증거가 된다고 주장했지만, 1·2심은 "법률의견서는 증거능력이 없어 증거로 사용할 수 없고, 나머지 증거만으로는 공소사실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윤성식 대법원 공보관은 "직접 심리주의와 공판중심주의의 취지를 반영해 형사재판에서 원본증거가 아닌 전문증거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고, 증거법 측면에서 정당한 증언거부권의 행사를 보장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의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신동운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이번 판결은 결과적으로 단순히 형소법상 전문증거능력에 관한 의미를 넘어 영미법상에서 인정되지만 우리 법상에서는 명문 규정이 없는 '변호인과 의뢰인 사이에서 비밀리에 이뤄진 의사 교환에 대해 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특권(Attorney-Client Privilege)'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의뢰인이 변호인을 신뢰하고 자문을 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 우리 형사사법체계에 이정표가 될만한 판결"이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