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악범죄자와 같은 이름이라니 창피해서 원… 제 이름 좀 바꿔주세요."
연쇄살인이나 아동대상 성폭력 등 잔혹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남모르는 어려움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다. 흉악범과 똑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들이다. 이들은 범죄자와 같은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놀림을 받거나 근거없는 오해를 받는다.
지난해 '강호순'이란 이름을 가진 한 네티즌은 자신의 개인 홈페이지를 폐쇄했다. 자신과 같은 이름의 '강호순'이 부녀자 8명을 살해하고 부인과 장모가 사는 집에 불을 질러 살해한 범죄사실이 드러나자 '살인마'라는 글이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등 생각지도 못한 비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름이 소개되거나 불려질 때마다 떠오르는 흉악범 이미지가 이들에겐 견디기 힘든 고통이다.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탈출구가 뭘까. 바로 개명(改名)이다. 흉악범죄자와 이름이 같아 고통을 겪고 있으니 이름을 바꿀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이다. 과연 법적으로 가능할까?
답은 '가능하다'이다. 법원이 범죄은폐 등의 불순한 목적이 아닌한 이름에 대한 자기선택의 자유를 폭넓게 인정해 개명, 재개명까지 허용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지난 2005년 "개명을 허가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인정되고, 범죄를 기도 또는 은폐하거나 법령에 따른 각종 제한을 회피하려는 불순한 의도나 목적이 개입되어 있는 등 개명신청권의 남용으로 볼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개명을 허가함이 상당하다"는 결정(2005스26)을 내놓았다. 이 결정 이후 법원은 개명신청 사건에 대한 입장을 '원칙적 불허, 예외적 허가'에서 '원칙적 허가, 예외적 불허'로 바꿨다.
김윤정 서울가정법원 공보판사는 "요즘은 흉악범죄자와 이름이 똑같아 개명을 신청한 경우 개명허가가 나는 것이 보통"이라며 "이름에 대해서는 자기 선택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개명의 진정성이 있다면 재개명도 인정하는 사례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전과를 지우기 위한 개명이나 신용불량자 지위를 숨기기 위한 목적의 개명은 여전히 허가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같은 경향에 따라 흉악범의 동명이인이 낸 개명신청이 속속 허가되고 있다. 19일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지난해 연쇄살인범 '강호순'과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 19명이 개명허가를 받아 이름을 바꿨다. 올해들어서도 2명이 추가로 개명했다. 특히 강호순이 1심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지난해 4월에는 7명의 '강호순'이 개명한 것으로 나타났다. 8세 초등학생 여자 어린이를 잔혹하게 성폭행해 영구장애에 이르게 한 범인 '조두순'과 동일한 이름을 가진 사람도 개명한 사례가 있다. 최근엔 이미 '정남규'로 개명한 사람이 또다시 개명신청을 내 허가받기도 했다. 부녀자 13명을 살해해 사형선고를 받고 복역중이던 같은 이름의 연쇄살인범이 지난해 11월 자살하면서 세간의 이목이 다시 집중되자 재개명신청을 낸 것이다.
이런 경향을 고려하면 최근 발생한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살해사건의 유력한 용의자 '김길태'와 같은 이름을 가진 동명이인이 개명신청을 낼 가능성은 이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그의 양부모가 '길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이름을 '길태'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