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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의자의 중과실 있는 착오와 상대방의 악의 등
[사실관계 및 사건의 경과] 평석에 필요한 한도에서 요약하기로 한다. 1. 원고 증권회사(이 사건 소 제기 후에 파산하여 파산관재인이 소송을 수계하였으나, 편의상 이렇게 부르기로 한다)는 싱가포르 법인인 피고 회사 등과의 사이에 인터넷을 통하여 파생상품거래를 하였다. 원고는 이를 위하여 다른 소프트웨어 제작회사로부터 시스템거래의 소프트웨어를 구입한 다음, 그 회사의 직원으로 하여금 이자율 등 변수를 입력하고 그 입력된 조건에 따라 호가(呼價)가 자동적으로 생성 및 제출되도록 하였다. 2. 2013년 12월 어느 날 파생상품시장 개장 전에 위 직원이 입력할 변수 중 이자율 계산을 위한 설정값을 잘못 입력하였고, 원고는 그로써 생성된 호가를 그대로 제출하였다. 그에 따라서 피고와의 사이에 코스피 200옵션에 대하여 매우 많은 수의 주가지수옵션매수거래가 성립되었고, 그 대금 584억원이 종국적으로 피고에게 지급되었다. 3. 원고는 착오를 이유로 위 매매를 취소하는 의사표시를 하고 그 대금 중 우선 100억원의 반환을 청구하였다. 제1심법원(서울남부지법 2015. 8. 21. 선고 2014가합3413 판결)은 원고의 중과실로 인한 착오라는 것 등을 이유로 하여 그 청구를 기각하였다. 원심법원(서울고등법원 2017. 4. 7. 선고 2015나2055371 판결)도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우선 원고의 이 사건 의사표시가 그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으로서 원칙적으로 이를 취소할 수 없다고 하고, 나아가 여러 가지 사정을 들어 피고가 “피고가 상대방의 착오를 이용하여 부정한 이익을 취득할 수 있도록 설계된 알고리즘 거래 프로그램을 사용하거나, 착오로 인한 호가 제출 사실을 아는 피고 직원이 개입하여 원고의 착오를 유발하거나 그의 중과실을 이용하여 이 사건 매매가 체결되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고 판단하였다. 대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단하여 상고를 기각하였다(이하 ‘대상판결’이라고 한다). [판결 취지] “민법 제109조 제1항은 법률행위 내용의 중요 부분에 착오가 있는 때에는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규정하면서, 같은 항 단서에서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때에는 취소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서 ‘중대한 과실’이란 표의자의 직업, 행위의 종류, 목적 등에 비추어 보통 요구되는 주의를 현저히 결여한 것을 의미한다[참조 재판례들 인용]. 한편 위 단서 규정은 표의자의 상대방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므로,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를 이용한 경우에는 그 착오가 표의자의 중대한 과실로 인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표의자는 그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대법원 1955. 11. 10. 선고 4288민상321 판결,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 판결 등 참조). 다만 한국거래소가 설치한 파생상품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파생상품거래와 관련하여 상대방 투자중개업자나 그 위탁자가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했는지 여부를 판단할 때에는 파생상품시장에서 가격이 결정되고 계약이 체결되는 방식, 당시의 시장상황이나 거래관행, 거래량, 관련 당사자 사이의 구체적인 거래형태와 호가 제출의 선후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야 하고, 단순히 표의자가 제출한 호가가 당시 시장가격에 비추어 이례적이라는 사정만으로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이용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평 석] 1. 착오에 관한 민법의 규정 (1) 어떠한 경우에 의사표시의 착오를 이유로 계약 기타 법률행위(이하에서는 그 중 계약만을 다루기로 한다)의 효력을 다툴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법의 역사에서 일찍부터 제기되었으면서도 여전히 새롭다. 우리 민법이 정면으로 정하는 바는 네 가지다. 첫째, 착오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있는 경우에만 그 효력이 다투어질 수 있다(제109조 제1항 본문). 여기에는, 세상사가 무릇 그러하듯이, 어떠한 잘못 또는 실수는 이를 범한 이가 그 귀결을 감당해야 한다는 원칙이 배경에 있다고 하겠다. 이와 관련하여서 민법은 예외적으로 효력을 다툴 수 있게 하는 ‘본질적 착오’의 유형을 열거하는 스위스채무법 제24조와 같은 태도는 취하지 않는다. 둘째, 그 경우에도 표의자에게 ‘중대한 과실’이 있으면 착오를 들어 계약의 효력을 부인할 수 없다(동항 단서). 셋째, 이상과 같은 요건이 충족되더라도 표의자는 착오를 이유로 계약을 취소할 것인지 여부에 대하여 선택권을 가질 뿐이고, 애초부터 무효인 것은 아니다. 즉 계약은 표의자에게 취소권을 부여한다. 넷째, 표의자가 그 취소권을 행사하여 계약을 무효로 돌리더라도, 그 효력은 선의의 제3자에게는 미치지 않는 것으로 제한된다(동조 제2항). (2) 이러한 입법적 태도는 예를 들어 독일민법에서의 착오에 관한 입법과정(이에 대하여는 양창수, “독일민법전 제정과정에서의 법률행위 규정에 대한 논의 ― 의사흠결에 관한 규정을 중심으로”, 동 민법연구 제5권(1999), 49면 이하 참조)에 비교하여 보더라도, 적어도 어느 시기까지 크게 탓할 만한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독일민법의 착오 규정이 우리 민법의 그것과 크게 다른 점은 거기서는 착오자의 중과실을 착오 취소의 소극요건으로 하지 않고 여전히 취소권을 착오자에게 부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주지하는 대로 착오 취소자에게 신뢰이익의 배상책임을 부과한다(제122조). 이 책임은 착오자에게는 그의 유책사유를 요구하지 않고 인정되는데, 다만 상대방이 “취소의 원인을 알았거나 또는 과실로 인하여 알지 못한 경우”에는 이를 배제한다(동조 제2항). 그만큼 상대방의 악의 또는 과실은 착오법리의 범위 안에서 고려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의 ‘행태’는 입법적 차원에서 이미 그 한도에서 일정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나아가 참조를 삼을 만한 것이 스위스법의 태도이다. 스위스채무법 제26조 역시 착오 취소자에게 “계약의 효력불발생으로 인하여 발생한 손해”의 배상책임을 긍정한다. 그런데 그 요건에서는 독일민법과 달리 착오자의 과실을 요구한다. 그리고 상대방이 착오자를 알았거나 알았어야 하는 경우에는 그 책임을 배제한다.(이상 동조 제1항) 한편 여기서는 예외적으로 “형평에 부합하는 경우에는 법관은 그 외의 손해의 배상을 인정할 수 있다.”(동조 제2항) 결국 이들 나라에서는 착오 취소자는 물론이고 나아가 상대방의 사정을 다양하게 고려하여 착오법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2. 상대방의 착오 ‘유발’의 문제 (1) 그렇지만 민법 소정의 여러 제도가 흔히 그러하듯 실제의 사건 맥락은 입법자가 예상하지 아니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 중요한 하나가 상대방의 ‘행태’를 고려할 것인가 또는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를 들어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유발’ 내지 ‘야기’된 경우에도 위에서 본 요건이 갖추어져야만 표의자는 취소할 수 있는가? 그가 표의자를 착오로 빠뜨릴 의도를 가지고 그렇게 하였다면, 물론 이는 ‘사기’(민법 제110조)의 문제가 될 것이다(여기서는 ‘계약 내용의 중요부분’이나 표의자의 중과실 등은 논의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상대방이 그러한 의도가 없이 그렇게 하였다면 어떠한가? 예를 들어 상대방이 사실이라고 잘못 알면서 표의자에게 사실 아닌 정보를 전달함으로써 표의자가 이를 믿고 의사표시를 하게 되었다면?(이는 이른바 공통착오 중에서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된 유형에 해당한다). 또 나아가 표의자의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되었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것을 상대방이 적극적으로 ‘강화’(이에도 여러 가지 정도가 있을 것이다)한 경우는 어떠한가? (2) 대법원이 민사사건에서 이와 같이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사안을 다룬 것은 대판 1978.7.11., 78다719(집 26-2, 209)이 처음이라고 생각된다(그 전에 귀속재산매각처분의 효력이 다투어진 행정사건에서 같은 취지로 판단하여 원심판결을 파기한 대판 1970.2.24., 69누83(집 18-1, 행 36)이 있다). 이 판결은 귀속해제된 토지임에도 귀속재산인 줄 잘못 알고 피고(대한민국)에게 증여한 사안에서, “이러한 착오는 일종의 동기의 착오라고 할 것이나, 그 동기를 제공한 것이 피고 산하 관계 공무원이었고, 그러한 동기의 제공이 없었더라면 몇 십 년 경작해 온 상당한 가치의 본건 토지를 선뜻 피고에게 증여하지는 않았을 것인즉 그 동기는 본건 증여행위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고 할 것”이라고 판시하면서 원고의 소유권이전등기말소청구를 인용하였다(상고기각). 여기서는 동기착오이면서도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해당한다는 판단틀이 채택되고 있음이 주의를 끈다. 그 후에도 대판 1987. 7. 21., 85다카2339(집 35-2, 284)(이에 대한 평석으로서 양창수, “주채무자의 신용에 관한 보증인의 착오”, 동, 민법연구, 제2권(1991), 1면 이하가 있다. “채권자에 의한 착오의 유발과 보증인의 취소권”이라는 제목의 그 제3장이 종전에 별로 의식되지 아니하던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유형을 새로운 문제관점에서 제시하였다); 대판 1991. 3. 27., 90다카27440(공보 1276); 대판 1992. 2. 25., 91다38419(공보 1141); 대판 1993. 8. 13., 93다5871(공보 2419); 대판 1994. 9. 30., 94다11217(공보 하, 2841); 대판 1995. 11. 21., 95다5516(공보 1996상, 47), 대판 1996. 3. 26., 93다55487(공보 상, 1363); 대판 1997. 8. 26., 97다6063(집 45-3, 112); 대판 1997. 9. 30, 97다26210(공보 3286) 등 1990년대만 하더라도 많은 판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들 재판례가 일반적으로 착오 취소를 긍정하고 있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그리고 그 이유로, 문제의 착오가 동기착오인 경우에라도 ―동기착오에 관하여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그 ‘표시’의 여부 등은 논의하지 아니하고― 그 착오가 상대방에 의하여 야기되었다는 사정을 들고서 바로 또는 다른 사정을 함께 그것은 ‘계약 내용의 중요 부분’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따라서 표의자는 계약을 적법하게 취소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고 있다. 그 과정에서 표의자의 중과실 유무 등은 아예 논의되지 않는 경우도 흔하지만, 한편 앞의 대판 97다6063사건에서와 같이 “표의자로서는 그와 같은 착오가 없었더라면 그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고, 보통 일반인도 표의자의 처지에 섰더라면 그러한 의사표시를 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생각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중요 부분’의 의미에 관한 판례 준칙을 그 중간항(中間項)으로 드는 예도 물론 있기는 하다. (3) 이러한 상대방에 의한 착오 ‘유발’의 사안유형에 대한 판례의 태도에 대하여 학설은 대체로 지지한다. 그것은 “착오 취소의 요건은 표의자와 상대방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절하기 위한 기준인데, 표의자의 동기착오를 유발한 상대방의 보호가치가 부정된다는 점에서 판례의 태도는 충분히 수긍될 수 있다”고 하거나(지원림, 민법강의, 제20판(2023), 77면), 상대방에 의한 그 유발의 경우에 “그 착오의 위험을 생성 또는 실현케 한 상대방에게 부담하도록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김상중, “동기의 착오에 관한 판례법리의 재구성을 위한 시론적 모색”, 사법(私法)질서의 변동과 현대화(김형배 교수 고희 기념)(2004), 15면). 한편 드물기는 하지만, “상대방의 행태를 기초로 취소의 위험을 부담시킬 수 있는 경우에는 민법 제109조가 아니라 민법 제110조에 의해 규율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정성헌, “착오에 대한 민법상 규율의 재구성 ― 대법원 2014. 11. 27. 선고 2013다49794판결을 계기로”, 민사법학 제73호(2015), 265면 이하). 3. 상대방이 악의인 경우 ― 착오의 ‘이용’ (1) 일본의 경우를 보면, 이 맥락에서 상대방의 ‘악의’, 즉 표의자가 착오에 빠졌음을 안다는 사정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관점과 관련하여 다루어진다. 무엇보다도 「민법(채권법)개정검토위원회」가 2009년에 발간한 『채권법 개정의 기본방침』(별책 NBL 126호)은 (i) 상대방이 표의자의 착오를 알고 있는 때, (ii) 상대방이 그 착오를 알지 못함에 대하여 중과실 있는 때, (iii) 상대방이 그 착오를 일으킨 때, (iv) 상대방도 표의자와 동일한 착오를 하고 있는 때에는, 표의자에게 중과실이 있더라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는 것이다(동 방침, 28면 이하. 당시 고려되는 착오의 법률효과는 무효로 정해져 있었다). 이는 대체로 2017년 일본민법 개정에 반영되어(시행은 2020년 4월), ‘상대방이 표의자에게 착오 있음을 알거나 중대한 과실로 알지 못한 때’(제95조 제3항 제1호) 또는 ‘상대방이 표의자와 동일한 착오에 빠져 있는 때’(동항 제2호)에는 표의자에 중과실 있는 경우라도 의사표시를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하였다(앞 (iii)의 착오 유발에는 언급이 없다). 위 개정 후의 일본민법 제95조는 제1항에서, 우선 행위착오 외에도 동기착오 중에서는 ‘표의자가 법률행위의 기초로 한 사정에 관하여 그 인식이 진실에 반하는’ 것(앞의 1.에서 든 스위스채무법 제24조 제1항의 제4호에서 정하는 “표의자에 의하여 신의성실에 비추어 계약의 불가결한 기초라고 여겨진 사정”에 관한 착오, 즉 기초착오(Grundlagenirrtum)를 연상시킨다. 이 점은 독일민법에서 2017년 대개정 후에 동기착오 중에서 “거래상 본질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이나 물건의 성상(性狀)에 관한 착오”를 내용착오로 보는 제119조 제2항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을 고려되는 착오로 정한 다음, 나아가 ‘그 착오가 법률행위의 목적 및 거래상의 사회통념에 비추어 중요한 것인 때’에만 취소할 수 있다고 정한다. 그리고 제3항은 개정 전과 마찬가지로 표의자의 중과실의 경우에는 착오 취소가 배제된다고 하면서도, 동항의 위 두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취소할 수 있음을 정하는 것이다. (2) 대판 2014. 11. 27., 2013다49794(공보 2015상, 9)은 대상판결의 취지와 같이 판시하였다(이 판결은 ‘참조’로서 60년쯤 전의 대판 1955.11.10. 4288민상321을 인용한다. 그 제1심도, 항소심도 버젓이 인용하고 있는 이 판결에 접근할 방도를 알지 못한다. 이러한 재판례의 ‘공개’ 내지 ‘접근가능성’이라는 ―민법 연구자인 나로서는 꽤나 심각한― 문제에 대하여는 양창수, “『법고을』 유감”, 동, 민법산책(2006), 274면 이하 참조 : “그것들이 재판 실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나아가 변호사의 직무에 도움이 안 될 리 없고, 또 법학교수가 법을 연구하는 데 자료가 되지 않을 리 없다”). 위 판결은 대상판결의 사안과 유사하게, 원고 증권회사의 직원이 파생상품(미화달러 선물(先物)스프레드 1만 5000개) 계약의 매수주문을 개장 전에 입력하면서 0.80원이라고 할 것을 그 100배인 80원이라고 찍음으로써 결국 피고 증권회사와의 사이에 그 내용으로 매매계약이 체결된 사안에 대한 것이다. 원심판결은 그 계약의 착오 취소를 인정하고 원고의 매매대금반환청구를 인용하였는데,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그 이유로 우선 자본시장법상의 금융투자상품시장에서 일어나는 증권이나 파생상품의 거래에도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민법 제109조가 적용됨을 선언한 데에도 적지 않은 의미가 있다. 그리고 나아가 착오 취소에 관하여는 대상판결과 같은 법리를 설시한 다음, 구체적으로는 원고 측의 착오에 중대한 과실이 있지만 “피고가 주문자의 착오로 인한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고, 이를 이용하여 다른 매도자들보다 먼저 매매계약을 체결하여 시가와의 차액을 얻을 목적으로 단시간 내에 여러 차례 매도주문을 냄으로써 이 사건 거래를 성립시켰으므로” 원고의 중대한 과실에도 불구하고 취소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대상판결은 표의자의 중과실에도 불구하고 의사표시의 취소를 긍정하는 추상적인 법리를 그대로 반복한다. 굳이 저 60년 전의 대법원판결과 합하지 않더라도 이제 최근 두 개의 대법원판결만으로 그 법리는 이제 우리 민법의 일부가 되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 법리는 착오 취소의 제한 요소로서의 표의자의 중과실을 ―법률 밖에서(praeter legem), 즉 법규정에 마련되어 있지 아니한 기준을 도입함으로써― 다시 제한하여 착오 취소의 범위를 확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 글은 이 점을 제시하여 의식하게 하려는 의도로 쓰였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몇 가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위의 두 선례는 단지 상대방의 악의에서 더 나아가 그가 표의자의 착오를 ‘이용하는 것’을 요구한다. 이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단지 의례적인 장식 문구인가, 아니면 실제로 입증되어야 하는 취소 허용의 요건인가? “이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피고가 원고의 착오를 이용하여 이 사건 매매거래를 체결하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대상판결의 판단이 착오 취소를 부인하는 종국적인 이유인데, 그 ‘이용’ 여부를 단지 의례적인 장식 문구라고 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제3자의 채권침해가 논의되는 사안유형 중 문제의 행위로 채무자의 책임재산이 감소된 경우에 대하여 대판 2007. 9. 6., 2005다25021(공보 1526) ; 대판 2019. 5. 10., 2017다239311(공보 1207) 등이 그 위법성 요건에 관하여 설시하는 대로 제3자가 ‘채무자에 대한 채권자의 존재 및 그 채권의 침해사실을 아는 것’ 외에도 ‘채무자와 적극 공모하거나 채권 행사를 방해할 의도로 사회상규에 반하는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는 등’을 요구하는 것과 같은 레벨에서 다루어져야 하는 것인가? 나아가 위의 두 판결은 모두 인터넷금융거래에서 증권회사의 ‘피용자’가 입력을 잘못하여 그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정하여진 사안임에도 그 결론을 달리하여, 2014년 판결은 표의자의 착오 취소를 허용하여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고, 대상판결은 이를 부인하였다. 그 차이의 이유를 위 사건의 어떠한 사실관계로부터 찾을 수 있을까? 이것도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나 지면관계상 여기서는 상론하지 아니하기로 한다. 다만 하나만 지적하자면, 대상판결의 사안에서는 피고도 이 사건 매매거래 전부터 미리 정하여진 일정한 시스템거래 방식으로 기계적 호가를 계속하여 왔다는 것을 들 수 있을지 모른다. 양창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
중대한과실
착오
파생삼품
양창수 명예교수(서울대 로스쿨)
2023-08-20
부동산·건축
행정사건
손실보상금 채권에 관한 압류 및 추심명령으로 인한 피수용자의 당사자적격 상실 여부
1. 사실관계 중앙토지수용위원회는 2012년 4월 6일 한국토지주택공사(LH, 이하 ‘피고’)가 시행하는 본건 보금자리주택사업에 관하여 주식회사 씨○○○○○(이하 ‘원고’)가 운영하는 공장 영업시설을 이전하게 하고 원고의 영업손실에 대한 보상금을 68억2575만 원으로 정하는 내용의 수용재결을 하였다. 원고는 위 보상금을 이의를 유보하고 수령한 뒤 2012년 5월 22일 보상금의 증액을 구하는 본건 소를 제기하였다. 원고의 채권자들은 본건 소 제기일 이후부터 원심판결 선고일 이전까지 사이에 원고의 피고에 대한 손실보상금 채권에 관하여 압류·추심명령(이하 '본건 추심명령'이라 한다)을 받았다. 2. 소송의 경과 1심과 2심은 원고 일부승소 판결을 선고하였다. 피고는 2심 선고시까지 본건 추심명령에 관하여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아니하였으나, 2심 판결에 대하여 상고를 하면서 추가적으로 본건 추심명령으로 인하여 원고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되었다고 주장하였다. 3. 본 사안의 쟁점 본 사건의 주요 쟁점은 본건 추심명령으로 인하여 원고가 본건 보상금 증액 청구 소송을 수행할 당사자적격을 상실하는지 여부이다. 4. 대상판결 요지 대상판결은 (i)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이하 ‘토지보상법’) 제85조 제2항은 토지소유자 등이 보상금 증액 청구의 소를 제기할 때 사업시행자를 피고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고, 보상금 증액 청구의 소는 당사자소송 형식을 취하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재결을 다투는 항고소송의 성질을 가진다는 점, (ⅱ) 행정소송법 제12조 전문은 (항고소송인) “취소소송은 처분 등의 취소를 구할 법률상 이익이 있는 자가 제기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금전채권을 가지고 있는 제3자는 재결에 대하여 간접적이거나 사실적·경제적 이해관계를 가질 뿐 법률상의 이익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없다는 점, (ⅲ) 보상금 증액 청구 소송은 토지보상법 제34조, 제50조 등에 규정한 재결절차를 거친 뒤 그 재결에 대하여 불복이 있을 때만 제기할 수 있다는 점, (ⅳ) 손실보상금 채권은 관할 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 또는 행정소송 절차를 거쳐야 비로소 존부 및 범위가 확정된다는 점, (v) 채권자가 압류 및 추심명령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그 채권자가 손실보상금 채권의 확정을 위한 절차에 참여할 자격까지 취득한다고 볼 수는 없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본건 추심명령으로 인하여 원고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된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이어서 대상판결은 종전에 손실보상금 채권에 관하여 압류 및 추심명령이 있을 경우 원고인 채무자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된다는 취지로 판단한‘대법원 2013. 11. 14. 선고 2013두9526 판결’(이하 ‘종전 대법원 판결’)의 견해를 변경하였다. 소제목 5. 대상판결에 대한 검토 가. 추심명령에 의한 채무자의 이행의 소 당사자적격 상실 여부 금전채권에 대하여 (가)압류만 이루어진 경우 채무자는 제3채무자로부터 현실적으로 급부를 받는 것이 금지될 뿐이고 제3채무자를 상대로 이행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대법원 2000. 4. 11. 선고 99다23888 판결). 한편 민사집행법 제229조 제2항은 “추심명령이 있을 때에는 압류채권자는 대위절차 없이 압류채권을 추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금전채권에 대하여 추심명령이 이루어진 경우, 압류채권자가 피압류채권에 관한 추심권한을 취득한다는 점에서는 다툼이 없을 것이나 채무자가 이행의 소에 관한 당사자적격을 상실하는지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채무자의 이행의 소에 관한 당사자적격이 인정되면서 별도로 추심채권자도 추심의 소를 제기할 수 있다는 해석도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대법원 2000. 4. 11. 선고 99다23888 판결’은 “채권에 대한 압류 및 추심명령이 있으면 제3채무자에 대한 이행의 소는 추심채권자만이 제기할 수 있고 채무자는 피압류채권에 대한 이행소송을 제기할 당사자적격을 상실한다”라고 판시하였다. 하지만 위 대법원 판례는 추심명령이 있으면 채무자가 당사자적격을 상실한다고만 판시하였을 뿐, 이에 대하여 구체적인 이유를 설시하지 아니하고 있어 의문이 남는다. 안상철 대법관도 대상판결에서 보충의견으로, “민사소송에 관한 판례의 법리는 그 자체도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라고 판시하며 위 대법원 판례가 변경될 수 있음을 암시하였다. 나. 종전 대법원 판결 요지 종전 대법원 판결은 위 민사소송에 관한 대법원 판례 법리를 그대로 인용하며, ‘원심판결 선고 당시 압류 및 추심명령으로 원고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되었으나 원심 판결 선고 이후 압류 및 추심명령으로 원고의 당사자적격이 회복되었다’고 판단하였다. 다. 종전 대법원 판결의 판단이유 손실보상금 증감 청구의 소는 실질적으로는 재결의 효력을 다투는 형식적 당사자소송에 해당한다. 그런데 피수용자가 손실보상금 증액청구의 소를 제기하여 승소를 하는 경우, 법원은 민사소송상 금전지급을 명하는 이행판결의 주문과 같이 “피고는 원고에게 손실보상금 및 이에 대한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라고 선고한다. 추측건대 종전 대법원 판결은, 공법관계와 사법관계라는 차이는 있지만 손실보상금 증액청구의 소의 승소판결과 민사소송상 금전지급을 명하는 판결을 사실상 동일한 것으로 보아, 손실보상금 증액청구 소송에서도 채권에 대한 압류 및 추심명령이 있을 시 채무자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된다는 민사소송 판결의 법리를 적용한 것으로 사료된다. 라. 종전 대법원 판결에 의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 1) 피수용자의 손실보상금 증액 청구 불가능 토지수용으로 인한 피수용자의 손실보상금 채권은 관할 토지수용위원회의 수용재결로 인하여 비로소 발생하는 것이나, 사업인정의 고시가 있으면 수용대상 토지에 대한 손실보상금의 지급이 확실시된다 할 것이므로 사업인정 고시 후 수용재결 이전 단계에 있는 피수용자의 손실보상금 채권은 피압류채권의 적격이 있다(대법원 1998. 3. 13. 선고 97다47514 판결 등). 종전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수용재결 이전에 손실보상금 채권에 대한 압류 및 추심명령이 있을 경우, 피수용자는 변제 등의 방법으로 압류 및 추심명령을 취소 또는 해제하지 않는 이상 당사자적격을 상실하여 손실보상금 청구의 소를 제기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피수용자가 압류 및 추심명령이 있는 상태에서 손실보상금 증액 소송을 제기하거나 피수용자가 손실보상금 증액 소송을 제기하여 진행 중인 과정에서 압류 및 추심명령이 이루어진다면 당사자적격이 없다는 이유로 소 각하 판결이 이루어질 것이다. 소 각하 판결 이후 피수용자가 압류 및 추심명령을 취소 또는 해제한 뒤 다시 소를 제기한다고 하더라도 법원은 토지보상법 제85조 제1항에서 정한 제척기간이 도과하여 재차 소 각하 판결을 할 것이다. 결국 채권자의 압류 및 추심명령으로 인하여 피수용자는 손실보상금 증액의 소를 제기할 수 없게 된다. 2) 채권자의 손실보상금 증액의 소 제기 가능 여부 피수용자가 손실보상금 증액의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추심명령 이후 추심채권자가 손실보상금 증액 소송의 당사자적격을 취득하거나 채권자대위권에 기하여 손실보상금 증액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이유로 추심채권자가 손실보상금 증액 소송을 제기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토지보상법 제85조 제2항은 손실보상금 증액 청구 소송의 당사자를 토지소유자 및 관계인, 사업시행자로 정하고 있다. 관계인이란 “사업시행자가 취득하거나 사용할 토지에 관하여 지상권·지역권·전세권·저당권·사용대차 또는 임대차에 따른 권리 또는 그 밖에 토지에 관한 소유권 외의 권리를 가진 자나 그 토지에 있는 물건에 관하여 소유권이나 그 밖의 권리를 가진 자”를 말한다(토지보상법 제2조 제5호). 추심채권자는 금전채권자에 불과하고 토지에 관한 권리를 가진 자가 아니므로 관계인에게 해당하지 아니한다. 또한 채권자대위권은 사법관계를 규율하는 민법상 권리라는 점에서, 공법관계인 행정소송을 채권자대위권에 근거하여 제기할 수 없을 것이다. 오래된 대법원 판결이기는 하지만, 대법원 1956. 7. 6. 선고 4289행상33 판결은 ‘행정소송은 행정청 또는 그 소속기관으로부터 위법한 처분을 받은 자만이 제기할 수 있고 그 이외의 자가 대위하여 제기할 수 없다’고 판시한 바 있다. 대상판결도 ‘토지소유자 등에 대하여 금전채권을 가지고 있는 제3자는 … 토지소유자 등을 대위하여 보상금 증액 청구의 소를 제기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한편‘서울고등법원 2015. 4. 21. 선고 2014누7291 판결’(피고가 상고를 하지 아니하여 항소심에서 판결이 확정되었다)은 ‘수용으로 인하여 매도인의 소유권이전등기의무가 이행불능이 된 경우 토지의 매수인이 손실보상금의 반환청구권(대상청구권)을 피보전권리로 하여 채권자대위권에 근거하여 손실보상금 증액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으나, 이는 타당한지 의문이다. 6. 결어 토지보상법 제85조 제2항은 손실보상금 증액의 소 당사자를 토지소유자 및 관계인으로 정하고 있고, 추심명령으로 인하여 토지소유자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된다고 볼 근거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만약 토지소유자의 당사자적격이 상실된다고 보면, 토지소유자나 추심채권자는 손실보상금 증액을 청구할 수 없어서 위법·부당한 토지수용위원회의 재결을 다툴 수 없다는 문제점도 있다. 이에 대상판결의 논리가 타당하다고 사료된다. 배상현 변호사(OCI 주식회사)
압류
손실보상금
토지보상
추심
배상현 변호사(OCI 주식회사)
2023-03-23
국가배상
'보안업무규정(대통령령)'에 의한 신원조사는 위법
1. 사실관계 및 대상판결 가. 원고는 영국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여권발급신청을 하였다가 국가안전기획부(이하 '안기부')로부터 신원조사 회보가 늦어져 출국할 수 없었음을 이유로 국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원고는 해외여행자에 대한 신원조사를 규정한 보안업무규정 제31조 제2항 제3호는 모법인 안기부법에 근거가 없거나 그 위임범위를 일탈하였으므로 위 규정을 근거로 신원조사를 한 것은 위법하다고 주장하였으나, 서울지방법원은 1997년 5월 9일 원고의 청구를 기각하였고(96가합60720), 서울고등법원은 1998년 2월 5일 원고의 항소를 기각하였다(97나23480). 나. 대법원은 2000년 12월 8일 원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는데(98다12041 판결, 이하 '대상판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구 안기부법(1999년 1월 21일 개정되기 전의 것) 제3조 제1항 제1호, 제2항, 구 보안업무규정(1999년 12월 7일 대통령령 제16609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31조 제1항, 제2항 제3호 등에 의하면, 해외여행자에 대한 신원조회(신원조사의 오기로 보인다) 업무는 구 안기부가 법률에 근거하여 담당하던 고유업무의 하나로서 구 보안업무규정 제31조 제1항이 모법의 근거가 없다거나 그 위임의 범위를 일탈하였다고 볼 수 없다. 2. 관련 법리 가. 헌법 제14조는 "모든 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거주·이전의 자유에는 국내에서의 거주·이전의 자유 이외에 해외여행의 자유가 포함된다(대법원 2008. 1. 24. 선고 2007두10846 판결). 나. 국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는 국가안전보장 등을 필요한 경우에 한하여 법률로써 제한할 수 있고(헌법 제37조, 법률유보원칙), 대통령은 법률에서 구체적으로 범위를 정하여 위임받은 사항과 법률을 집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사항에 관하여 대통령령을 발할 수 있다(헌법 제75조, 포괄위임금지원칙). 법률의 시행령은 모법인 법률에 의하여 위임받은 사항이나 법률이 규정한 범위 내에서 법률을 현실적으로 집행하는 데 필요한 세부적인 사항만을 규정할 수 있을 뿐, 법률에 의한 위임이 없는 한 법률에 규정되지 아니한 새로운 내용을 규정할 수는 없다. 법률의 위임 없이 법률이 정하지 아니한 내용을 규정한 시행령 조항은 그 자체로 무효이며, 이와 같이 무효인 시행령 조항에 기초한 행정처분은 그 법적 근거를 상실하여 위법하다(대법원 전원합의체 2020. 9. 3. 선고 2016두32992, 대법원 전원합의체 2015. 8. 20. 선고 2012두23808 등). 3. 구 안기부법 등의 내용 및 관련 비판 가. 대상판결에서 언급한 구 안기부법과 구 보안업무규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 위 가.의 규정에서 보듯이 구 보안업무규정은 신원조사에 관하여 규정하였으나, 구 안기부법은 신원조사에 관하여 전혀 규정하지 않았고 대통령령에의 위임규정도 두지 않았다. 이것은 법률인 국정원직원법(제8조의2)에서 국정원직원에 대한 신원조사를 규정하고 절차 등을 대통령령에 위임하고 있는 것과 명확히 구별된다. 다. 대상판결과 달리, 다수의 견해는 보안업무규정의 신원조사 규정이 모법의 근거가 없다고 지적하고 있다. ① 국회입법조사처는 현행 법률체계를 살펴보면, (공무원 임용예정자에 대한) 신원조사제도를 명시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으며, 신원조사제도의 기본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반드시 국회를 통과한 법률에 정하여야 하는데 행정규칙에서 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헌법상 기본권제한의 법률유보원칙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보았다(이슈와 논점, 2015년 8월 7일). ② 국가인권위원회는 대상판결을 언급하고도, 국가정보원법은 신원조사 제도에 대한 명시적 위임 근거를 둔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하였다('보안업무규정'에 따른 신원조사 제도 개선 권고, 2018년 12월 27일). ③ 송준종 변호사는 대상판결을 언급하고도, 신원조사는 명시적이고 직접적인 법률적 근거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고 지적하였다(국가인권위회, '신원조사제도 개선방안 마련을 위한 청문회' 자료집, 2005년 1월 18일 27면). 4. 보안업무규정에 의한 신원조사는 위법 가. 해외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신원조사를 받아야 하고 받지 않으면 해외여행을 할 수 없으므로, 신원조사는 해외여행의 자유를 제한한다. 나. 해외여행의 자유를 제한하려면 법률에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구 보안업무규정에 의한 신원조사에 관하여는 구 안기부법에 신원조사에 관한 근거 규정도 없고, 대통령령에의 위임규정도 없다. 다. 따라서 법률의 위임 없이 법률이 정하지 아니한 신원조사를 규정한 구 보안업무규정의 신원조사 규정은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위반되어 그 자체로 무효이며, 무효인 보안업무규정에 기초한 신원조사는 그 법적근거를 상실하여 위법하다. 5. 대상판결에 대한 평석 가. 대상판결에는 위 1. 나.와 같이 판시한 근거 내지 이유가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지 않다. 이것은 마치, 음주를 하고(법률에 위임 규정을 두고) 운전을 해야(대통령령에 규정해야) 음주운전이 되는데(위법하지 않은데), 음주를 하지 않았음에도(법률에 위임 규정이 없음에도) 운전을 하였으므로(대통령령에 규정하였으므로) 음주운전이 아니라고 볼 수 없다(위법하다고 할 수 없다)고 판시한 것과 유사하며, 납득하기 어렵다. 위 4.에서 본 바와 같이 구 보안업무규정에 의한 신원조사는 위법이므로, 대상판결은 원고의 손해배상 청구를 인용하였어야 할 것이다. 나. 대상판결은 대법원 종합법률정보 등에서 검색되지 않는다. 따라서 그동안 학문적 비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필자도 열람·복사 청구를 하여 대상판결을 입수하였다). 대상판결은 보안업무규정에 의한 신원조사의 법률적 근거 유무에 관한 유일한 판결로 보이고 선례적 가치가 충분하므로 마땅히 공개되어야 한다. 다. 국정원은 대상판결을 보안업무규정에 의한 신원조사가 법률적 근거가 있다는 점에 대한 근거로 계속 이용하고 있다. 국가인권위회의 위 청문회(2005년 1월 18일)에서, 국정원은 대상판결을 신원조사의 법적근거로 주장하였다(위 청문회 자료집, 3면). 2020년 12월 31일 보안업무규정이 개정되었다(대통령령 제31354호). 개정 과정에서 국정원의 입법예고에 대해, 국정원감시네트워크는 보안업무규정의 신원조사 규정은 위법이므로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출하였다. 이에 대해 국정원은 미반영으로 회신하면서 국정원의 신원조사 업무는 대상판결 등을 통해 합법적인 업무로 인정받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라. 대한민국 모든 판사들은 임용되기 직전에 신원진술서를 작성·제출하여 국정원의 신원조사를 받아야 한다. 이 신원진술서를 토대로 존안자료가 작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겨레 1997년 3월 17일 기사의 '공무원은 임용 순간부터 존안자료 기록이 시작된다'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작성·업데이트된 존안자료가 이후 판사를 포함한 공무원들에게 국정원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수단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위 한겨레 기사의 "안기부 전직 실장급 간부는 '존안자료야말로 안기부가 가진 힘의 실질적 원천이다'고 말한다"는 내용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 결국 국정원이 영향력을 행사하여 대상판결을 비공개로 함으로써 학문적 비판은 피하면서, 신원조사에 법적 근거가 없다는 비판을 받을 때는 대상판결을 국정원에 유리하게 이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 대상판결은 그보다 약 20년과 15년 이후에 선고된 위 2016두32992, 2012두23808 전원합의체판결 등에 의해서 실질적으로 변경(폐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016두32992 판결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이하 '노동조합법')이 노동조합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을 두지 않고 이를 시행령에 위임하는 명문의 규정도 두고 있지 않음에도, 법외노조 통보를 규정한 노동조합법 시행령이 헌법상 법률유보원칙에 위반되어 그 자체로 무효라고 판시하였고, 2012두23808 판결도 유사하다. 6. 결어 '보안업무규정(대통령령)'에 의한 신원조사는 위법하다. 대상판결은 더 이상 원용되지 않아야 하며, 공개되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무효인 보안업무규정의 신원조사규정을 즉시 삭제해야 한다. 엄기섭 변호사 (법무법인 동인)
여권
신원조사
출국
국가배상
엄기섭 변호사 (법무법인 동인)
2021-10-14
조세·부담금
행정사건
소프트웨어 도입대가의 구별기준
I. 서론 대상판결에서는 '내국법인이 외국법인으로부터 수입하는 소프트웨어 대가의 법적성격'이 무엇인지 문제되었다. 이는 최근 납세자와 과세관청 간 다툼이 첨예하게 발생하는 쟁점이다. 대법원은 2000. 1. 21. 선고 97누11065 판결 등을 통해 그 판단기준을 제시한 바 있는데, 대상판결은 그 판단기준을 적용한 최근 사례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Ⅱ. 대상판결의 개요 1. 사실관계 원고는 소프트웨어 개발회사인 미국 PTC 그룹의 자회사로서 PTC와 소프트웨어 배급계약을 체결한 다음 PTC에 PTC가 개발한 소프트웨어(이하 '쟁점 소프트웨어'라 한다)의 국내 판매 및 유지보수 용역 수입에 대하여 소프트웨어 도입대가 및 라이선스 수수료 명목으로 지급하였다(이하 '쟁점 지급금'이라 한다). 2. 대상판결의 요지 원고는 쟁점 지급금이 범용화된 것으로서 불특정 다수인에게 판매되는 '상품'의 수입대가라고 주장하였다. 이 경우 PTC의 사업소득이 되어 PTC의 고정사업장이 없는 국내에서는 과세권이 없게 된다. 반면 피고는 소프트웨어에 포함된 '노하우'에 대한 도입대가로 보고 원고에게 원천징수세액 및 그 가산세를 부과하는 과세처분을 하였다. 이 경우 PTC의 국내원천 사용료소득이 되므로 국내에서 15%의 세율로 원천징수 되기 때문이다. 제1심 판결은 쟁점 소프트웨어 도입이 노하우를 도입한 것이므로 피고의 처분은 적법하다고 보았다. 대상판결은 제1심판결의 결론을 정당한 것으로 수긍하였다. Ⅲ. 평석 1. 소프트웨어 도입대가의 소득 구분 기준 가. 관련 법리 법인세법 제93조 제8호 나목에서는 외국법인의 국내원천소득으로 '산업상·상업상·과학상의 지식·경험에 관한 정보 또는 노하우'를 규정하고 있다. 이는 통상 '노하우'라 일컫는 발명, 기술, 제조방법, 경영방법 등에 관한 비공개 기술정보를 사용하는 대가를 말하므로 내국법인이 외국법인으로부터 도입한 소프트웨어의 기능과 도입 가격, 특약 내용 기타 제반 사정에 비추어 그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단순히 상품을 수입한 것이 아니라 노하우 또는 그 기술을 도입한 것이라면 그 도입대가는 그 외국법인의 국내원천소득인 사용료소득에 해당하여 법인세법 제98조에 정한 원천징수의무자인 내국법인에 대하여 법인세를 징수할 수 있다(대법원 97누11065 판결 등). 나. 구체적인 판단기준 1) 핵심적 판단기준 가장 핵심적인 판단기준으로서 소프트웨어에 노하우가 '포함'되어 있어야 하고 도입자가 노하우를 '전수'받아 사용하여야 한다(조인호, 대법원판례해설 제34호, 594쪽 참조). 사용료소득은 '노하우 전수에 대한 대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선 해당 소프트웨어에 노하우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노하우란 '공개되지 아니한 고도의 기술적 정보'를 의미하므로 다른 업체가 통상적으로 보유하는 전문적 지식, 특별한 기능 정도에 불과한 경우에는 사용료소득이 아니다(대법원 1986. 10. 28. 선고 86누212 판결 등). 소프트웨어에 노하우가 포함되어 있다고 보기 위해서는 그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이 국내 기술수준으로는 불가능한지 여부가 '일응'의 기준이 되지만 그러한 이유만으로 노하우 전수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고도의 기술로써 만들어진 소프트웨어라 하더라도 수입하는 자가 '상품'으로 사용하는 데 그친다면 노하우의 전수가 이루어진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소프트웨어에는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느 것이나 제작자의 노하우가 반영되어 있게 마련이므로 단순히 제품을 정하여진 용법에 따라 '사용'하였다는 이유만으로는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앞의 판례해설 594, 595쪽 참조). 따라서 완성된 소프트웨어를 공개된 기능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는 '상품의 수입'으로 보아야 하고 소프트웨어 제작기법 또는 일반에 공개되어 있지 않은 산업상의 노하우를 전수하는 정도에 이르러야 '노하우의 전수'가 있었던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국내도입자가 공급자와 판매대리점 계약을 체결하여 공개된 기능 그대로의 소프트웨어를 수입하여 불특정 다수의 고객들에게 판매한 정도에 그친 경우에는 노하우의 전수가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대법원 1997. 12. 23. 선고 97누2986 판결 참조). 판매대리점은 수입된 소프트웨어를 판매하는 역할만을 수행하므로 그 과정에서 비공개 기술정보 등 노하우가 전수되었다고 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반면, 비공개원시코드 자체의 이전이 이루어져 해당 소프트웨어의 제작기법이 전수되는 경우에는 노하우 전수에 해당할 수 있다. 또한 특정 고객의 특수한 요구에 맞게 소프트웨어를 개작하여 수입하는 경우 노하우 전수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객이 필요로 하는 노하우가 외부에 공개되지 않은 채 개별적으로 전수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프트웨어 수입대가가 사용료소득에 해당한다고 보아 과세하려면 과세관청으로서는 먼저 해당 소프트웨어에 '어떤 노하우가 포함되어 있는지'를 밝히고 그 노하우가 수입자에게 '전수되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2) 부수적 고려사항 소프트웨어 대가가 고가라는 이유만으로 노하우 도입의 근거로 볼 것은 아니다(앞의 판례해설, 595쪽). 소프트웨어가 단순 상품으로 거래되는 경우에도 고가인 경우가 충분히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밀준수의무 존재만으로는 노하우 전수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없다(대법원 97누2986 판결 참조). 소프트웨어 제품 거래계약에 비밀준수의무 등을 포함시키는 이유는 노하우 도입과 무관하게 불법복제 또는 역전환 등을 방지할 목적으로 공급자 입장에서 구매자의 권리를 제한하는데 그 취지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앞의 판례해설, 595, 596쪽). 교육, 유지보수, 컨설팅 용역이 제공되었다는 사정 역시 소프트웨어를 상품으로서 수입하는 경우에도 나타날 수 있으므로 노하우 도입의 독자적 기준으로 삼을 수 없다. 교육 용역은 사용방법이 복잡한 소프트웨어의 경우에도 고객의 필요에 따라 제공될 수 있다. 유지보수 용역 또한 소프트웨어에 대한 업데이트, 패치, 오류시정 등을 위한 목적에서 제공되는 것이므로 상품으로 수입되는 경우에도 제공될 수 있다. 컨설팅 용역은 고객의 컴퓨터 환경을 점검하여 필요한 환경설정 등을 해주는 것으로서 소프트웨어에 내장된 기능을 활용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는 상품 수입 시에도 가능하다. 2. 대상판결에 대한 평가 대상판결은 ① 노하우 전수에 관한 입증이 영업비밀에 해당하여 어렵다는 이유로 '어떤 노하우 도입이 있었는지'에 관한 입증책임을 전도하고 ② 상품 수입 시에도 나타날 수 있는 부수적·지엽적 사정들만을 이유로 노하우 도입으로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타당한지 의문이 있다. 대상판결은 과세관청의 입증책임과 관련하여 "쟁점 소프트웨어의 도입이 단순한 상품의 수입과는 구별되는 노하우 또는 그 기술의 도입에 해당한다는 점을 주장·증명하면 충분하고 해당 노하우 또는 기술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인지 주장·증명하여야 한다고 볼 수는 없다(그와 같이 노하우 또는 기술의 구체적인 내용은 일반적으로 영업비밀로 분류되어 과세관청이 이를 정확히 밝히는 것은 매우 어려워 보인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과세관청은 각 소프트웨어별로 어떠한 노하우가 '포함'되어 '전수'되었는지 여부를 입증하여야 한다는 것이 대법원의 확고한 판례이다. 만약 이러한 입증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고 상품 수입시에도 나타나는 사정들만 존재한다면 입증책임을 다하지 못한 과세관청을 패소시켜야 하고 영업비밀에 해당하여 밝히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그 입증책임을 면책시켜주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또한, 대법원 판례법리에서 과세관청에게 입증을 요구하는 '노하우의 포함 및 전수'는 결코 납세자의 영업비밀까지 침해하라는 것이 아니다. 과세관청으로서는 지사와 본사 사이에서 '어떠한 노하우가 전수'되었는지 입증하면 충분하고 이는 영업비밀과 무관하다. 뿐만 아니라 대상판결이 노하우 도입으로 본 논거를 살펴보면 모두 상품 수입 시에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거나 판단 근거가 불분명해 보인다. 대상판결이 주된 근거로 든 국내에서의 개발·공급이 힘들다는 사정, 교육·유지보수·컨설팅 용역이 제공된 사정, 비밀유지약정이 존재하는 사정 등은 노하우 도입 시에만 나타나는 사정이 아니고 상품 수입 시에도 충분히 나타날 수 있는 사정에 해당한다. 오히려 쟁점 소프트웨어는 사전 제한 없이 불특정 다수의 고객을 상대로 공개된 기능 그대로 판매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용료소득의 개념에 해당하는 산업상 노하우에 관한 '비공개' 기술정보가 전수되었다고 볼 수 없다. Ⅳ. 결론 최근 해당 쟁점과 관련한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고 동일한 쟁점임에도 사실관계 또는 어떤 판단기준에 중점을 두는지에 따라 그 판단이 엇갈리는 사례들이 병존하고 있다. 이는 기존의 대법원의 판시법리가 워낙 간략한 탓에 기인한 것으로서 구체적인 판단기준들을 중심으로 한 대법원의 새로운 법리(세부법리) 판시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임한솔 변호사 (법무법인 광장)
법인세
노하우
사용료소득
임한솔 변호사 (법무법인 광장)
2021-04-12
금융·보험
민사일반
대리의 본질과 표현대리 및 대리권 남용행위
I. 사실관계와 판시사항 1. 피고 乙은행 ○○지점의 당좌업무 대리 A는 재벌기업 대표이사 B로부터 대가를 약속받고 다른 은행보다 높은 이자를 선지급하는 방식으로 예금을 유치하여 사업자금으로 지원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원고 甲은 대리인 C를 통해 A와 예금계약을 체결하여 1억 원을 乙에 예치하였다. A는 그 중 100만 원을 입금 처리하고 나머지는 원장에 기재하지 않은 채 B에게 지급하는 등, 4년간 약 1,066억 원을 예치하여 그 중 512억 원을 B에게 제공하였다. 甲은 乙을 상대로 만기 예금액 및 약정이자의 반환청구소송을 제기하였다. 2. 제1심법원(84가합366)과 원심법원(84나2428)은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고, 대법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대리권 남용법리를 적용하여 A의 대리행위에 따른 예금계약의 효과를 乙에게 귀속시킬 수 없으므로 乙은 甲에게 예금을 반환할 책임이 없다고 하면서, 이 부분 원심판결을 파기·환송하였다. 대법원은 A가 乙의 당좌업무 대리인으로서 C와 예금계약을 체결한 것은 권한을 넘어선 대리행위이지만, 甲에게 A의 대리권이 있다고 믿을 만한 정당한 사유가 있으므로, 민법 제126조의 표현대리가 성립하여 甲과 乙의 예금계약은 유효하다고 전제하였다. 그러나 A는 예금계약을 통하여 甲의 이익을 꾀한 대리권 남용행위를 하였고 甲이 이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으므로, 예금계약에 따른 책임을 乙에게 물을 수 없다고 판시하였다(86다카1004). II. 평석 1. 우리민법 규정과 대리의 본질 (1) 대리의 본질과 관련하여 우리민법은 대리인행위설의 입장이라고 한다. 대리효과의 귀속은 대리인의 대리의사에 따른 법률행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송덕수). 나아가 민법 제114조 이하 규정이 대리의 효과의사대로 법률효과가 발생하도록 하며, 특히 제116조 제1항은 우리민법이 대리인행위설을 취하는 실정법적 근거일 뿐만 아니라(곽윤직, 고상룡), 이에 따르면 대리인행위설만 입론이 가능하다고 한다(지원림). 이에 반하여 독일에서 제안된 행위규율분리설은 수권행위와 대리행위를 단일한 하나의 행위로 파악하고, 대리인의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로서 ‘행위’ 측면과 본인에 대한 효과귀속으로서 ‘규율’ 측면을 구분하되, 행위 주체는 대리인이지만 규율의 주체는 본인으로, 규율측면이 본질적인 부분이어서 대리효과가 본인에게 직접 발생한다고 설명한다(이영준). (2) 대리인행위설과 행위규율분리설에 따른 법적 취급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이 대리권 남용행위와 표현대리이다. 대리권이 적법하게 수여된 경우 다른 요건이 충족되면 대리효과가 귀속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대리권 남용법리가 이에 해당한다. 반대로 대리권이 수여되지 않았다면 대리효과가 귀속되지 않아야 함에도 그 귀속을 인정하는 경우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표현대리이다. 2. 대리권 남용법리에 대한 대리인행위설 및 행위규율분리설의 입장 (1) 대리권을 적법하게 보유한 대리인이 자기 또는 상대방의 이익을 위하여 대리행위를 한 결과 본인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대리권 남용행위라고 한다. 이는 대리행위의 요건을 모두 충족한 상태여서 대리효과의 귀속을 부정할 수 없다. 다만 상대방이 대리인의 배임의도를 알았거나 알 수 있었던 경우까지 대리효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상대방의 악의 또는 (중)과실을 근거로 대리효과의 귀속을 차단시키는 법률구성을 ‘대리권 남용법리’라고 한다. 이는 대리권 수여라는 측면에서 유권대리로 취급되어야 하지만 대리효과의 귀속이 차단된다는 측면에서는 무권대리가 된다. 이에 대하여 대리인행위설은 비진의표시의 효과에 관한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를 유추적용하거나 신의칙 내지 권리남용금지원칙 위반의 효과에 따라 대리효과의 귀속을 차단한다. 반면 행위규율분리설은 배임행위를 한 대리인을 무권대리로 취급하여 동일한 결론에 이른다. (2) 비진의표시 유추적용설은 대리권 남용행위를 비진의표시의 외양과 유사하게 파악하여 대리행위로서는 유효하게 성립하지만, 대리인의 배임의사를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 수 있었을 경우에는 민법 제107조 제1항 단서의 취지를 유추하여 대리행위의 효력을 부정한다. 대다수 판례의 입장이다(74다1452, 97다24382, 2008다13838). 한편 권리남용설 내지 신의칙위반설은 대리인의 배임의사를 상대방이 알았거나 알지 못함에 중과실이 있는 경우까지 대리효과의 귀속을 인정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며, 더욱이 상대방이 본인에 대하여 그 효과를 주장하는 것은 권리남용이라고 한다(강태성, 홍성재, 명순구). 법인의 대표권 남용에 관한 사례이지만 판례 중에도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경우가 있다(86다카1522, 89다카24360). (3) 행위규율분리설은 대리관계를 대리인의 대리 ‘행위’에 대한 측면과 효과귀속에 대한 본인의 ‘규율’ 측면으로 이해하고, 대리효과 귀속의 본질은 본인과 상대방의 규율에 달렸다고 한다. 이에 따르면 대리권 남용행위는 대리권이 있더라도 본인에 대한 대리효과의 귀속이 차단되므로 무권대리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추가적으로 표현대리 규정에 따라 대리효과가 귀속될 수 있다는 입장(손지열)과 배임행위의 명백성을 근거로 구분하는 입장이 있다(백태승). 3. 표현대리에 대한 대리인행위설 및 행위규율분리설의 입장 (1) 우리민법은 표현대리를 대리권수여의 표시(제125조), 대리권의 범위 초과(제126조), 대리권 소멸 후의 대리행위(제129조)로 나누고 있다. 본인이 이러한 각각의 외관을 제공하였으므로 이에 관하여 선의·무과실인 상대방은 대리효과의 귀속을 주장할 수 있다. 표현대리는 대리권이 없다는 측면에서 무권대리이지만, 본인에게 효과가 귀속된다는 측면에서 유권대리로 취급할 수 있다. (2) 대리인행위설에 의하면 표현대리는 무권대리에 속한다(양형우). 우리 판례 역시 명백하게 표현대리가 성립되었다고 하여 무권대리의 성질이 유권대리로 전환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83다카1489). (3) 행위규율분리설은 표현대리를 유권대리로 이해한다. 대리의 본질은 본인과 상대방 사이의 규율인데, 표현대리는 본인의 외관 형성과 상대방의 신뢰에 기초하여 본인에게 대리효과를 귀속시키므로 유권대리의 아종이라고 한다. 특히 독일민법에서 인정되는 외부적 수권행위 개념이 유용하다(이영준). 독일민법은 대리권을 수여하는 방법으로 본인이 대리인에게 직접 대리권을 수여하는 방법(내부적 수권행위)과 본인이 대리행위의 상대방이 될 제3자에게 대리권을 수여하는 방법(외부적 수권행위)으로 나누어 규정한다(§167 Abs. 1). 그리고 외부적 수권행위의 구체적인 방법으로 대리행위의 상대방에 대한 의사표시(§170), 대리행위의 상대방에 대한 특별통지와 다수의 제3자에 대한 공고(§171 Abs. 1) 또는 대리권 증서의 교부와 제시(§172 Abs. 1)를 인정하고 있다. 4. 표현대리에 대한 대리권 남용법리의 적용과 판결의 검토 (1) 앞의 판결에서 A는 乙은행의 당좌업무에 관한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甲과 예금계약을 체결하였다. 乙은행은 그 지점장을 통해 A에 대한 대리권의 외관을 제공하였는데 甲이 이를 신뢰하였으므로, A에게 민법 제126조에 따른 표현대리가 성립하여 甲과 乙 사이에 예금계약이 인정되었다. 이에 더하여 A가 甲에게서 예금으로 교부받은 금전을 횡령하고 甲에게 기준을 넘어서는 이자를 지급한 것은 대리권 남용행위이다. 甲이 이러한 A의 배임의도를 알았으니 대리권 남용법리에 따라 乙은행에 대한 A의 대리효과로서 예금계약은 성립할 수 없다. 이것이 판결의 결론이었다. (2) 대리인행위설은 표현대리를 무권대리로 이해하였고 대리권 남용법리는 유권대리에 관하여 성립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논리적으로 무권대리인 A의 표현대리에 대하여 유권대리에 관한 대리권 남용법리는 적용할 수 없다. (3) 행위규율분리설에 의하더라도 표현대리는 유권대리라고 하면서 대리권 남용법리를 적용하면 A의 동일한 행위가 갑자기 무권대리로 변경되는 기이한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유권대리로 취급된 표현대리가 대리권 남용법리의 적용에 의하여 무권대리가 된다면, 그 무권대리는 다시 표현대리의 요건 충족으로 유권대리가 되는 순환론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대리권 남용법리의 적용으로 이론상 무권대리가 되더라도 대리권 남용행위를 한 대리인에게는 실제로 대리권이 존재하므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대리권이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4) 그러므로 대리인행위설에 의하면 A의 행위가 무권대리였다가 유권대리로 바뀌고, 행위규율분리설에 의하면 유권대리였다가 무권대리로 변경되는 결과가 된다. 그렇다면 위 판결이 대리인행위설에 따른 것인지, 행위규율분리설에 따른 것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A는 乙은행으로부터 수여받은 대리권의 범위를 넘어 甲과 예금계약을 체결하는 하나의 동일한 행위를 했을 뿐인데, 대리의 본질에 관한 두 견해에 의하여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유권대리 또는 무권대리로 혼란스럽게 법적 성질이 결정되는 것은 납득되지 않는다. 정상현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표현대리
대리권남용
예금계약
정상현 교수 (성균관대 로스쿨)
2020-01-20
형사일반
의료법 제33조 제8항에 관한 대법원 판결평석
I. 서론 보건의료분야를 전문으로 하는 법률가라면 한 명의 의료인이 둘 이상의 의료기관의 경영에 참여하는 행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다양한 법적 그리고 정책적 논쟁이 전혀 낯설지 않을 것이다. 한 명의 의료인이 여러 의료기관의 경영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이 국민의 후생 측면에서 바람직한 것인지 아닌지가 정책적 논쟁이라면, 의료인의 복수 의료기관 경영을 금지하는 법률 규정이 과연 헌법합치적일 수 있는지가 주요 법적 논쟁 가운데 하나라고 할 것이다. 이 헌법 차원의 법적 논쟁에 못지 않은 또 다른 중요한 법적 논쟁은 의료인의 복수 의료기관 개설을 금지하는 의료법 규정의 적용범위에 관한 법해석론 차원의 논쟁이다.1) 그런데 최근 대법원이 내린 2018도3672 판결(이하 “대상 판결”)이 새로운 법해석론 차원의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기에 이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주1] 물론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의료법 해당 규정의 헌법합치성 판단은 동 규정의 합리적인 해석을 전제로 이루어져야 하므로, 이 두가지 법적 논쟁은 완전히 독립되고 분리된 논쟁이 아니라 상당히 많은 접촉면을 갖고 있는 논쟁이라고 하겠다. II. 복수개설금지 조항의 변천 및 법원의 해석 이 글에서 분석하려는 판결을 살펴보기에 앞서, 의료인의 의료기관 복수 개설 금지를 규정한 의료법 제33조 제8항의 변천 과정을 가볍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2012년 개정 이전의 복수개설 금지 조항 및 법원의 해석 해당 규정인 의료법 제33조 제8항은 2012년 2월 1일 현재의 내용으로 개정이 되었는데, 개정되기 직전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기술의 편의를 위하여 이하에서는 이를 “구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이라고 부른다.) 제33조 (개설 등) ⑧ 제2항 제1호의 의료인은 하나의 의료기관만 개설할 수 있다. 다만, 2 이상의 의료인 면허를 소지한 자가 의원급 의료기관을 개설하려는 경우에는 하나의 장소에 한하여 면허 종별에 따른 의료기관을 함께 개설할 수 있다. 1994년 1월 7일 의료법 개정을 통하여 처음 등장한 위 조항은2) 의사가 개설할 수 있는 의료기관의 수를 1개소로 제한함으로써, 의사가 의료행위를 직접 수행할 수 있는 장소적 범위 내에서만 의료기관의 개설을 허용하고, 의사 아닌 자에 의하여 의료기관이 관리되는 것을 그 개설단계에서 미리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3) [각주2] 의료기관 중복개설 금지 조항의 위치는 의료법 제30조 및 제33조 제2항을 거쳐 지금의 제33조 제8항에 이르고 있다. 의료기관 복수개설 금지 규정의 변천에 관하여는 김준래, “네트워크병원과 의료기관 복수 개설ㆍ운영 금지 제도에 관한 고찰,” 의료법학, Vol. 17, No. 2 (2016), pp.281–313 [각주3] 대법원 2003. 10. 23. 선고 2003도256 판결 위 조항에 담긴 “개설”의 의미에 대하여 대법원은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있는 의사가 다른 의사의 명의로 또 다른 의료기관을 개설하여 그 소속의 직원들을 직접 채용하여 급료를 지급하고 그 영업에 따라 발생하는 이익을 취하는 등 새로 개설한 의료기관의 경영에 직접 관여한 점만으로는 다른 의사의 면허증을 대여받아 실질적으로 별도의 의료기관을 개설한 것이라고 볼 수 없으나, 다른 의사의 명의로 개설된 의료기관에서 자신이 직접 의료행위를 하거나 무자격자를 고용하여 자신의 주관 하에 의료행위를 하게 한 경우는 비록 그 개설명의자인 다른 의사가 새로 개설한 의료기관에서 직접 일부 의료행위를 하였다고 하더라도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한 위 의사로서는 중복하여 의료기관을 개설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았다.4) [각주4] 대법원 2003. 10. 23. 선고 2003도256 판결, 대법원 2008. 9. 25. 선고 2006도4652 판결. 대법원의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는,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의 명의만 빌리고 자신의 자본으로 의료기관을 개설한 경우는 경제적 의미에서 의료기관의 중복개설이라고 할 여지가 있을지 모르나, 타인의 명의를 빌린 의료인이 자신의 명의로 개설한 의료기관에서의 의료행위에만 전념하고 있다면 이를 의료기관 이중개설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본 것이라고 분석한 견해가 유력하다.5) [각주5] 장연화, “의료법상 의료기관의 개설제한에 관한 고찰,” 법학연구, Vol. 12, No. 2 (2009), pp.279–300 2. 2012년 개정 법률 및 법원의 해석 의료인의 의료기관 복수개설 금지 조항은 1994년 제정 이후 실질적인 내용의 변화 없이 조문번호나 문구의 변경과 같은 형식적인 개정만을 거쳐오다가, 제11대 국회에서 변화를 겪게 된다. 당시 양승조 의원이 대표 발의한 개정안은 의료법에 대한 다른 개정안과 통합 가결되어 2012년 2월 1일부터 시행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기술의 편의를 위하여 이하에서는 이를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이라고 부른다.) 제4조 (의료인과 의료기관의 장의 의무) ② 의료인은 다른 의료인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하거나 운영할 수 없다. 제33조 (개설 등) ⑧ 제2항 제1호의 의료인은 어떠한 명목으로도 둘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할 수 없다. 다만, 2 이상의 의료인 면허를 소지한 자가 의원급 의료기관을 개설하려는 경우에는 하나의 장소에 한하여 면허 종별에 따른 의료기관을 함께 개설할 수 있다. 가. 2016년 대법원 판결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을 적용한 리딩 케이스로는 2016도11407 판결 (이하 “2016년 대법원 판결”)이 있다. 판결문에 나타난 사실관계를 간단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병원을 운영하던 甲과 B병원을 운영하던 乙 2인의 의사가 각자의 병원을 교환하기로 하는 계약을 체결하고 개설자 명의 변경을 통하여 甲은 B병원을, 乙은 A병원을 각자 자신의 명의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악화된 乙의 부채사정으로 인하여 A병원의 재산에 대하여 乙의 채권자들이 강제집행을 해오자 A병원의 개설자를 다시 乙에서 미국에 거주하는 丙으로 변경하였다. 그런데 이후 丙은 A병원에 출근하여 진료업무를 전혀 수행한 바 없고, 乙은 甲과 고용계약을 체결하고 A병원에서 의료행위를 하면서 甲으로부터 일정한 급여를 지급받았으며, 甲은 자신의 B병원 직원을 A병원에 출근하도록 하여 자금관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고, 임금지급, 물품 구매 등 지출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을 행사하였으며, 직원을 통하여 A병원의 수익을 취득하였다. 이 사건에서 대법원은 (A) “이미 자신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면서 의료행위를 하고 있는 의사가 다른 의사를 고용하여 그 의사 명의로 새로운 의료기관을 개설하고 그 운영에 직접 관여하는 데서 더 나아가 그 의료기관에서 자신이 직접 의료행위를 하거나 비의료인을 고용하여 자신의 주관 하에 의료행위를 하게 한 경우에는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고 있는 위 의사로서는 중복하여 의료기관을 개설한 경우에 해당”하고, (B)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면서 의료행위를 하고 있는 의사가 다른 의사가 개설·운영하고 있는 기존 의료기관을 인수하여 의료법 제33조 제5항 등에 따른 개설자 명의변경 신고 또는 허가를 받지 아니한 채 또는 다른 의사의 면허증을 대여받아 그 의사 명의로 개설자 명의변경 신고 또는 허가를 받아 종전 개설자를 배제하고 그 의료기관의 시설과 인력의 관리, 의료업의 시행, 필요한 자금의 조달, 그 운영성과의 귀속 등 의료기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는 등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운영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는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고 있는 위 의사로서는 중복하여 의료기관을 운영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판시하였다. 보다시피 (A) 부분은 앞에서 본 이전 대법원 판례와 차이가 없다.6) 그러나 (B) 부분은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에 신설된 의료기관 중복 운영 금지조항을 적용한 첫 대법원의 판결이므로 선례로서의 의미가 큰데, 대법원은 이 판결을 통해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에 새로 추가된 행위 태양인 의료기관 중복 운영이란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운영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라는 기준을 제시하였다.7)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사실관계 하에서 대법원은 甲이 A병원을 자신의 B병원과 함께 중복하여 운영하였다고 보아 피고인의 유죄를 인정하였다. 2016년 대법원 판결의 이와 같은 기준은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에 대하여 처음 제시된 기준이지만, 비의료인의 의료기관 개설금지 규정8) 위반사건에서 이미 제시된 바 있는 비의료인의 의료기관 “운영” 기준과 같은 내용이다.9) [각주6] 실제로 이 판결에서도 대법원 2003. 10. 23. 선고 2003도256 판결, 대법원 2008. 9. 25. 선고 2006도4652 판결을 인용하고 있다. [각주7] 김준래, “네트워크병원과 의료기관 복수 개설ㆍ운영 금지 제도에 관한 고찰,” 의료법학, Vol. 17, No. 2 (2016), pp.285는 동 판결의 의미를 “추가 운영하는 의료기관에서 직접 의료행위 등을 하지 않더라도 실질적주도적으로 의료기관을 운영하였다면, 이는 의료법 제33조 제8항에 위반된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동 판결이 요구하는 “종전 개설자 배제”라든가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운영행위”의 요소를 생략하고 있으므로 동의하기 어렵다. [각주8] 의료법 제33조 제2항 [각주9] 대법원 2011. 10. 27. 선고 2009도2629 판결 (“비의료인이 이미 개설된 의료기관의 의료시설과 의료진을 인수하고 개설자의 명의변경절차 등을 거쳐 그 운영을 지배·관리하는 등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개설·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개설·운영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에는 의료법 제30조 제2항에서 금지하는 비의료인의 의료기관 개설행위에 해당한다.”) 나. 2018년 대법원 판결 그런데 대상 판결은 2016년 대법원 판결과 비교하여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의 범위를 확대하여 해석하고 있다고 볼 여지가 있다. 이 사건의 상고심과 하급심 판결문에는 나타난 사실관계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012년부터 A치과의원을 운영하고 있던 甲은 2013년경 乙과 지분투자 및 공동 운영 합의를 맺고 乙이 자금을 투자하여 B치과를 개설하여 진료를 하되 甲은 회계와 마케팅을 담당하기로 하였다. 甲은 또한 2014년경 丙과 동업계약 및 지분 협의 계약을 맺었는데, 그에 따라 丙이 C치과를 개설하여 운영하였고 갑은 C치과에 30% 정도의 지분만 보유하였다. 이러한 사실관계 하에서, 1심은 甲이 乙이나 丙의 명의를 대여하여 B치과 또는 C치과를 개설 및 운영하였다거나, B치과 또는 C치과에서 직접 의료행위를 하거나 비의료인을 고용하여 자신의 주관 하에 의료행위를 하게 하였다는 증거가 없으므로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보아 무죄를 선고하였다. 그러나 항소심에서는 “甲이 乙의 명의를 빌려 B치과를, 丙의 명의를 빌려 C치과를 각 개설하여 운영하였고, 각 치과를 운영함에 있어 그 시설과 인력의 관리, 의료업의 시행, 필요한 자금의 조달, 그 운영성과의 귀속 등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한 사실을 인정했다. 이 사건의 상고심에서 대법원은 (가) “의료기관의 중복 개설이란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한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 등의 명의로 개설한 의료기관에서 직접 의료행위를 하거나 자신의 주관 아래 무자격자로 하여금 의료행위를 하게 하는 경우’”라고 판시하였고, (나) “그와 구분되는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이란 ‘의료인이 둘 이상의 의료기관에 대하여 그 존폐·이전, 의료행위 시행 여부, 자금 조달, 인력·시설·장비의 충원과 관리, 운영성과의 귀속·배분 등의 경영사항에 관하여 의사 결정 권한을 보유하면서 관련 업무를 처리하거나 처리하도록 하는 경우’”를 뜻한다고 보았다. 특히 (다)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할 때에는 위와 같은 운영자로서의 지위 유무, 즉 둘 이상의 의료기관 개설 과정, 개설명의자의 역할과 경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지목된 다른 의료인과의 관계, 자금 조달 방식, 경영에 관한 의사 결정 구조, 실무자에 대한 지휘·감독권 행사 주체, 운영성과의 분배 형태, 다른 의료인이 운영하는 경영지원 업체가 있을 경우 그 경영지원 업체에 지출되는 비용 규모 및 거래 내용 등의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둘 이상의 의료기관이 의사 결정과 운영성과 귀속 등의 측면에서 특정 의료인에게 좌우되지 않고 각자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특정 의료인이 단순히 협력관계를 맺거나 경영지원 혹은 투자를 하는 정도를 넘어 둘 이상의 의료기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기준 하에 대법원은 甲에 대하여 의료기관 중복 개설·운영 금지 원칙 위반을 인정한 항소심의 판단을 지지하였다. 다. 2016년 판결과 대상 판결의 비교 의료기관 중복 “개설” 금지에 관한 2016년 대법원 판결의 (A) 부분과 대상 판결의 (가) 부분을 비교하면 아무런 변화가 없다. 반면 양 판결에 나타난 의료기관 중복 “운영”의 기준은 외견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2016년 대법원 판결은 (위 (B) 부분) 의료기관 중복 운영의 핵심을 이미 자신의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의사가 다른 의료기관에서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운영행위를 한 것에 둔 반면, 대상 판결은 (위 (나) 부분)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이라는 요소를 명시하지 아니한 채 “의료인이 둘 이상의 의료기관에 대하여 경영사항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을 보유하면서 관련 업무를 처리한 경우”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대상 판결은 또한 제반 사정을 바탕으로 둘 이상의 의료기관이 의사 결정과 운영성과 귀속 등의 측면에서 특정 의료인에게 좌우되지 않고 각자 독자성을 유지하고 있는지, 아니면 특정 의료인이 단순히 협력관계를 맺거나 경영지원 혹은 투자를 하는 정도를 넘어 둘 이상의 의료기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고 했다 (위 (다) 부분). 이와 같이 2016년 대법원 판결은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에 해당하기 위하여는 새로운 운영자로 인하여 종전 개설자가 배제되고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가 단절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반면, 대상 판결은 종전 개설자의 운영이 배제되는 정도에 이르지 않더라도 제반사정을 기초로 여전히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 읽힐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대상 판결은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에 대하여 2016년 대법원 판결이 제시한 기준을 완화하고 있는 것인가? 이 글은 결론적으로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 - 즉, 대상 판결은 여전히 의료기관 중복 운영 금지 조항에 관하여 2016년 대법원 판결과 동일한 해석을 한다는 입장 - 을 취한다. 그 논거는 뒷부분에서 더 자세히 제시하기로 하고, 그렇게 보지 않을 경우, 즉 대상 판결이 2016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여 의료기관 중복 운영의 기준을 완화하고 있다고 볼 경우에 생기는 문제점들을 먼저 지적하겠다. III. 대상 판결이 판례 변경이라고 볼 경우의 문제점 1. 판결의 시점 우선 대상 판결이 내려진 시점이 법률 실무가들에게 상당히 의아하게 느껴질 것이다. 왜냐하면 의료기관 중복개설 금지조항과 관련하여 국내 사법부 최고심급의 결정 또는 심리를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다른 의사를 병원장으로 고용해 여러 개의 병원을 운영한 의료인이 의료법 제33조 제8항 위반을 이유로 기소된 형사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에 회부되어 심리를 앞두고 있다.10) 또한 의료법 제33조 제8항에서 둘 이상의 의료기관 개설·운영을 금지한 것이 명확성 원칙, 과잉금지원칙, 평등원칙에 반하고 수규범자의 직업수행의 자유를 침해함을 이유로 헌법소원이 제기되어 지난 2016년 3월 10일 공개변론이 열린 바 있고 그 결정이 머지않아 내려질 것으로 기대되는 상태이다.11) [각주10] 법률신문 뉴스 2016.6.14.자 “'월급 병원장 고용' 여러 병원 개설한 의사 유·무죄…대법원 전합 회부” [각주11] 2015헌바34 의료법 제4조 제2항 등 위헌소원 상황이 이러하다면 피고인 구속 사건도 아닌 마당에 머지않아 내려질 헌법재판소의 결정과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기다리지 않고 지금 시점에서 의료법 제33조 제8항 적용 대상인 판결을 굳이 내릴 필요가 없었다. 잠재적인 재심의 대상을 늘려 오히려 소송경제를 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심지어는 2016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는 취지의 판결이라면 지금 시점에서 이와 같은 판결을 내릴 필요가 과연 있었는가 의문이 생긴다. 2. 소부(小部)에서의 판례 변경 대상 판결이 합의체를 통하지 않고 소부에서 기존 판례를 변경하고 있다는 점도 커다란 문제이다. 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에 의하면 대법원의 심판권은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 이상의 합의체에서 행하되, 다만 같은 항 각 호의 경우에 해당하는 경우가 아니면 대법관 3인 이상으로 구성된 부에서 사건을 먼저 심리하여 의견이 일치된 경우에 한하여 그 부에서 심판할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같은 항 제3호는 ‘종전에 대법원에서 판시한 헌법·법률·명령 또는 규칙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을 변경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경우’를 규정하고 있으므로, 법률 등의 해석적용에 관한 의견이 그 전에 선고된 대법원 판결에서 판시한 의견을 변경하는 것임에도 대법관 전원의 3분의 2에 미달하는 대법관만으로 구성된 부에서 심판하였다면 이는 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위반이고, 민사소송법 제451조 제1항 제1호의 ‘법률에 의하여 판결법원을 구성하지 아니한 때'의 재심사유에 해당한다.12) [각주12] 대법원 2011. 7. 21. 선고 2011재다199 전원합의체 판결 즉, 전원합의체가 아닌 소부에서 이루어진 대상 판결이 기존 판례를 변경하는 취지라고 본다면 이는 법원조직법 제7조 제1항 위반을 면하기 어렵다. 3. 피고인에게 불리해진 판례의 소급 적용 만약 대상 판결이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의 해석에 관한 대법원 판례의 변경이라고 볼 경우 발생하는 또 다른 문제는 결과적으로 확대된 처벌 기준의 소급효이다. 대상 판결은 2016년 대법원 판결에 비하여 복수개설 금지조항 위반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기존에는 의료법 제87조 제1항 제2호, 제33조 제8항에 따라 처벌 대상이 대상이 아닌 행위가 대상 판결 이후에는 처벌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판례의 변경으로 인하여 범죄의 구성요건이 확대되는 경우, 판례 변경 이전에 이루어진 행위가 변경된 판례 하에서 비로소 범죄 구성요건을 충족하게 되는 것은 마치 형벌조항을 소급적으로 입법하는 것과 비교하여 그 효과가 실질적으로 다르지 않으므로 판례 변경의 소급효 문제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물론 판례변경은 헌법 제13조 제1항과 형법 제1조의 소급효 금지가 준용되지 않아 피고인에게 불리한 형사판례 변경도 허용된다는 것이 대법원의 입장이므로,13) 대법원은 자신의 종전 2016년 판결을 수규범자들에게 불리하게 변경하는 대상 판결을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것이다. [각주13] 대법원 1999.7.15. 선고 95도2870 전원합의체 판결, 대법원 1999.9.17. 선고 97도3349 판결. 그러나 피고인에게 불리한 판례 변경이 소급효 금지의 원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전원합의체 판결이 나온지 2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근까지 이를 비판하는 형법학자들의 지적이 이어지는 것은14) 변경 이전의 판례를 신뢰하여 행동에 옮긴 수규범자의 신뢰이익이 아무런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은 분명히 부당하고 헌법질서와도 배치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사판례 변경이 소급효 금지 원칙의 적용을 받지 않는다는 대법원 판결에도 불구하고, 2016년 대법원 판결을 신뢰한 수규범자의 신뢰이익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각주14] 예컨대 조기영, “판례변경과 소급효금지의 원칙”, 「동북아법연구」, 제11권 1호 (2017. 5). 물론 종전판례를 근거로 자신의 행위가 불가벌이라고 믿었던 수규범자의 신뢰가 늘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위조한 문서를 복사한 문서는 문서위조 및 동행사죄의 객체가 아니라는 기존 판례를 변경하는 경우에는15) 문서를 위조한 행위 자체의 비난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기존 판례를 신뢰한 행위를 보호해야 한다고 보기 어렵고, 준강도죄의 기수 여부를 폭행·협박행위 기준에서 절취행위 기준으로 변경하는 경우에도16) 마찬가지로 기존 판례를 신뢰한 행위에 보호할 가치가 있는지 의문이다. 형사판례 변경의 소급효와 관련하여 독일에서의 논의를 촉발시킨 음주운전의 처벌기준 강화 판결17) 역시 수규범자들이 기존 판례의 혈중알콜농도 기준에 맞춰 음주를 한 후 운전하는 상황을 상정하기 어려우므로, 보호할 가치가 있는 피고인의 신뢰이익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즉, 수규범자가 변경 이전의 판례를 신뢰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신뢰가 늘 보호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다.18) [각주15] 대법원 1989. 9. 12. 선고 87도506 전원합의체 판결 [각주16] 대법원 2004.11.18. 선고 2004도5074 전원합의체 판결 [각주17] BGHSt 37, 89. 당시 독일 형법 제316조는 음주로 인하여 자동차를 안전하게 운전할 수 없는 상태에 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운전한자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었는데, 이때 혈중알콜농도가 어느 정도 이상일 때 운전불능상태인지에 대하여는 명문 규정 없이 의학적인 연구 등을 기초로 판례가 기준을 정해오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1990년 독일연방법원은 1966년 이래로 0.13%로 유지해 온 혈중 알코올 농도의 기준치를 0.11%로 하향 조정하면서 판례 변경 이전에 혈중알콜농도 0.12%인 상태에서 운전하다 적발된 사람들의 처벌 여부가 문제가 되었다. 서보학, “형사판례변경과 신뢰보호”, 「경희법학」, 제34권 (1999), pp.345–346 [각주18] 이동진, “판례변경의 소급효,” 民事判例硏究, No. 36 (2014), pp.1168. 그렇다면 신법상의 복수개설 금지조항에 관한 2016년 대법원 판결에 대한 신뢰는 어떠한가? 실제로 수규범자인 의료인이 동 판결을 인식하고 이를 신뢰하였다는 전제하에, 그러한 신뢰는 별로 의문의 여지 없이 보호할 가치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위반시 형사처벌이 따르는 행정법규는 재판규범이자 행위규범이다. 그러나 수규범자들이 평소 모든 관련 법규를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고 있지는 아니하므로, 개개의 행정법규 및 그에 대한 법원의 해석이 수규범자에게 동등한 정도의 규범력을 갖는 행위규범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보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어떤 행정법규 및 그에 대한 법원의 해석은 법률가도 아닌 수규범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고 준수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반면, 어떤 행정법규는 규제기관에 의하여 적용되기 전까지 수규범자들이 그 존재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의료기관 중복 운영 금지 조항은 2012년 의료법 개정 시 처음 삽입되기는 했으나 그 모태가 되는 의료기관 중복개설 금지조항은 2000년대에 들어와 그 위반을 이유로 많은 의료인들이 기소가 되는 바람에 복수의 의료기관을 경영하고자 하는 다수의 의료인들이 이미 인식하고 신중히 분석하고 있었던 규정이고, 동 조항을 해석한 판례19) 역시 복수 의료기관의 경영에 참여하려는 의료인들에게 합법적인 경영방식의 준거로 작용했음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 2012년 의료법 개정 이후 신법상의 중복개설 금지조항에 대하여는 마찬가지로 2016년 대법원 판결이 그러한 지위를 차지했을 것임이 당연하다. 즉 2016년 대법원 판례의 취지에 따라 일선에서의 다수의 의료인들은 합법적이라는 믿음 하에 진료는 의료기관 개설 명의자에게 맡기고 자본 투자나 컨설팅 등 다양한 형태로 복수 의료기관의 경영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신법상의 의료기관 중복 개설·운영의 기준을 제시한 2016년 대상판결을 신뢰한 의료인들의 신뢰이익은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각주19] 위 각주 4의 판례. 그런데 의료기관 중복개설 금지조항의 위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기존 2016년 대법원 판결을 신뢰한 의료인이 입을 수 있는 불이익은 비단 형사처벌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의료법을 위반한 의료기관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지급받은 요양급여비용을 국민건강보험법 제57조 제1항에 근거하여 환수하는 조치를 기계적으로 취하고 있는데, 그 환수액은 의료기관이 거둔 수익이 아니라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지급받은 급여금액 전액이고 심지어는 환자 본인부담금마저 포함되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의료인이 파산에 이를 정도로 커다란 금액이 되기도 한다.20) [각주20] 예컨대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요양급여비용환수처분 취소를 구한 2014구합11526사건에서는 환수급액이 74억원에 달하여 의료인인 원고가 파산에 이를 수 있으므로 환수처분이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의료기관 중복개설 금지조항의 수규범자들인 의료인들이 2016년 대법원 판결을 신뢰하여 동 판결이 허용하는 형태로 복수 의료기관을 운영해 왔다면, 그러한 수규범자들의 신뢰이익은 더더욱 보호할 필요성이 있는데, 대상 판결은 그러한 신뢰이익을 보호할 아무런 장치 없이 신법상의 중복개설 금지조항의 위반의 범위를 확대함으로써 기존 판례를 신뢰한 의료인들을 형사처벌은 물론이거니와 국민건강보험법상 요양급여비용 환수처분에 새로이 노출시키고 있으므로 부당하다. 4. 자기 모순적인 기준 제시 서로 다른 의료기관을 운영하고 있는 의료인들이 맺을 수 있는 협력의 형태를 개념적으로 분류해보면, 아무런 자본 투자 없이 수수료를 목적으로 자문제공이나 경영지원을 제공하는 형태가 있을 수 있고, 한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의 의료기관에 자본 투입을 통하여 지분을 취득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지분투자가 이루어질 경우, 피투자 의료기관의 운영에 관한 투자자의 관여에는 다양한 정도와 형태가 있을 것이다. 투자자와 피투자자가 예컨대 학연이나 혈연으로 이어진 경우에는 피투자자의 병원 운영에 아무런 간섭을 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자신의 투하자본이 이윤과 함께 회수되기를 바라는 투자자의 입장에서 어떤 형태로든 피투자 의료기관의 운영을 모니터하고 너무 모험적인 운영을 방지하고자 하는 유인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기업에 대한 투자의 경우에도 일정 규모 이상의 지분 투자를 하는 투자자는 이사 선임 등을 통하여 피투자 기업이 건실한 경영을 하는지 감독하고자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렇다면 의료기관에 대한 투자 자체를 금지하고 있지 않는 이상 - 지금까지 우리 대법원의 판결은 의료기관 이중 개설·운영 금지 조항이 투자 자체를 금지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거니와, 대상 판결 자제도 의료법상 허용되는 동업의 형태로서 “단순히 헙력관계를 맺거나 경영지원 혹은 투자를 하는 정도”를 언급하고 있다 -, 자신이 자본을 투자한 의료기관에 대한 일정 수준의 감시 또는 감독권한을 보유하는 것 역시 허용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대상 판결은 “경영사항에 관하여 의사 결정 권한을 보유하면서 관련 업무를 처리하거나 처리하도록 하는 경우”는 위법한 복수 의료기관 운영이라는 기준을 제시함으로써, 의료기관 개설명의자를 배제하지 않더라도 예컨대 개설 명의자와 공동으로 경영사항에 관한 의사결정 권한을 보유한 경우조차 의료법에 위배되는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에 해당할 여지를 만들었다. 대상 판결 스스로가 합법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경영지원 혹은 투자”에 통상 수반되는 행위를 위법이라고 보는 모순을 초래하고 있는 것이다. IV. 대상 판결의 올바른 이해 지금까지 나열한 대상 판결의 문제점들은 대상 판결이 2016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는 취지라고 볼 때 발생하는 문제점들이고, 간단하게 치유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들이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기교적 조치로서가 아니라, 이 사건의 하급심 판결과 대법원 판결을 나란히 놓고 보면 대상 판결은 2016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려는 취지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이 사건에서 의료기관 중복 운영에 대하여 무죄를 선고한 1심과 이를 파기하고 유죄를 선고한 2심의 결론은 상반되지만, 1심과 2심의 판결문을 보면 각 법원이 적용한 의료기관 중복 운영의 법리는 다르지 않다. 즉, 1심과 항소심은 동일하게 의료기관의 중복 운영이란 “이미 자신의 명의로 의료기관을 개설·운영하면서 의료행위를 하고 있는 의료인이 다른 의료인이 개설·운영하고 있는 기존 의료기관을 인수하여 … 종전 개설자를 배제하고 그 의료기관의 시설과 인력의 관리, 의료업의 시행, 필요한 자금의 조달, 그 운영성과의 귀속 등 의료기관의 운영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하는 등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운영행위를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경우”라고 설시하면서 2016년 대법원 판결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21) [각주21] 2016.12.22. 서울중앙지방법원 2016고단4214 및 2018.2.6.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노9. 다만 1심은 피고인이 위와 같은 행위를 했다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고 판단한 반면, 항소심은 증언 등을 바탕으로 피고인 甲이 乙의 명의를 빌려 B치과를, 丙의 명의를 빌려 C치과를 개설하여 운영하고, 위 각 치과를 운영함에 있어 그 시설과 인력의 관리, 의료업의 시행, 필요한 자금의 조달, 그 운영성과의 귀숙 등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한 사실을 인정하여 의료기관 중복 운영에 대하여 유죄를 선고한 것이다. 즉, 1심과 2심 결론이 상반되는 것은 의료법 제33조 제8항의 해석의 차이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증거에 기반한 사실인정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검사의 항소이유도 법리오해가 아니라 사실오인이었다. 이에 대하여 대상 판결은 1심과 2심 가운데 항소심을 지지하면서 “1의료인 1개설·운영 원칙 위반 부분을 유죄로 인정한 원심의 판단은 정당하고, 상고이유 주장과 같이 의료법 제33조 제8항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잘못이 없다”고 설시하고 있는데, 상고이유서가 공개되지 않은 상황에서 피고인이 어떤 법리 오해를 상고이유로 제시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1심과 2심이 모두 동일하게 2016년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따르고 있고 사실 판단만을 달리한 경우라면, 대상판결이 피고인의 상고를 기각하기 위하여 새로운 법리를 제시하였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부자연스럽다. 그렇다면 비록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의료기관 중복 운영에 관한 대상 판결의 위 (나) 및 (다) 판시가 기존 2016년 대법원 판결의 어구를 그대로 옮겨오고 있지는 않지만, 대상 판결은 여전히 2016년 대법원 판결을 변경하는 것이 아니라 그 취지를 따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대상 판결이 의료기관 중복 운영에 필요한 개념 요소로서 “종전 개설자의 의료기관 운영행위와 단절되는 새로운 운영행위”를 제거한 듯하나, 이는 판결문에 생략되어 있을 뿐, 여전히 2016년 판결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다. V. 향후의 바람직한 절차 진행 지금까지 의료인은 1개의 의료기관만 개설할 수 있다는 의료법 제33조 제8항 소정의 의료기관 복수개설 금지 조항의 해석을 살펴보았는데, 동 조항에 대하여는 이미 이야기한대로 헌법소원이 제기되어 공개 변론까지 열렸고, 이러한 공개 변론이나 다양한 논문을 통해 합헌성 논쟁 및 의료 정책론 차원의 논쟁이22) 벌어지고 있다. 따라서 법원에 계류된 의료법 제33조 제8항 위반의 형사사건들은 일단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내려지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소송경제 차원에서 바람직하다. [각주22] 설령 의료인의 의료기관 복수개설 금지가 위헌까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책적으로 정당한 정책인가 하는 논쟁이다. 의료인이 1개 이상의 의료기관을 개설하여 너무 영리를 추구하는 것은 환자에 대한 최선의 진료라는 의료인의 책무와 상충할 수 있고, 이로 인한 국민건강보험 재정의 위협이 의료기관 복수개설 규제가 좋은 정책이라고 보는 견해와 (김준래, “네트워크병원과 의료기관 복수 개설ㆍ운영 금지 제도에 관한 고찰,” 의료법학, Vol. 17, No. 2 (2016), pp.281–313), 1명의 경영인이 여러 개의 의료기관을 운영하면서 업무의 효율, 비용 절감 등 규모의 경제를 도모할 수 있으므로 복수개설 규제는 좋은 정책이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김선욱 and 정혜승, “의료인의 의료기관 다중운영 금지 조항의 위헌성 - 의료법 제87조 제1항 제2호, 제33조 제8항을 중심으로 -,” 의료법학, Vol. 16, No. 2 (2015), pp.295–326) 충돌한다. 그 결과 헌법재판소가 단순 위헌 결정을 내린다면 법원에 계류된 제33조 제8항 위반 사건에 대하여 법원은 공소기각의 판결을 내려야 할 것이다. 만약 헌법재판소가 합헌 또는 한정위헌 결정을 내린다면,23) 법원은 의료법 제33조 제8항의 법리를 섬세하게 다듬어 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그 과정에서 의료기관 중복 개설·운영 기준을 완화할 경우 기존의 대법원 판결을 신뢰하여 합법적이라고 믿고 타 의료기관의 경영에 참여한 의료인이 부당하게 형사상 또는 행정처분을 통한 재산상 불이익을 받는 결과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24) [각주23] 법원은 헌법재판소의 법률 해석에 기속되지 않는다는 것이 대법원의 태도이므로 (대법원 2013. 3. 28. 선고 2012재두299판결), 헌법재판소의 한정위헌 결정의 영향은 법원이 향후 의료법 제33조 제8항을 해석함에 있어 합헌결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각주24] 형사판례변경의 소급효를 인정하더라도 기존의 판례를 신뢰한 피고인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하여 형법 제16조 법률의 착오 규정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하태영, “被告人에게 不利한 判例變更과 遡及效禁止의 問題,” 동아법학, No. 38 (2006), pp.39–98 등. 이렇게 하면 의료법 제33조 제8항 위반에 대하여 무죄가 인정되므로, 국민건강보험법상 요양급여비용 환수처분도 면하게 될 것이다. 이원복 교수(이화여대 로스쿨)
의료법제33조제8항
복수의료기관
병원
이원복 교수(이화여대 로스쿨)
2018-12-21
민사일반
준거법의 범위와 준거법의 합의가 주요사실인지 여부
- 대상판결: 대법원 2016.3.24. 선고 2013다81514 판결 - I. 대상판결의 요지 당사자자치의 원칙에 비추어 계약 당사자는 어느 국제협약을 준거법으로 하거나 그중 특정 조항이 당해 계약에 적용된다는 합의를 할 수 있고 그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은 자백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소송절차에서 비로소 당해 사건에 적용할 규범에 관하여 쌍방 당사자가 일치하는 의견을 진술하였다고 해서 이를 준거법 등에 관한 합의가 성립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II. 국제협약이 준거법의 합의의 대상이 될 수 있는지 여부 1. 쟁점 대상판결에서는 계약의 당사자가 국제협약을 준거법으로 하는 합의를 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국제사법 제25조 제1항에서는 “계약은 당사자가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선택한 법에 의한다”고 규정하고 있는데, 당사자가 선택할 수 있는 ‘법’이 ‘특정 국가의 법’에 한정되는지 아니면 상인법(lex mercatoria 또는 law merchant)과 같은 국제적 관습, UNIDROIT 국제상사계약규칙(UNIDROIT Principles of International Commercial Contracts 1980)과 같은 법원칙 또는 국제물품매매협약(UN Convention on the International Sale of Goods)과 같은 국제협약 등 비국가적 규범도 포함되는지 문제된다. 2. 논의의 실효성 비국가적 규범이 준거법으로서 지정될 수 있다면 이는 ‘저촉법적 지정’이 되지만, 만일 준거법으로서 지정될 수 없다면 당사자의 합의는 그러한 비국적 규범을 계약의 내용으로 편입시키는 ‘실질법적 지정’으로 볼 수밖에 없다. 저촉법적 지정은 준거법의 지정이므로 법정지의 단순한 강행규정의 적용은 배제되고 국제적 강행규정만이 적용된다. 그러나 실질법적 지정의 경우에는 규범을 계약의 내용으로 편입시키는 것에 불과하므로 법정지의 단순한 강행규정의 경우에도 적용이 배제되지 아니한다. 그리고 저촉법적 지정의 경우에는 계약이 체결된 후에 법이 개정되었다면 개정된 법이 적용되지만 실질법적 지정의 경우에는 개정되기 전의 법이 계약의 내용으로 편입된 것으로 봐야 하므로 그 적용이 배제된다. 또한 저촉법적 지정의 경우에는 법원이 규범의 내용을 직권으로 조사해야 하지만, 실질법적 지정의 경우에는 편입된 법규가 계약의 내용이 되므로 당사자가 편입된 법규의 내용에 대하여 주장하고 증명할 책임을 부담한다. 3. 대상판결에 대한 비판 결론부터 언급하자면 준거법은 특정국가의 법에 한정된다고 본다. 국제사법의 전반에서 언급하고 있는 ‘법’의 전통적 그리고 사회적 의미는 특정국가의 법이고, 제5조에서 ‘법원은 이 법에 의하여 지정된 외국법’이라고 규정하고 제7조나 제33조 등에서 ‘대한민국법’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종합하여 보면 준거법은 외국법이거나 대한민국법으로서 특정국가의 법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비국가적 규범을 준거법으로 지정할 수 있다면 준거법의 분열의 한계와 관련하여서 문제가 발생한다. ‘준거법의 분열’이란 하나의 법률관계의 실체적 내용에 대하여 여러 국가의 법이 적용되는 경우를 말하는데, 국제사법 제25조 제2항에서는 “당사자는 계약의 일부에 관하여도 준거법을 선택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준거법의 분열을 허용하고 있다. 대법원 2016.6.23. 선고 2015다5194 판결에서는 당사자가 계약의 일부에 관하여만 준거법을 선택한 경우, 선택된 준거법이 적용되지 아니하는 영역에 대하여는 국제사법의 규정에 따라 지정된 소위 객관적 준거법이 적용된다고 보고 있으므로, 비국가적 규범만을 준거법으로 지정하고 있거나 비국가적 규범과 특정국가의 법을 모두 지정하는 경우 모두 준거법의 분열이 발생한다. 그러나 준거법의 분열이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법의 내용에 차이가 있고, 한 국가의 국내법은 서로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으므로 하나의 사안에 대하여 여러 국가의 법이 동시에 적용되면 적용되는 법률 사이에 모순이 발생하거나, 생소한 다른 국가의 제도를 국내의 제도에 맞춰야 하는 복잡한 적응의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지정된 복수의 준거법이 적용되는 부분이 다른 부분과 분리가능하여 상호 모순저촉이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는 한계 내에서만 준거법의 분열이 허용된다. 그런데 비국가적 규범을 준거법으로 지정할 수 있다면 위와 같은 한계를 완전히 무시하고서 준거법의 분열을 인정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부당하다. 대상판결에서 국제협약이 준거법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설시하지 아니한 점에 비추어 보건대, 위와 같은 문제점에 대한 깊은 고려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비국가적 규범을 준거법으로 지정하는 저촉법적 지정은 할 수 없다고 본다. 참고로 우리의 국제사법의 바탕이 된 유럽공동체(EC)의 ‘계약상 채무의 준거법에 관한 협약’(‘로마협약’) 에서는 당사자가 준거법으로 선택할 수 있는 법이 특정 국가의 법이라고 해석되어 왔다. 그런데 위 로마협약을 개정한 ‘계약상 채무의 준거법에 관한 규칙’을 제정되는 과정에서 비국가적 규범을 준거법으로서 선택할 수 있도록 하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준거법은 특정 국가의 법으로부터만 도출될 수 있다는 이유로 채택되지 아니하였다. III. 준거법의 합의가 주요사실인지 여부 1. 쟁점 대상판결에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주요사실에 대하여만 변론주의가 적용되어 자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그런데 대상판결에서는 준거법을 지정하는 합의가 있었다는 사실이 자백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하여 그러한 사실이 주요사실이란 점을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다. 대상판결과 같이 준거법의 합의를 주요사실로 본다면 당사자가 그러한 합의의 존재를 주장 및 증명해야 비로소 법원이 그러한 합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있을 뿐이고, 당사자의 주장이 없는 한 법원이 직권으로 준거법의 합의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2. 대상판결에 대한 비판 (1) 주요사실의 의미에 따른 비판 주요사실이라 함은 법률효과를 발생시키는 실체법상의 구성요건 해당사실을 말한다(대법원 1983. 12. 13. 선고 83다카1489 전원합의체 판결). 즉 권리와 의무의 발생, 변경, 소멸이라는 실체법적 효력을 가져오는 요건사실이 주요사실에 해당한다. 국제사법을 소송법으로 분류하는 견해도 있지만 ‘절차법-실체법’과 ‘저촉법-실질법’이 대비되고 있는 바와 같이, 저촉법인 국제사법은 ‘법선택을 위한 법’으로서 절차법과 실체법의 구분과 그 영역을 달리한다(석광현, ‘국제사법 해설’, 법문사, 2013, 4쪽). 그런데 국제사법을 소송법으로 보던지 저촉법으로 보던지 상관없이 국제사법이 실체법이 아니란 점은 명백하므로 국제사법 제25조에 따른 준거법의 지정의 합의를 주요사실로 보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2) 적용될 법률의 발견은 법원의 전권사항 국제사법은 법선택을 위한 법으로서 국제적 분쟁사건을 심리하는 법원으로서는 당사자의 주장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이를 당연히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국제사법에 따르면 계약에 적용되는 준거법은, 1차적으로 당사자의 합의에 의하여 지정한 국가의 법이 되고(제25조 제1항), 이러한 합의가 없는 경우에는 2차적으로 그 계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국가의 법이 된다(제26조). 따라서 법원은 직권으로 계약의 1차적 준거법인 당사자의 합의의 존재를 조사해야 한다. 게다가 대상판결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적용할 법률의 발견은 법원의 전권사항이고, 준거법에 관한 당사자의 합의는 적용할 법률을 결정하는 합의이므로, 법원은 준거법의 합의의 존재를 조사하는데 있어서 당사자의 주장에 구속받지 아니한다. 덧붙여 대상판결은 당사자가 준거법을 지정하는 합의는 계약의 내용이 되고 계약의 내용은 주요사실이라는 이유로 준거법에 관한 당사자의 합의를 주요사실로서 자백의 대상으로 본 듯하다. 그러나 당사자의 합의라고 하더라도 모두 주요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대법원 판례에서는 소송상 합의인 부제소의 합의를 채권계약으로 보고 있으면서도(대법원 2004. 12. 23. 선고 2002다73821 판결), 이러한 부제소의 합의가 소송법적 효과를 발생시킨다는 이유로 이를 법원의 직권조사사항으로 보고 있다(대법원 2013. 11. 28. 선고 2011다80449 판결). 따라서 당사자의 합의라는 이유만으로 준거법을 지정하는 합의까지 주요사실로 보는 것에는 찬성할 수 없다. IV. 결론 이상으로 대상판결과 달리, 사견에 따르면 국제협약을 포함한 비국가적 규범은 준거법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준거법을 지정하는 합의의 존재는 법원의 직권조사사항으로서 자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한편 대상판결 중 문제된 판시내용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상판결이 이에 대하여 아무런 이유를 설시하지 아니한 채 위와 같은 결론에 이른 아쉬움이 있다. 적지 않은 국제사건이 발생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좀 더 많은 국제사법적 고려가 필요하다고 보인다.
국제협약
준거법
국제사법
2017-02-20
원천징수처분취소소송에서 처분사유 추가·변경의 한계
Ⅰ. 사실관계 미국의 사모투자회사인 A의 미국 내 계열사인 B등은, 내국법인인 甲은행의 주식 9999만9916주(이하 '이 사건 주식')의 인수를 위하여 이 사건 주식의 인수에 투자할 펀드투자자를 모집하였고,그 결과 2000. 1. 14.경 영국령인 케이만 군도에 유한파트너십(Limited Partnership, 이하"LP")인 C가 설립되었다. C는 케이만 군도에 설립된 D의 주식을 100% 인수한 다음, D로 하여금 말레이시아라부안에 설립된 E의 주식을 100% 인수하게 하였고, 최종적으로 말레이시아 법인인 E를 통하여 우리나라 법인이 발행한이 사건 주식을 취득하였다. 한편 E는 2005. 4. 15. 원고에게 이 사건 주식을 1651억1475만6621원에 양도하여 이 사건 양도소득을 얻었는데,원고는 한?말레이시아조세조약제13조 제4항에 의하여 주식 양도소득은 양도인의 거주지국에서만 과세된다는 이유로 E에 이 사건 주식 양도대금을 지급하면서 그에 대한 법인세를 전혀 원천징수하지 아니하였다.이에 피고(과세관청)는 2006. 12. 18. E는 조세회피목적으로 설립된 명목상의 회사에 불과하고,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귀속자는C의 투자자 281명이므로, 이들 중 대한민국과 조세조약을 체결하지 않았거나 조세조약상 주식양도소득에 대하여 원천지국 과세를 규정하고 있는 국가에 거주하는 총 8개국 40명의 투자자가 얻은 양도소득에 대하여 원고에게 원천징수분 소득세 430억1071만7520원을납세고지하는 처분을 하였다. Ⅱ. 대상판결의 진행경과 및 판시내용 1.제1심판결 내지 상고심 판결의 판시내용 당초 대상사건의 쟁점은 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가 E인지(원고의 주장),아니면 C의 투자자인지(피고의 주장) 여부였다.이에 관하여제1심 및 항소심은 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를C의 투자자로 보고 그들을 원천납세의무자로 하여 원고에게 원천징수분 소득세를 납세고지한 이 사건 처분은 적법하다고 판시하였다(서울행정법원 2009. 12. 30. 선고 2008구합17110 판결 및 서울고등법원 2010. 8. 25. 선고 2010누3826 판결). 그러나상고심은,E가 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가 아니라고 인정하면서도,(E와 C의 투자자 사이에 있는) C가 오로지 조세를 회피할 목적으로 설립되어 이 사건 주식을 실질적으로 지배?관리할 능력이 없는 명목상의 영리단체에 불과하다고 할 수는 없다고 판시하였다(이하 "상고심 판결").즉, 상고심 판결은 C의 설립지인 케이만 군도의 법령 내용과 단체의 실질에 비추어 C를 법인세법상 외국법인으로 볼 수 있는지를 심리하여 이 사건 양도소득에 대하여 C를 원천납세의무자로 하여 법인세를 과세하여야 하는지 아니면, C의 투자자를 원천납세의무자로 하여 소득세를 과세하여야 하는지를 판단하여야 한다는 이유로 원심을 파기환송하여, 사실상 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가 C라는 취지로 판시하였다(대법원 2013. 7. 11. 선고 2010두20966 판결). 2.파기환송심판결 및 대상 판결의 판시내용 이러한경위로 인하여,파기환송심에서는 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가 C의 투자자가 아닌 C라는 점 자체에 관하여는 원?피고 사이에 다툼이 없었다.대신피고는상고심 판결의 취지에 따라, 당초 이 사건 처분에서 이 사건 양도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 즉,원천납세의무자를 C의 투자자로 보았다가,C로 달리하는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을하였다. 이 때문에 파기환송심에서는피고의 이와 같은 처분사유 추가?변경이 가능한지 여부가 새롭게 쟁점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파기환송심 판결은 "세목은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에 해당하므로 원천징수하는 세금에 관한 처분취소소송에서 과세관청이 처분의 근거 세목을 소득세에서 법인세로 변경하는 것은 처분의 동일성을 벗어나는 것으로서 허용될 수 없다"라고 판시하였다(서울고등법원 2014. 1. 10. 선고 2013누23272 판결).이에 대하여 피고가 재상고하였는데,대상 판결은 파기환송심 판결과 마찬가지로 "세목은 부과처분에서는 물론 징수처분에서도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봄이 상당하므로,당초의 징수처분에서와 다른 세목으로 처분사유를 변경하는 것은 처분의 동일성이 유지되지 아니하여 허용될 수 없다"라고 판시하여 피고의 재상고를기각하였다(대법원 2014. 9. 5. 선고 2014두3068 판결). Ⅲ. 대상판결의평석 1.처분사유 추가?변경의 허용범위(='처분의 동일성'='납세의무의 단위') 과세관청은 원칙적으로 처분의 동일성을 해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과세처분 취소소송의 변론종결시까지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을 할 수 있다(대법원 1989. 12. 22. 선고 88누7255 판결).여기서 '처분의 동일성'이란 과세단위또는 납세의무의 단위(이하 통틀어 '납세의무의 단위')를 말하고(대법원 1992. 7. 28. 선고 91누10695 판결), 이는 원천징수처분 취소소송에서도 다르지 않다(대법원 1999. 12. 24. 선고 98두16347 판결). 여기서 '납세의무의 단위'란,일반적인 행정소송에서 처분의 동일성의 한계로 논의되는 '기본적 사실관계의 동일성'과 구분되는 세법 특유의 개념으로,강학상으로는 개인단위, 부부단위, 가족단위 등 인적 요소가 결합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물적 요소로서 조세채무의 확정에 있어서 세목, 과세기간, 과세대상에 따라 다른 것과 구분되는 기본적 단위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관련하여 대법원은 ①자산소득의 합산과세를 규정한 구 소득세법의 취지에 관하여 세대단위로 담세력을관념하는 것이 개인단위별 과세보다 생활실태에도 합당하다고 판시하여 납세의무의 단위를 인적 요소로 이해하기도 하고(대법원 1983. 4. 26. 선고 83누44 판결 등), ②재산세 등의 과세대상인 주택은 1구를 과세단위로 하여 과세대상으로서 구분된다고 하여(대법원 1991. 5. 10. 선고 90누7425 판결) 이를 물적 요소로 파악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③소득세나 부가가치세를 일정한 기간을 과세단위로 하는 세목이라고 판시하여(대법원 1996. 2. 23. 선고 95누12057 판결) 이를 시간적인 관점에서 바라본 사례도 있다. 그러나 대법원은 그 동안 이 사건 처분과 같은 원천징수처분에서는 납세의무의 단위가 무엇인지, 특히 과세관청이 소송에서 처분 당시와 비교하여 원천납세의무자를 달리하는 내용의 처분사유 추가?변경이 가능한지 여부에 대하여는 명시적으로 판단한 바는 없었다. 2.원천징수처분에서의 '처분의 동일성' 범위에 관한 판단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사건상고심 판결과 같은 날 선고된 대법원 2011두7311 판결은(이하 '비교판결')원천징수처분의 취소소송에서 원천납세의무자를 달리하는 내용의 처분사유 추가?변경이 처분의 동일성을 해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였다.즉,비교판결은 '원천징수하는 법인세에서 소득금액 또는 수입금액의 수령자가 누구인지는 원칙적으로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다'는 전제에서, "원천징수하는 법인세에 대한 징수처분 취소소송에서 과세관청이 소득금액 또는 수입금액의 수령자(=원천납세의무자)를 변경하여주장하더라도그로인하여소득금액또는수입금액지급의기초사실이달라지는것이아니라면처분의동일성이유지되는범위내의처분사유변경으로서허용된다"라고 판시하였다. 이러한 대법원의 판단은, 비거주자 및 외국법인의 국내원천소득은 강학상 완납적 원천징수의 대상이 되는 소득으로서 원천징수법률관계는원천징수의무자와과세관청사이에만존재하고 원천납세의무자와 과세관청 사이에는 직접적인 법률관계가 없는 점(대법원 1984. 2. 14. 선고 82누177 판결 등),원천징수하는 소득세 또는 법인세는 소득금액 또는 수입금액을 지급하는 때에 이미 납세의무가 성립하는 동시에 확정되기 때문에(국세기본법 제21조 제2항 제1호 및 제22조 제2항 제3호)'실질적인귀속자'로서 사후적으로 확정될 수밖에 없는 원천납세의무자는 애당초 확정된 세액의 기초사실을 판단하는 요소에 포함될 수 없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이론적으로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3.대상판결의 문제점 (1) 쟁점 비교판결의 판시내용을 대상판결에서도일관하면, 일응피고가 원천납세의무자를 종전 "C의 투자자"에서 "C"로 달리하는 처분사유 추가?변경이 허용된다고 보지 않을 이유가 없다.다만 이 사건과 비교판결 사이에 존재하는 다음과 같은 차이점 때문에, 파기환송심에서는 비교판결의 법리가 이 사건 처분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첨예한 대립이 있었다. 즉, 비교판결과 이 사건은 과세관청이 케이만 군도에 설립된외국법인(LP)와 그 투자자 중투자자를 주식양도소득의 실질적인귀속자로 보아 원천징수처분을 하였다는 점에서는 완전히 동일하다. 다만, 비교판결에서는 과세관청이 당초 투자자를'법인'으로 보아 법인(원천)세를 원천징수처분한 반면, 이 사건 처분에서는 투자자를'개인'으로 보아 소득(원천)세를 원천징수처분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비교판결에서는과세관청이 원천납세의무자를 'LP의 투자자'에서 'LP'로 달리하는 처분사유 추가?변경을 하더라도, 세목이 여전히 법인(원천)세가 되어 기존 납세고지서상 세목[=법인(원천)세]과 일치한다. 반면 이 사건 처분에서는과세관청이 원천납세의무자를 'C의 투자자'에서 'C'로 달리하는 처분사유 추가?변경을 하게 되면 세목이 법인(원천)세가 되어 기존 납세고지서상 세목[=소득(원천)세]과 불일치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원천납세의무자가 원천징수처분의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가 아니고,법인세나 소득세나 동일한 소득과세의 일환인 이상 , 그 소득의 실질 귀속자에 대한 판단이 달라져 그에 따라 처분사유를 변경함에 있어 원천납세의무자의 법적 형식에 따라 자동적으로 뒤따를 뿐인 세목 또한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로 볼 이유가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원고는 종전 대법원 판례(대법원 1999. 12. 24. 선고 98두16347 판결 및 대법원 2001. 8. 24. 선고 2000두4873 판결)를 들어, 세목은 엄연히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세목이 달라지는 경우에는 아무리 원천징수처분이라고 하더라도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이 허용될 수 없다고 반박하였다. 결국 파기환송심에서는 비교판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원천징수처분의 경우'세목'이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로 볼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된 것이다. (2) 일반적으로 '세목'이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인가? 학설 중에는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로 통상 과세기간, 장소, 소득구분 등을 열거하면서 본세와가산세는 별개라는 점을 예로 들어(대법원 1992. 5. 26. 91누9596 판결) 세목을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라고하거나 ,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로서 세목이 가장 중요하다는 등의 견해가 있다 .우리나라 세법 중 소득에 대하여 과세하는 세목인 소득세 및 법인세를 생각해보면, 납세의무자의 법적 성격이 개인인지 법인인지 여부에 따라 세목이 소득세 또는 법인세로 달라지고, 이에 따라 각각 소득세법 또는 법인세법이 적용되어 과세표준의 산정방법, 세율 등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에,직접 납세의무자에 대한 과세처분에 있어서 세목은 일응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라는 점에는 충분히 수긍이 간다. 그러나 [국가-원천징수의무자-원천납세의무자] 3자 간의 법률관계가 문제되는 원천징수처분에서도이러한 논리가 그대로 관철될 수 있는지는 이와 구분하여 깊이따져볼 필요가 있다.앞에서도 언급하였다시피,원천징수처분에서는 부과처분과는 달리 애당초 "원천납세의무자"와 과세관청 사이에는직접적인 법률관계가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3) 원천징수처분에서의"세목"이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인가? 대상판결은 "세목"이 부과처분에서뿐만 아니라 원천징수처분에서도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라고 판시하면서도 따로구체적인 설명을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에 비추어 볼 때 대상판결의 결론은 이론적인 측면에서나 실무적인 관점에서나 타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우선 이론적인 측면에서 보면,이 사건에서 처분사유 추가?변경으로 인하여 세목이 소득세에서 법인세로 달라지더라도, 원천징수처분에서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인 "소득금액 또는 수입금액의 지급에 관한 기초사실" 즉, 원고가 E로부터 2005. 4. 15. 이 사건 주식을 매수하고 그 대가로 1,651,104,756,621원을 지급한 사실 그 자체는 달라지지 않는다. 또한 소득세법이나 법인세법이나 모두 비거주자 또는 외국법인이 내국법인의 주식을 양도하여 얻은 소득에 대하여, 과세표준은 지급금액으로, 세율은 10%로 동일하게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소득세법 제156조 제1항 제5호 및 법인세법 제98조 제1항 제5호),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으로 인하여 세목이 소득세에서 법인세로 달라지더라도 그 세액은 종전과 동일하다. 요컨대,이 사건에서는처분사유의 추가?변경에 따라 원천납세의무자가 C의 투자자에서 C로 달라지더라도 (법원에 의하여 실질과세의 원칙에 따라 사후적으로 확정된 원천납세의무자 및 그에 따른 세목을 제외하고는)원천징수의무를 발생시키는 이 사건 양도소득의 지급에 관한 기초사실,납세자(원천징수의무자),과세표준,세율,세액 중 어느 것 하나 달라지지 않는다.이 점이 바로 납세의무자가 달라지면 납세자, 과세표준, 세율,세액이 모두 달라지는 부과처분과 확연히 구분되는 원천징수처분만의 특징이다. 또한 대법원이 발간한판례해설에 따르면, 일반 행정소송에서는 '기본적 사실관계의 동일성'을 처분사유 추가?변경의 한계로 보는 반면, 조세소송에서는 '납세의무의 단위'를 처분사유 추가?변경의 한계로 설정함으로써 납세자의 소송상 방어권 보장보다는 분쟁의 일회적 해결을 더 추구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명은'납세의무의 단위'가'기본적 사실관계의 동일성'보다는 그 범위가 더 넓은 개념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대상판결과 같이 보게 되면 오히려 '기본적 사실관계의 동일성'보다 '납세의무의 단위'를 더 좁게 보는 모순이 발생한다. 왜냐하면 대상판결이 과세관청의 처분사유 추가?변경으로 인하여 '기본적 사실관계'즉,소득금액 또는 수입금액의 지급에 관한 기초사실에는 아무런 변동이 없음에도불구하고 '납세의무의 단위'의 동일성은 부인함으로써, 분쟁의 일회적 해결보다는 납세자의 방어권 보장을 우선시한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득의 실질적인 귀속자가 법원에 의하여 사후적으로 확정될 수밖에 없는 국제조세법률관계에서 분쟁의 일회적 해결보다 납세자의 방어권 보장을 우선할 근거가 무엇인지 의문이다. 실무적인 관점에서 보면, 조세조약의 해석과 적용에 있어서도 실질과세의 원칙이 적용되는 이상(대법원 2012. 4. 26. 선고 2010두11948 판결), 과세관청이 원천징수처분을 하면서 일응소득금액 또는 수입금액의 최종적인 귀속자라고 보아 지목한 원천납세의무자는,대법원이 실질과세의 원칙을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누구인지 확정하기 전까지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여 언제든 변경될 가능성이 있다. 즉, 여러 나라에 걸쳐 이루어지는 투자관계에 대하여 과세하는 국제조세에서는 국내원천소득의 '실질적인귀속자'를 찾는 과정이기본적으로 전제되어 있는 것이다.이와 같은 이유 때문에, 대법원 스스로도 비교판결에서법원에 의하여 사후적으로 확정되는 원천납세의무자는 원천징수처분에서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하여 처분사유 추가?변경의 범위를 폭넓게 인정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돌이켜 보면, 세목은 원천납세의무자의 법적 성격에 따라 기계적?자동적으로 정하여지는 요소일 뿐이다. 따라서 위와 같이 국제조세에서 원천납세의무자의 변경가능성이 유보되어 있는 이상, 그에 따른 세목 또한 얼마든지 변경될 것이 예정되어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 한편으로는원천징수처분에서 "원천납세의무자"가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가 아니라고 하면서, 다시 '세목'이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가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로 논리적 모순으로, 이는 모처럼 심도 깊은 이론적?실무적 검토 끝에 선고한 비교판결의 적용범위를 크게 훼손?잠식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법원 입장에서 볼 때 비교판결 및 대상판결에서과세관청이 원천납세의무자를 LP가 아닌 LP의 투자자로 보아 원천징수처분을 한 것은 똑같이 위법한처분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대법원이,비교판결과 같이 C의 투자자를 법인으로 보아 당초 법인세로 원천징수처분을 한 경우에는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을 허용하고,대상판결과 같이 C의 투자자를 개인으로 보아 당초 소득세로 원천징수처분을 한 경우에는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을 불허하는 것은,원천징수처분 당시 (궁극적으로 원천납세의무자도 아닌) C의 투자자들의 법적 성격이 무엇이었냐는 우연한 사정에 따라 원천징수처분의 위법성을가르는 것이어서 부당하다. 더군다나 과세실무상 현실적으로 사모펀드의 최종투자자의 지분비율, 국적까지는 알 수 있어도 그 법적 성격이 개인인지 아니면 법인인지 여부까지는 알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위와 같은 대법원 판결은 (미국과 같이 법인과 개인의 세목을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실질적인귀속자를새로 지정하여 과세할 수 있는 경우와 비교해 볼 때) 우리나라의 과세주권을 심각하게 제약하는 것으로서 비교법적으로나 조세정책적으로도 바람직하지 않다. Ⅳ.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원천징수처분에서 원천납세의무자에 따라 자동적으로 정하여지는 세목은 납세의무의 단위를 구분하는 요소가 아니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파기환송심에서대법원의 파기환송 판결 취지에 따라 과세관청이 원천납세의무자를 C로 달리하는 처분사유의 추가?변경을 하는 것은 당연히 허용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판결은 부과처분과 구별되는 원천징수처분 법률관계의 특성에 대한 심도 깊은 검토 없이, 스스로 선고한 비교판결의 의의를 크게 훼손하면서 부과처분에서의 논의를 원천징수처분에 기계적으로 적용하였다는 측면에서 수긍하기 어렵다. 또한국제조세에서 원천납세의무자는 사후적으로 얼마든지 변경될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고, 이 사건은 E가 국내에서 이 사건 주식을 양도함으로써 국내원천소득이 발생하여 우리나라에 과세권이 존재한다는 점 자체에는 의문이 없는 사안임에도, 대상판결이 단지 세목이라는 과세처분의 형식만을 이유로 수백억 원에 이르는 과세권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글로벌 세수전쟁이 날로 격화되고 있는 요즘, 다른 나라의 법원이라면 과연 어떤 판결을내렸을까?
2015-04-07
범칙금 통고처분을 받고 범칙금 납부한 자와 기판력
Ⅰ. 문제의 제기 기초질서단속경찰관으로부터 범칙금통고처분을 받고 범칙금을 납부한 기초질서위반자가 그 후 형사사건으로 기소되었다고 하자. 단속당시에는 가벼운 기초질서위반행위로 판단되어 단속경찰관이 범칙금통고처분을 하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위반자의 위반행위가 정식기소 조치가 필요한 중대범죄(형사범죄)임이 드러나면 검사는 위반자를 정식기소하게 된다. 이 경우 범칙금 납부자는 경범죄 처벌법과 도로교통법의 '범칙금납부 통고를 받고 범칙금을 납부한 사람은 그 범칙행위에 대하여 다시 벌 받지 아니한다'(경범죄 처벌법 제7조 제3항, 도로교통법 제119조 제3항)는 조항을 근거로 면소판결(형소법 제326조 제1호)을 기대한다. 정식기소를 접수한 수소법원이 면소판결을 선고하여야 하는지(이하 '면소판결설'로 약칭함) 아니면 실체심리를 진행하여 유·무죄판결을 하여야 하는지(이하 '실체판결설'로 약칭함)가 문제된다. 결국 문제는 범칙금 납부에 '기판력 혹은 기판력에 준하는 효력'을 인정할 것인가에 달려 있다. 이 문제에 대하여 하급법원과 대법원은 1980년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고민을 거듭하고 있다. 면소판결설을 취한 판결과 함께 실체판결설을 취한 판결이 공존하다가 1994년 전원합의체 판결(동일성 판정에 순수한 사실 외에 규범적 요소도 아울러 고려하여야 한다는 93도2080 전합판결)을 계기로 조금씩 실체판결설로 이동하고 있다. 필자는 2011년 판결(대법원 2011.4.28. 선고 2009도12249 판결)을 목격하고 이 판결이 대법원의 확정적인 입장인지 확신할 수 없었는데 비슷한 취지의 2012년 판결을 목격하고 이제 대법원의 입장은 실체판결설의 입장으로 굳어진 것(기판력이 미치는 객관적 범위의 '신축적 조절'이라는 글로벌 트렌드)이라고 단언할 수 있게 되었다. 이하에서는 이런 입장에서 1986년 판결,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을 분석하여 보자. Ⅱ. 1986년 판결[대법원 1986.2.25. 선고 85도2664 판결]의 사안과 판지 1986년 판결은"경범죄처벌법 제7조 제2항에 '범칙자가 통고처분을 받고 범칙금을 납부한 경우에는 그 범칙행위에 대하여 다시 벌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음은 위 범칙금의 납부에 확정재판의 효력에 준하는 효력을 인정하는 취지이므로 이에 위반하여 공소가 제기된 경우에는 면소판결을 하여야 할 것"이라고 판시하여 도로교통법상의 교통범칙행위로 인한 범칙금납부사안에 기판력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것[박길성, 신호준수의무를 불이행한 사실로 범칙금을 납부한 자에 대하여 신호위반으로 인한 업무상과실치상을 범죄사실로 공소를 제기한 경우(=유죄), 대법원판례해설 70號 (2007 상반기) (2007.12) 694-741]과 대조를 보였다. 그런데 [대법원 2011.4.28. 선고 2009도12249 판결]은 "범칙행위와 '이 사건 공소사실'(후소)은 서로 별개의 행위로서 양립할 수 있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그 사회적인 사실관계와 함께 위와 같은 규범적 요소를 아울러 고려하여 보면, 위 범칙행위와 이 사건 공소사실은 기본적 사실관계가 동일한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판시하여 1986년 판결과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법원은 명시적으로 기존 판례를 변경하거나 법리를 변경한 것은 아니지만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범칙금을 납부하고, 사후에 형사범죄로 기소된 경우 양자 간의 동일성을 부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2012년 판결이 선고되었다. Ⅲ. 2012년 판결의 사안과 판지 D는 "2010. 9. 26. 18:00경 광주 남구 봉선동 소재 쌍용 사거리 노상에서 '음주소란등'의 범칙행위를 하였음"을 이유로 같은 날 관할경찰서장으로부터 범칙금 5만 원을 납부할 것을 통고(경범죄처벌법 제1조 제25호 위반 혐의)받고 다음 날 이를 납부한 사실이 있다. 그 후 D는 "2010. 9. 26. 18:00경 광주 남구 봉선동 484-8 소재 할리스 커피숍 주차장에서, D와 다투던 V가 바닥에 넘어져 '사람 살려라'고 고함을 치자, 이에 격분하여 O(D의 처)가 운영하는 인근의 같은 동 (이하 생략)에서 위험한 물건인 과도(칼날길이 10㎝, 너비 2㎝)를 손에 들고 나와 V를 쫓아가며 '죽여 버린다'고 소리쳐 V의 신체에 어떤 위해를 가할 듯한 태도를 보여 협박"한 혐의[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흉기휴대협박행위) 혐의]로 기소되었다. 항소심은 실체심리를 진행하여 유죄판결을 선고하였다. D는 항소심판결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어긋나는 위법한 판결이라고 주장하며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공소사실이나 범죄사실의 동일성 여부는 ⓐ 사실의 동일성이 갖는 법률적 기능을 염두에 두고, ⓑ D의 행위와 그 사회적인 사실관계를 기본으로 하면서, ⓒ 규범적 요소 또한 아울러 고려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법원 1994. 3. 22. 선고 93도2080 전원합의체판결,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09도12249 판결 등 참조). 경범죄처벌법상 범칙금제도는 형사절차에 앞서 경찰서장 등의 통고처분에 의하여 일정액의 범칙금을 납부하는 기회를 부여하여 그 범칙금을 납부하는 사람에 대하여는 기소를 하지 아니하고 사건을 간이하고 신속, 적정하게 처리하기 위하여 처벌의 특례를 마련해 둔 것이라는 점에서 법원의 재판절차와는 제도적 취지 및 법적 성질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범칙금의 납부에 따라 확정판결에 준하는 효력이 인정되는 범위는 범칙금 통고의 이유에 기재된 당해 범칙행위 자체 및 그 범칙행위와 동일성이 인정되는 범칙행위에 한정된다. 따라서 범칙행위와 같은 시간과 장소에서 이루어진 행위라 하더라도 범칙행위의 동일성을 벗어난 형사범죄행위에 대하여는 범칙금의 납부에 따라 확정판결에 준하는 일사부재리의 효력이 미치지 아니한다(대법원 2002. 11. 22. 선고 2001도849 판결, 대법원 2011. 4. 28. 선고 2009도12249 판결 등 참조). 위 '사실관계'를 위 '법리'에 비추어 살펴보면, D가 범칙금의 통고처분을 받게 된 범칙행위인 음주소란과 이 사건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죄의 공소사실인 흉기휴대협박행위는 범행 장소와 일시가 근접하고 모두 D와 V의 시비에서 발단이 된 것으로 보이는 점에서 일부 중복되는 면이 있으나, (중략) 범죄사실의 내용이나 그 행위의 수단 및 태양이 매우 다르고, 각 행위에 따른 피해법익이 전혀 다르며, 그 죄질에도 현저한 차이가 있고, 나아가 위 범칙행위와 이 사건 공소사실은 서로 별개의 행위로서 양립할 수 있는 관계에 있고, 따라서 그 사회적인 사실관계와 함께 위와 같은 규범적 요소를 아울러 고려하여 보면, 위 범칙행위와 이 사건 공소사실은 기본적 사실관계가 동일한 것으로 평가할 수 없다"며 상고를 기각하였다. Ⅳ. 분석과 논평 '1986년 판결의 사안'과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의 사안'은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완전히 동일한 사안은 존재하지 아니한다) '사안패턴'(fact pattern)이 대단히 유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6년 판결과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의 결론이 다른 것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1986년 판결에서는 "기초가 되는 사회적 사실관계가 그 기본적인 점에서 동일"한가를 판정하는데 무게중심이 놓여졌었다면(종래의 순수한 기본적 사실동일설)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에서는 그보다는 '기본적 사실 외에 규범적 요소를 아울러 고려'하는 측면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하였다. '도로교통법상의 기초질서위반을 이유로 하는 범칙금 납부에 기판력을 인정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대법원은 3번에 걸쳐 부정설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대법원 1983.7.12. 선고 83도1296 판결; 대법원 2002.11.22. 선고 2001도849 판결; 대법원 2007.4.16. 선고 2006도4322 판결).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1986년 판결[대법원 1986.2.25. 선고 85도2664 판결]이 있어, 분석가들은 "종래의 판례는 교통범칙행위로 인한 범칙금납부사안에는 기판력을 인정하지 아니하지만 경범죄처벌법위반으로 인한 범칙금납부사안에는 기판력을 인정하고 있다"고 분석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은 대법원의 입장에 대한 분석을 재정립할 것을 요구한다.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을 계기로 향후 '교통범칙행위로 인한 범칙금납부사안'과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인한 범칙금납부사안'사이의 질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발상은 점차 소멸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2011년 판결·2012년 판결은 1986년 판결[대법원 1986.2.25. 선고 85도2664 판결] 을 명시적으로 폐기하지 아니하였다. 또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인한 범칙금납부사안'이 아닌 '경범죄처벌법 위반으로 인한 즉결심판확정사안'에 대하여도 형사범죄행위에 대한 기판력을 부정할 것인지 여부[대법원 1984.10.10. 선고 83도1790 판결; 대법원 1990.3.9. 선고 89도1046 판결; 대법원 1996. 6. 28. 선고 95도1270 판결]의 문제도 미정으로 남아 있다. 미약하지만 '공소사실의 동일성'과 '기판력의 객관적 범위'를 판정하는 기준에 대한 불안정한 법상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2012-12-27
사전수뢰죄에 있어서의 청탁의 법리
Ⅰ. 들어가며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법원은 사전수뢰죄로 검찰이 청구한 사전구속영장을 1999년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기각하였다. 필자가 검토한 결과 사전수뢰죄에 대한 판례는 그 사례가 매우 적을 뿐더러, 현실에서 주로 나타나는 '묵시적 청탁'과 관련된 사례는 더더욱 찾기 어려웠던 바, 그러한 이유로 시일이 많이 경과하였음에도 위 판결이 법원 결정의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당 판결을 확인한 결과 법이론의 측면 뿐만 아니라 실무상 형평의 측면에서도 문제점이 있어 이하에서는 이를 검토해 보도록 한다. Ⅱ. 사안 피고인은 모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하여 국회의원직을 사임하였고, 자치단체장 선거일 며칠 전 B회사의 A사장으로 부터 민원과 관련한 현안에 대하여 최대한 편의를 봐달라는 청탁조로 2억원이 든 사과상자를 받았다. 그 후 당선이 되어 지방자치단체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와 같은 사안을 형법 제129조 제2항에 규정된 사전수뢰죄로 처벌할 수 있는가가 문제되었다. 당시 B그룹의 A가 조성한 비자금은 수십억원에 이르렀는데, 검찰은 이 비자금의 사용처를 추적하여 비자금이 사용된 내역 중 정치인들 30여명의 명단을 확보한 다음 그 중 일부 정치인들을 수억원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기소하였고, 8명을 뇌물수수 혐의로 불구속기소, 나머지 25명에 대해서는 그들이 받은 돈이 뇌물이 아닌 정치자금, 선거자금 내지 후원금인 것으로 보아 혐의없음 처분을 하였다. 검찰은 피고인을 자치단체장에 취임하기 직전 2억원을 받은 사실로 인한 사전수뢰죄 혐의로 불구속기소하였는데, 이에 대하여 1심 재판부인 서울지방법원 제30형사부는 1997. 12. 29. 사전수뢰죄는 '구체적이고 특정된 직무행위에 대한 청탁과 승낙이 있어야만 성립한다'고 하면서, 피고인이 받은 2억원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부탁의 대가로 전달된 청탁금 또는 정치자금에 불과'하다고 무죄를 선고하였고, 검찰은 항소, 상고하였으나, 서울고등법원, 대법원에서 모두 항소기각, 상고기각되었다. Ⅲ. 판결요지 및 쟁점 사전수뢰죄에서 구성요건으로 규정하는 '청탁'의 구체성과 특정성의 요부 및 그 정도가 문제되는데, 이에 대하여 대법원은 그 법리에 대하여 명확한 구체적 설시를 하지는 아니하였지만 원심이 사전수뢰죄에 있어서의 청탁의 구체성에 관한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없다고 하여 원심(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 98노193호 판결도 구체적인 사전수뢰죄의 청탁의 구체성에 대한 법리 설시 없이 1심인 서울지방법원 97고합436호 판결의 취지를 인용하였다)과 1심의 사전수뢰죄에 대한 법리를 그대로 수긍하였는바, 아래에서는 사전수뢰죄에서의 '청탁'의 해석론을 구체적으로 밝힌 1심 판결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Ⅳ. 평석 1. 1심 판결의 요지 이 사안에서 1심 법원은 사전수뢰죄의 '청탁을 받고'라는 구성요건을 강조하면서 범죄성립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구체적이고 특정된 직무행위에 대한 부탁과 그에 대한 승낙"이 있을 것을 요하고, 청탁과 승낙은 "반드시 명시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고 묵시적이어도 무방하나, 구체적이고 특정된 직무행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2. 사전수뢰죄의 '청탁'에 대한 해석 일반 1) 학설의 일반적인 설명 이에 대하여 학설은 『청탁이라 함은 공무원에 대하여 일정한 직무행위를 할 것을 의뢰하는 것을 말하며, 「청탁을 받고」란 그러한 의뢰에 응할 것을 수락하는 일체의 행위사정을 말한다. 부정한 직무행위의 의뢰이거나 정당한 직무행위의 의뢰이거나 묻지 않으며, 청탁과 약속이 반드시 명시적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또 이 경우 직무행위는 특정될 필요는 없으나 어느 정도 구체성은 있어야 하며, 작위, 부작위를 불문한다(김일수, 서보학, 박상기, 정성근, 박광민). 원래 형법전에 「청탁을 받고」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은 구 형법이 「전항의 경우에 청탁을 받은 때」라 하여 그 죄책을 무겁게 규정한 데서 비롯되었으나 구 형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청탁의 유무는 죄책의 경중에 대한 표준이 되지 못하고 오직 그 직무와 그에 대한 대가관계의 유무를 결정하는 하나의 표준이 되는데 지나지 않을 뿐이라고 하여 왔는데, 현행법이 일본 형법 가안의 영향을 받아 단순수뢰죄의 경우는 이를 삭제하고 본죄에 있어서는 행위의 주체가 공무원 또는 중재인이 될 자이므로 뇌물과 직무와의 관계가 명확하지 아니하다고 보아 청탁을 하나의 구성요건으로 한 것이다』고 하여 직무행위가 특정될 필요는 없고, 어느 정도의 구체성만으로 족하다고 설명한다. 2) 일본 학설 및 판례의 태도 일본 형법은 제197조 제1항 전단에서 '단순수뢰죄'를, 같은 항 후단에서 "이 경우에 청탁을 받은 때에는 7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라고 하여 '단순수뢰죄'에 대한 가중처벌 조항인 이른바 '수탁수뢰죄'를, 같은 조 제2항에서 "공무원 또는 중재인으로 될 자가 그 담당할 직무에 관하여 청탁을 받고 뇌물을 수수, 요구 또는 약속한 때 공무원이 된 경우"라고 하여 '사전수뢰죄'를 각각 규정하고, 그 '청탁'의 의미를 '수탁수뢰죄'와 '사전수뢰죄'에서 동일하게 해석하고 있는바, 우리 형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 위 규정에 대하여 일본의 학설 및 판례는 "청탁이 있다고 하기 위하여는 뇌물의 공여 자체에 따라 묵시적인 의뢰의 취지가 보여지면 족하다"고 하고, "청탁은 반드시 뇌물공여 사전에 명시적으로 이루어질 것을 필요로 하지 않고, 뇌물공여하는 것 자체에 의하여 묵시적인 의뢰의 취지를 표시하는 것도 청탁에 다름 아니라고 할 것"이라고 해석하는데, 다만 청탁의 대상이 되는 직무행위가 어느 정도 구체성을 갖는 것을 필요로 한다고 하면서, 이는 '수탁수뢰' 가중처벌의 이유라고 설명한다. 결국 일본 형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청탁이 명시적일 것을 요하지 않고, 묵시적이어도 무방하다는 것 그리고 직무행위는 어느 정도만 구체성을 띠면 충분하다는 것은 학설 및 판례가 수용하는 논리라고 할 것이다. 3. 이 사건 판결에 대한 검토 그러나 위 1심 판결은 "청탁과 승낙은 구체적이고 특정된 직무행위에 관한 것이어야 하며, 공무원의 직에 취임한 후 최대한 편의를 봐달라는 추상적이고 막연한 부탁은 여기에서의 청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없다"고 해석하면서 일반적인 학설, 일본의 학설 및 판례가 수용하는 "직무행위는 특정될 필요는 없으나 어느 정도 구체성은 있어야 하며, 작위, 부작위를 불문"한다는 해석을 근거 없이 배척하고, '청탁'의 해석을 위하여 '부정한 청탁'에 대한 배임수재죄의 해석을 끌어들였는데, 국가적 법익죄의 해석에 개인적 법익죄의 해석론을 차용하는 것은 전체 형사법체계에 비추어 맞지 않고, 국가적 법익죄에 대한 뇌물죄의 청탁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마땅한 기준이 없다면 같은 국가적 법익죄에 대한 해석론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1) 뇌물죄에서의 다른 대법원 판례와의 비교 오히려 대법원은 '부정한 청탁을 받고' 뇌물을 수수할 것을 구성요건으로 요하는 형법 제130조 제3자뇌물수수죄의 '부정한 청탁'에 대하여 "청탁의 대상인 직무행위의 내용도 구체적일 필요가 없고 묵시적인 의사표시라도 무방하며, 실제로 부정한 처사를 하였을 것을 요하지도 않는다"(대판 2004도1632호)고 판시하고 있다. 위 사안에서 서울고등법원은 1심인 서울지방법원의 무죄 판결을 파기하면서 ① 공여자와 C가 처음 만나게 된 것이 관광지구 신청이 이루어질 무렵인 점(1995. 6.경 선거 무렵), ② C는 도지사로서 관광지구 지정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지위에 있었던 점, ③ 불과 1년전에 관광지구에서 제외된 부동산이 별다른 사정 변경 없이 관광지구로 지정된 점, ④ 인근 부동산에 관광지구로 신청된 것 중 공여자의 토지만 관광지구로 지정된 점 등을 비추어 C에게 대가성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판단함이 합리적이라고 하여 "관광지구 지정"이라는 직무행위에 대한 '명시적'이고, '구체적' 청탁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부정한 청탁'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하여 유죄로 인정하였고, 이에 대해 피고인이 이 부분에 상고하였지만 대법원에서 상고기각되었다. 위와 같이 국가적 법익죄인 제3자뇌물수수죄에서의 '부정한 청탁'에 대해서도 '묵시적'이고, '어느 정도의' 구체성만을 갖는 직무행위라면 그 청탁을 인정하는 것이 대법원 판례의 태도인데, 사전수뢰죄에서만 이를 달리 볼 이유는 없다고 하겠다.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이 그대로 받아들인 1심 판결의 사전수뢰죄의 법리해석은 이렇듯 그 이후에 다수 축적된 '청탁'의 법리와 모순을 보이고 있다. 2) 지방자치단체 長인 시장의 직무행위의 포괄성 : '포괄적 직무관련성' 적용의 필요성 또한 다른 공무원과는 달리 지방자치단체의 장의 경우에는 그 직무권한이 포괄적이어서 달리 파악할 필요성이 있다. '직무'와 '뇌물' 사이의 대가관계는 반드시 개개 직무행위에 대하여 구체적·개별적으로 성립할 필요는 없으며, 관련 공무원의 직무에 관한 것인 한 일반적·포괄적인 것이라도 상관 없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김일수, 정성근, 진계호 등)이다. 이러한 해석에 입각하여 대법원은 소위 '포괄적 직무관련성'(내지 포괄적 대가관계)에 대한 법리를 확립하였는데, 이는 대법원이 소위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대법원 96도3376호 판결)에서 "뇌물은 대통령의 직무에 관하여 공여되거나 수수된 것으로 족하고 개개의 직무행위와 대가적 관계가 있을 필요가 없으며, 그 직무행위가 특정된 것일 필요도 없다"고 판시한 사례 등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대통령의 업무가 국정 전반에 걸쳐 포괄적이고 막강하기 때문에 이러한 대통령의 지위를 정확하게 반영한 취지라고 할 것이고 대법원은 국회의원에게도 위 법리를 동일하게 적용(대법원 97도2609호 판결)하고 있다. 이러한 대통령의 포괄적, 광범위한 직무권한에 기초한 '포괄적 직무관련성'의 법리는 행정권에 대한 견제기능이 주권한이 되는 국회의원보다는 관할구역 내에서 대통령 못지 아니한 포괄적이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지방자치단체의 장에게 직접적으로 적용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 학설의 태도이고, 위 견해 역시 평석 대상 사건의 1심 판결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그 취지는 ① 사전수뢰죄와 일반수뢰죄가 다를 것이 없는 점, ② 관할구역에서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직무권한을 가진 단체장에게 포괄적 직무관련성 적용을 포기하고, '갑자기' 구체적 직무관련성을 요구하는 이유가 분명하지 않은 점, ③ 부산제강소의 현안문제를 잘 처리해달라는 것이 어찌 구체적 청탁이 될 수 없는지 이해할 수 없는 점 등인데, 마지막에서 제시한 것은 사실인정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특히 두 번째 지적사항은 관할구역 내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는 지방자치단체 장의 현실 및 그동안의 대법원이 일관되게 판시한 포괄적 뇌물죄 법리에 비추어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하겠다. 3) 형평성의 문제 또한 이 사건과 같이 당선개연성이 매우 높은 차기 시장에게 직무행위에 대한 엄밀한 구체성, 특정성을 요구하면, 퇴임을 앞두고 있어 실질적 권한 없는 현직 시장이 금원을 수수한 경우보다 처벌가치가 훨씬 큼에도, 현직 시장은 직무관련성만 인정되어도 처벌가능한 반면 차기 시장은 처벌하지 못하는 불합리한 결과에 이르게 되는 점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Ⅴ. 결론 : 사전수뢰죄에 대한 최초의 판단인 이 사건 대법원 판례는 선례로서의 가치가 극히 낮아 시정되어야 한다. 이 사건 대상 판결은 앞서 인용한 것처럼 서보학 교수가 지적하듯 사실관계 인정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지만, 법리적인 '청탁'의 해석에 있어 수긍하기 어렵다.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학설의 견해, 같은 구조를 갖고 있는 일본 형법과의 비교,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직무권한을 갖고 있는 우리나라 지방자치단체 장의 현실, 뇌물죄에서 다른 대법원 판례가 견지하는 '청탁'에 대한 해석 등 어떤 것과도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은 법원공보에 실리지 않았을 뿐더러, 법원의 내부전산망에서조차 키워드 검색이 불가능한 관계로 그 동안 학계나 실무계에서 충분히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사전수뢰죄 법리의 정립을 위해서도 위 판례는 조만간 시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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