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실관계
주식회사 유성경금속은 1993.7.15. 약속어음 5매(액면 합계 금 220,000,000원)를 박재헌에게 발행하였다. 박재헌은 이를 윤진호(피고)에게 배서·양도하였는데, 피고는 그 중 4매를 박상근(원심공동피고)에게, 나머지 1매를 서석재(원고)에게 배서·양도하였다. 박상근은 다시 4매의 어음을 원고에게 배서·양도하였다. 원고가 이러한 어음의 최종소지인으로 발행지 기재를 보충하지 아니한 채 1993.10.30. 지급장소에 지급제시하였으나 무거래를 이유로 지급거절되었다.
2. 쟁 점
어음의 발행지를 보충하지 아니한 채 지급제시한 경우 그 지급제시가 부적법하여 배서인에 대한 소구권을 상실하는가 하는 점이 쟁점이다.
3. 법원의 판단
1) 판결내용
『어음의 발행지란 실제로 발행행위를 한 장소가 아니라 어음상의 효과를 발생시킬 것을 의욕하는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서, 어음의 발행지에 관련된 어음법 제37조, 제77조 제1항 제2호, 제41조 제4항, 제77조 제1항 제3호, 제76조 제3항 등과 섭외사법의 관련규정 들을 살펴보면, 어음에 있어서의 발행지의 기재는 발행지와 지급지가 국토를 달리하거나 세력(歲曆)을 달리하는 어음 기타 국제어음에 있어서는 어음행위의 중요한 해석기준의 되는 것이지만, 국내에서 발행되고 지급되는 이른바 국내어음에 있어서는 어음행위의 중요한 해석기준이 되는 것이지만, 국내에서 발행되고 지급되는 이른바 국내어음에 있어서는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국내어음이란 국내에서 발행되고 지급되는 어음을 말하는 것이므로 국내어음인지여부는 어음면상의 발행지와 지급지가 국내인지여부에 따라 결정될 것이지만, 어음면상에 발행지의 기재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 어음면에 기재된 지급지와 지급장소, 발행인과 수취인, 지급할 어음금액을 표시하는 화폐, 어음문구를 표기한 문자, 어음교환소의 명칭 등에 의하여 그 어음이 국내에서 어음상의 효과를 발생시키기 위하여 발행된 것으로 여겨지는 경우에는 발행지를 백지로 발행한 것인지 여부에 불구하고 국내어음으로 추단할 수 있다고 할 것이다.
한편 일반의 어음거래에 있어서 발행지가 기재되지 아니한 국내어음도 어음요건을 갖춘 완전한 어음과 마찬가지로 당사자간에 발행·양도 등의 유통이 널리 이루어지고 있으며, 어음교환소와 은행 등을 통한 결제과정에서도 발행지의 기재가 없다는 이유로 지급거절됨이 없이 발행지가 기재된 어음과 마찬가지로 취급되고 있음은 관행에 이른 정도이고, 나아가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보아 발행지의 기재가 없는 어음의 유통에 관여한 당사자들은 완전한 어음에 의한 것과 같은 유효한 어음행위를 하려고 하였던 것으로 봄이 상당하다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음면의 기재 자체로 보아 국내어음으로 인정되는 경우에 있어서는, 발행지의 기재는 별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고, 발행지의 기재가 없는 어음도 완전한 어음과 마찬가지로 유통. 결제되고 있는 거래의 실정 등에 비추어, 그 어음면상 발행지의 기재가 없는 경우라고 할지라도 이를 무효의 어음으로 볼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
『이 사건 각 약속어음은 국내 금융기관인 부산은행이 교부한 용지에 의하여 작성된 것으로, 지급지는 양산군, 지급장소는 부산은행 양산지점으로 되어 있으며, 그 발행인과 수취인은 국내의 법인과 자연인이고, 어음금액은 원화로 표시되어 있으며, 어음문구 등 어음면상의 문자가 국한문 혼용으로 표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어음 표면 우측 상단에 어음용지를 교부한 은행점포를 관할하는 어음교환소명으로 「부산」이라 기재되어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볼 때, 이 사건 각 약속어음은 국내에서 발행되고 지급되는 국내어음임이 명백하고, 따라서 그 어음면상 발행지의 기재가 없다고 하여 이를 무효의 어음으로 볼 수 없다고 할 것이므로, 위 각 어음에 대한 지급제시가 비록 발행지의 기재없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는 적법하게 지급제시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이 판결에 대하여는 이돈희, 신성택, 이용훈 대법관의 보충의견이 있다.
2) 반대의견
위의 다수의견에 대하여는 윤관, 최종영, 천경송, 정귀호, 김형선, 이임수 대법관의 다음과 같은 반대의견이 있다.
이 사건의 경우와 같이 어음법에 명문의 규정이 있고 그 의미내용 역시 명확하여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경우에는 다른 것을 다르게 취급하여야 한다는 정의의 요청 또는 합헌해석의 요청에 의하여 그 법규의 적용범위를 예외적으로 제한하여 해석할 필요가 있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다수의견과 같이 명문의 규정이 거래의 관행과 조화되지 아니하는 점등이 있다고 하더라도 법원으로서는 모름지기 국회의 입법작용에 의한 개정을 기다려야 할 것이지 명문의 효력규정의 적용범위를 무리하게 벗어나거나 제한하는 해석을 하는 것은 법원의 법률해석권의 범위를 일탈한 것이다.
4. 평 석
1) 약속어음요건
어음은 당연히 서면형식을 요한다. 그리고 법률은 기본적으로 약속어음의 경우 다음과 같은 형식요건을 요구한다(어음법 제75조)
i) 어음임을 표시하는 문자(어음문구) ii) 일정한 금액을 지급할 뜻의 무조건의 약속 iii) 만기의 표시 iv) 지급지 v) 수취인 vi) 발행일, 발행지 vii) 발행인의 기명날인 또는 서명.
이상의 법정기재사항이 기재된 어음을 기본어음이라 하지만, 이 중에서 다음의 사항은 기재하지 않아도 무효로 되지 않는다. 즉 만기의 기재가 없으면 그 어음은 일람출급어음으로 본다(어음법 제76조 제2항). 또한 장소에 관한 사항은 경우에 따라서는 대체될 수 있다. 즉 지급지나 발행지의 기재가 없는 때에는 지급인에 부기된 장소를 지급지, 발행인에 부기된 장소를 발행지로 본다(어음법 제76조 제4항)(이기수, 어음법·수표법학, 제4판, 1998, 96, 406∼407쪽).
2) 학 설
발행지의 기재가 없는 어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견해가 나뉘어진다.
(1) 무효로 보는 견해
어음법상 발행지를 어음요건으로 규정하고 이의 흠결시에는 어음으로서의 효력이 없다는 규정(어음법 제2조 제1항, 제76조 제1항, 수표법 제2조 제1항)에서 보면 「발행지」및 「발행인의 명칭에 부기한 地」(어음법 제2조 제4항, 제76조 제4항)의 기재없는 어음은 당연히 무효가 되고 설사 백지어음으로 추정된다고 하더라도 이의 보충없이 한 지급 제시는 위의 경우와 같이 효력이 없다(최기원, 어음·수표법, 신정증보판, 1993, 252쪽; 강위두, 어음·수표법, 1996, 308쪽; 이철송, 어음·수표법, 1995, 221쪽)(이에 대하여 발행지를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할 필요가 있는지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로는 정동윤, 어음·수표법, 제4정판, 1996, 378∼379쪽 참조).
(2) 유효로 보는 견해
발행지는 어음상의 권리와는 거의 관련이 없고 다만 준거법을 정하는데 일응 추정력을 가지는 데 불과한 점에 비추어 보아 발행지의 기재없는 어음을 유효어음으로 보아 이의 효력을 긍정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양승규, 어음법·수표법, 1994, 258쪽; 김교창, 발행지의 기재없는 어음, 사법행정 1986.7., 22쪽 아래; 정찬형, 어음·수표법강의, 제2개정판, 1998, 320쪽).
3) 은행의 발행지백지어음의 보충촉구의무
백지어음이 실제로 이용되고 있는 경우 중에는 발행일백지의 확정일출급어음 및 수취인백지의 어음이 많다. 이러한 백지어음은 타점권이고 미보충인 채로도 보통예금구좌, 당좌예금구좌에 입금되기도 하고, 은행이 대금추심을 인수하기도 하며, 그대로 어음교환소에 교부된 경우에도 지급은행은 백지어음에 대하여 지급한다. 대금추심거래의 경우나 어음에 의한 예금구좌에의 입금이 있을 때에는 은행과 고객사이에 어음의 추심위임계약이 성립한다고 해석한다(이기수, 어음법·수표법학, 제4판, 1998, 128쪽).
당좌예금약관 제3조 제2항에 의하면 "증권 중 백지의 보충, 배서 또는 영수란의 기재가 필요한 것은 꼭 그 절차를 밟아주십시오, 저희은행은 백지보충의 의무를 아니 집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당좌예금약관 제3조 제2항과 대응하는 관계에 있는 것은 동약관 제11조 제1항인데 이에는 『수표·어음을 발행하거나 환어음을 인수하실 때에는 수표요건·어음요건을되도록 빠짐없이 기재하여 주십시오. 만일 수표 또는 만기의 기재가 있는 어음으로서 발행일의 기재없는 것 또는 어음으로서 수취인의 기재가 없는 것이 지급제시된 때에는 연락을 아니하고 지급할 수 있기로 합니다』라고 규정되어 있다.
바로 이 규정이 은행실무에서 백지어음을 보충하지 않고도 지급을 받을 수 있다는 근거로서 제시되고 있다. 또한 『제1항의 처리로 말미암아 손해가 생겨도 저희 은행은 책임을 아니 지기로 합니다』(제11조 제2항)라고 하여 은행의 면책까지 규정하고 있다.
만기일 기재있는 어음의 발행일과 어음의 수취인의 기재가 어음의 요건임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백지어음은 미완성인 어음이며, 백지미보충인 채로는 유통에 관한 취득자의 보호(어음법 제10조)의 측면을 제외하고는 본래 어음상의 효력을 결하여, 백지어음으로서는 어음상의 주채무자에 대하여 청구할 수 없고 또 이 백지어음에 의한 지급제시는 무효이며, 백지어음에 의해서는 배서인에 대한 소구권을 보전할 수 없다(이기수, 어음법·수표법학, 제4판, 1998, 128쪽).
은행 자신의 직접적인 백지보충의무는 인정하기 어렵다. 이는 은행에 있어 불측의 손실을 부담시킬 위험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은행은 항상 고객이 추심을 위임한 어음에 관하여 백지를 보충하여 형식상 완전어음을 만들도록 재촉하여야 할 의무를 부담하고 있다고 보며, 이 의무를 위의 약관조항에 의해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해석하여야 한다. 이러한 의무의 배제는 은행의 어음법 거래전반에 관한 고도의 전문지식을 전제로 하는 이상 은행과 고객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거래관계에 비추어 부당하다고 해석된다. 따라서 위의 의무에 위반하고서 백지인채로 교환제시하여 고객이 손해를 입었다면 은행은 고객에 대하여 손해배상의무를 부담하여야 할 것이다. 또 은행이 백지보충을 재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고객이 스스로 보충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보충불요의 의사가 표명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 은행에 대하여 묵시적으로 백지보충의 위임이 행하여져 은행은 추심의 인수에 의하여 백지보충도 인수한 것으로 보게 된다(이기수, 어음법·수표법학, 제4판,1998, 134쪽).
4) 사 견
우리나라는 실정법을 중시하는 대륙법계의 국가에 속한다. 그런데 영미법과는 달리 발행지의 기재를 실정법에서 명시적으로 어음요건으로 요구하고 있고 또 발행지를 기재하지 않은 증권은 발행인의 명칭에 부기한 지가 없는 한 「약속어음의 효력이 없다」(어음법 제2조, 제76조)고 명문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와같이 법률의 명문규정이 있고 그 의미 내용도 명확하여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이에 대하여는 Zollner, Wertpapierrecht, 14.Aufl., 1987, S.73; Hueck/Canaris, Recht der Wertpapiere, 12.Aufl., 1986, S.66; Baumbach/Hefermehl, Wechselgesetz und Scheckgesetz, 17.Aufl., 1990, S.106; Muller-Christmann/Schnauder, Wertpapierrecht, 1992, S.50 참조) 이 판결은 명문의 규정이 거래의 관행과 조화되지 아니한다는 이유로 효력규정의 적용범위를 무리하게 제한 해석한 것으로서 타당하지 않다. 유추해석이나 목적론적 해석이 인정되더라도 법률의 문리해석에 명백하게 반하지 않는 범위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다. 이 판결의 다수의견은 법률의 명문의 규정이 거래의 관행과 조화되지 아니한다고 판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어음요건에서 발행지의 기재를 제외할 만한 경제적·사회적 여건이 조성되었다고 보기도 어렵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은행으로서도 발행지미보충의 어음을 받은 경우 그의 보충을 촉구하여야 하며 백지인 채로 지급하는 것을 수긍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국내어음」에 한하여 그러한 해석을 한다는 것은 우리 어음법이 1930년 어음법통일조약에 의거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보면 수긍할 수 없다. 어음·수표는 국제성이 강한 유가증권으로서 국내증권과 국제증권을 달리 취급하여서는 아니된다. 즉 국내에서 발행되고 지급지가 국내인 어음이라도 국외에서도 유통되는 경우를 예정할 수 있다. 따라서 발행지가 단순히 준거법의 표준이 되는 이외에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이 판결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번의 대법원판결은 우리법이 서 있는 토양에 근본적으로 반하는 것이며 어음의 절대적 요식증권성에 반하여 부당하다. 또한 성문법주의 국가에서 강행법규이며 효력규정인 명문의 규정을 무시함으로써 사법권의 범위를 일탈한 것으로서 파기되어야 한다. 다만 입법론으로서 어음법을 개정하여 발행지를 어음요건에서 배제하자는 논의는 별개의 문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