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 명의의 어음이 개인채무 담보용으로 발행된 사실을 상대방이 알고 있었다면 배임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상대방이 대표권 남용 사실을 알고 있어 어음 발행이 무효가 됐으므로 회사에는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취지다.
대법원 형사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지난달 29일 개인채무 담보를 위해 회사 명의로 30억원의 약속어음을 발행하는 등 회사에 140억여원의 손해를 끼친 혐의(특경가법상 배임) 등으로 기소된 이모(45)씨에 대한 상고심(2011도8110)에서 징역 4년6월을 선고한 원심을 깨고 배임 혐의에 대해 다시 판단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횡령 등 나머지 혐의에 대해서는 유죄가 확정됐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이씨가 개인 채무를 담보하기 위해 A사 명의의 약속어음을 발행한 것은 대표권 남용 행위이고, 만일 그 사실을 상대방이 알고 있었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했다면 A사에 대해 무효이고 A사의 사용자 책임도 인정될 수 없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이씨의 어음 발행 행위만으로 A사에게 재산상 손해가 발생했다거나 손해발생의 위험이 초래됐다고 할 수 없어 배임죄가 성립될 수 없다"며 "이후 상대방이 무효인 약속어음 채권을 채무명의로 해 A사의 재산을 압류하거나 A사가 이를 이유로 발행 주식의 수를 줄였다고 해도 달리 볼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대표권 남용이란 회사의 대표이사가 대표권의 범위 내에서 한 행위는 설사 자기 또는 제3자의 이익을 도모할 목적으로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 할지라도 일단 회사의 행위로서 유효하지만, 상대방이 대표이사의 진의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때에는 회사에 대하여 무효가 된다는 법리다.
재판부는 "원심은 상대방이 이씨의 대표권 남용을 알았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것인지를 심리·판단하지 않은 채, 이씨의 어음 발행 행위가 대표권 남용행위이고 상대방이 이를 알고 있었다 해도 A사에 손해발생의 위험이 초래됐고 실제 손해도 발생했다고 판단했다"며 "원심의 판단에는 대표권 남용과 업무상 배임죄에 관한 법리를 오해해 판결 결과에 영향을 미친 위법이 있다"고 지적했다.
코스닥 상장사인 A사와 B사의 회장이었던 이씨는 2008~2010년에 걸쳐 가장납입을 통해 A사에 대해 105억원, B사에 대해 168억원 도합 273억원의 이익을 취하고, 또 횡령·배임 범행으로 두 회사에 140억여원의 손해를 끼쳐 결국 두 회사가 상장폐지되게 한 혐의로 기소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