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차 판매 사기단을 '범죄단체'로는 볼 수 없지만 이들이 '범죄집단'에는 해당한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다수가 특정범행을 수행한다는 공동의 목적 아래 구성원들끼리 정해진 역할분담에 따라 범행을 반복적으로 실행했다면 '범죄를 목적으로 한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취지다. 이번 대법원 판결은 형법 제114조에 '범죄단체'외에 '범죄집단'이라는 구성요건이 추가된 이후 관련 법리를 최초로 설시한 판결로, 범죄집단 혐의로 기소된 '박사방' 조주빈 일당에도 적용될 것으로 보인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김선수 대법관)는 범죄단체 조직·가입·활동 및 사기 등의 혐의로 기소된 전모씨 등 22명에게 징역 1년 4개월 등을 선고한 원심 가운데 이모씨 1명을 제외한 21명에 대한 원심 판결을 파기하고 사건을 인천지법으로 돌려보냈다(2019도16263).
전씨 등은 인천 시내에 외부 사무실을 차려 중고차 판매 조직을 운영했다. 이들은 인터넷에 허위 매물이나 미끼 매물을 올려 피해자들을 유인한 뒤, 중고차매매단지로 피해자들을 데리고 가 비싼 중고차를 사게 해 중간에서 차익금을 챙겼다. 또 인터넷 광고를 보고 중고차를 사기 위해 인천을 찾은 피해자 가운데에는 계약서를 쓴 뒤 전씨 일당으로부터 차량에 심각한 문제가 있다거나 추가로 납부할 돈이 있다는 말을 뒤늦게 듣고 기존 계약을 포기하고 더 비싼 차량을 어쩔 수 없이 구매하기도 했다. 이같은 수법을 업계에서는 이른바 '뜯고 플레이(뜯플)', '쌩 플레이(쌩플)'이라고 부른다.
검찰은 이들이 조직적으로 역할을 분담해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형법 제114조가 규정하고 있는 범죄단체 등의 조직·가입·활동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형법 제114조는 '사형, 무기 또는 장기 4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 또는 집단을 조직하거나 이에 가입 또는 그 구성원으로 활동한 사람은 그 목적한 죄에 정한 형으로 처벌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013년 형법 제114조가 개정되면서 '범죄단체'에 이르지 못한 조직도 해당 죄에 포섭할 수 있도록 '범죄집단'이 포함됐다.
특정범행 수행 공동의 목적 아래 정해진 역할 따라
반복적 범행 실행은 범죄를 목적으로 한 집단 해당
재판에서는 전씨 등이 외부 사무실 등에서 활동한 중고차 판매조직을 형법상 '범죄단체' 또는 '범죄집단'으로 볼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검찰은 1심에서 이들 조직이 '범죄단체'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1심은 이들의 사기 혐의 등은 인정했지만, 이들 판매조직을 '범죄단체'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1심은 "외부 사무실은 회사 조직과 유사하게 대표, 팀장, 팀원으로 직책이나 역할이 분담되어 있기는 하지만 구성원들은 상호간의 친분관계를 바탕으로 개별 팀으로 결성된 것으로 보인다”며 "팀별 이동도 비교적 유연하게 이루어져 있었으며 대표를 중심으로 하는 체계적 조직 내지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면서 전씨에게는 징역 1년 4개월을, 나머지 조직원들에게는 징역형에 집행유예 등을 선고했다.
그러자 검찰은 항소심에서 주위적 공소사실은 1심과 같이 '범죄단체'로 적시했지만, 예비적으로 이들이 '범죄집단'에 해당할 수 있다고 추가했다.
기존 대법원 판례는 '범죄단체'는 '특정다수인이 일정한 범죄를 수행한다는 공동목적 아래 이루어진 계속적인 결합체로서 그 단체를 주도하는 최소한의 통솔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요구하지만, '범죄집단'은 '범죄단체와 달리 다수의 결합이 반드시 계속적일 필요 없이 다수자가 동시에 동일 장소에 모이고, 최소한의 통솔체계가 없더라도 일정한 체계 내지 구조를 갖고 있으면 성립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2심은 검찰의 '범죄집단'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2심은 "전씨 등이 외부 사무실을 중심으로 일을 했더라도 합동범이나 공동정범을 넘어 조직을 구성하는 일정한 체계 내지 구조를 갖추지 못했기에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판시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대법원은 이들이 '범죄단체'에는 해당하지 않지만, '범죄집단'에는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범죄집단'은 '범죄단체'에서 요구되는 '최소한의 통솔체계'를 갖출 필요는 없지만, 범죄의 계획과 실행을 용이하게 할 정도의 조직적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며 "외부 사무실에 근무한 직원들의 수, 직책 및 역할 분담, 범행수법, 수익분배 구조 등에 비추어 보면 외부 사무실은 특정 다수인이 사기범행을 수행한다는 공동목적 아래 구성원들이 대표, 팀장, 출동조, 전화상담원 등 정해진 역할분담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사기범행을 반복적으로 실행하는 체계를 갖춘 결합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이는 형법이 정한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집단'에 해당한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2013년 형법 114조에 '범죄집단'이 추가된 이후 이 법리를 적용해 유죄 취지로 판결한 첫 사례"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