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상업회의소(ICC) 국제중재재판소의 무리한 중재관할 확대에 우리 법원이 제동을 걸어 주목을 받고 있다.
서울고법 민사19부(재판장 윤성근 부장판사)는 지난 16일 엘에스에프-케이디아이씨(LSF-KDIC) 투자회사가 예금보험공사 자회사인 케이알앤씨(KR&C)를 상대로 "ICC 중재판정에 따라 미화 3369만달러와 한화 21억원을 지급하라"며 낸 집행판결 항소심(2012나88930)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유지했다. ICC 국제중재재판소의 중재판정에 따른 집행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LSF-KDIC 투자회사는 지난 2000년 국내 금융기관의 부실자산을 관리·처분하기 위해 론스타와 KR&C가 50%씩 출자해 설립한 자산유동화 전문 법인이다. 론스타와 KR&C는 투자회사 설립과 함께 양 주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ICC 국제중재재판소의 중재로 해결한다는 중재조항을 포함한 '주주 간 계약'을 체결했다.
문제는 2002년 LSF-KDIC 투자회사가 취득한 부산화물터미널 부지를 매각하는 과정에서 불거졌다. LSF-KDIC 투자회사는 부지 매각에 대한 선급 매매대금을 론스타와 KR&C에 분배한 후 문제가 발생한 경우 선급 매매대금을 반환하고, 매각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론스타와 KR&C가 절반씩 분담한다는 내용의 확약서를 작성했다.
하지만 당초 계획했던 부지 용도 변경이 어려워지면서 부지 매각이 지연됐고, 그 과정에서 론스타와 KR&C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이후 론스타는 LSF-KDIC 투자회사 이사회를 통해 경영권을 장악한 후 KR&C를 배제한 채 부지 매각을 추진했다.
부지 매각 후 확약서에 따라 LSF-KDIC 투자회사는 KR&C에 부지 매각에 대한 비용을 청구했지만 합의가 이뤄지지 않자, 2009년 1월 기존에 체결했던 '주주 간 계약'의 중재조항에 따라 ICC 국제중재판소에 중재를 신청했다. 일본에서 2년간 진행된 중재절차 후 중재판정부는 2011년 4월 KR&C에 부지 매각 비용 중 절반인 미화 3260만 달러는 물론, 중재과정에서 소요된 변호사 비용과 각종 경비 등을 포함한 21억 5244만원과 미화 100만 달러를 LSF-KDIC 투자회사에게 지급하라고 판정했다.
LSF-KDIC 투자회사는 곧바로 한국법원에 중재판정의 집행을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KR&C는 애초에 중재에 대한 합의가 없었으므로 중재판정의 집행을 구할 수 없다고 맞섰다. '주주 간 계약'의 중재조항은 부지 매각비용에 대한 확약서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설사 관련이 있더라도 주주간의 중재조항이므로 LSF-KDIC 투자회사는 중재조항의 당사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1심 재판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21부(재판장 최승록 부장판사)는 "원고의 행위는 피고에게 예측할 수 없는 손해와 위험을 발생시켜 무효이므로, 이를 그대로 인정한 중재판정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반한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 LSF-KDIC 투자회사 측의 부지 매각행위가 자산유동화에 관한 법률을 위반한 것이라 효력이 없고, 이에 따라 중재판정을 그대로 인정할 경우 부지 매각행위도 적법한 것으로 인정돼 그 구체적 결과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과 사회질서에 반한다는 취지다.
항소심 역시 중재판정을 인정할 수 없다고 판결했지만, 그 이유에 대해서는 1심과 차이를 보였다. 항소심 재판부는 "'주주 간 계약'의 중재조항이 확약서에 적용되지 않을 뿐더러, 설사 적용되더라도 LSF-KDIC 투자회사는 중재조항의 당사자에 해당하지도 않으므로 ICC 중재재판소의 중재판정은 중재합의가 부존재하거나 중재약정의 범위에 속하지 않은 분쟁에 관한 것이므로 중재판정의 집행을 허용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원고와 피고 사이에 중재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이 사건 중재판정 자체가 중재약정의 범위에 속하지 않는 분쟁에 관한 것이므로 뉴욕협약상 집행 요건을 갖춘 외국 중재판정이 아니라는 취지다.
KR&C 측을 대리한 임성우 법무법인 광장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국제중재판정이 집행이 거부되는 사례가 별로 없는 가운데 법원이 외국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의 요건을 적극적으로 판단한 사례"라며 "뉴욕협약이 집행국의 법원에 부여한 중재관할 심사권을 적극 행사해 외국중재판정부의 무리한 중재관할 확대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