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사실관계 및 대법원 판결
1. 사실관계 및 원심판결
원심판결이 인정한 사실관계는 다음과 같다. A는 2001. 9. 18. 피고 은행 지점으로부터 18억원을 대출받았다. 그런데 위 지점의 대출팀장이던 B(원심 공동피고)는 이 사건 대출 전에 A에게, 이 사건 부동산의 담보능력을 초과하여 최대한 많은 액수인 18억원을 대출한 것이어서 대출 후 대출금에 대한 이자를 연체하는 경우 불충분한 담보를 제공받고 대출을 실행해 준 B가 곤란해진다며 대출금에 대한 선이자 및 이면담보로 대출금 중 2억원을 예치하라고 거짓말하였다. 이에 속은 A는 이 사건 대출 당일 위 지점에서 이 사건 대출금 중 2억원을 B의 지시를 받은 은행 직원에게 교부하고, 그 후 B는 이를 건네받아 편취하였다. 원고는 A로부터 위 손해배상채권을 양수받아 B 및 피고 은행을 상대로 하여 손해배상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원심판결은 피고 은행의 사용자책임을 인정하고, A에게도 과실이 있으므로 이를 참작하여 과실상계를 하였는데 그 비율을 40%로 인정하였다. 그리고 피고의 A에 대한 대출금채권으로 상계한다는 주장에 대하여는 민법 제496조를 적용하여 이를 배척하였다.
2. 대법원 판결
대법원은 피고의 상고를 기각하였는데 그 중 피고의 상계주장을 배척하는 부분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민법 제756조에 의한 사용자의 손해배상책임은 피용자의 배상책임에 대한 대체적 책임이라 할 것이고(대법원 1992. 6. 23. 선고 91다33070 판결 참조), 민법 제756조 제1항에서 사용자가 피용자의 선임 및 그 사무감독에 상당한 주의를 한 때 또는 상당한 주의를 하여도 손해가 있을 경우에는 책임을 면할 수 있도록 규정함으로써 사용자책임에서의 사용자의 과실은 직접의 가해행위가 아닌 피용자의 선임·감독에 관련된 것으로 해석되는바,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피용자의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하여 사용자책임이 성립하는 경우에도, 불법행위의 피해자에게 현실의 변제에 의하여 손해를 전보케 하려는 취지에서 규정된 민법 제496조의 적용을 배제해야 할 이유는 없다고 할 것이므로, 사용자책임이 성립하는 경우 사용자는 자신의 고의의 불법행위가 아니라는 이유로 민법 제496조의 적용을 면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다.”
Ⅱ. 評釋
1. 종래의 논의
민법 제496조에 의하여 상계가 제한되기 위하여는 상계의 수동채무가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무라야 한다.
그런데 종래 피용자가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질러서 그 피용자의 사용자가 사용자책임을 지는 경우에도 그 사용자가 상계를 할 수 없는가에 대하여는 그다지 논의가 많지 않았다. 다만 사용자 본인의 고의는 없었다 하더라도 피용자의 고의에 의한 직무상의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채권도 현실적 변제를 강제할 필요가 있고, 또 그럼으로써 불법행위의 유발을 방지할 수도 있는 것이므로 제496조가 적용된다고 하는 견해가 있다(尹容燮, 民法注解 ⅩⅠ, 1995, 412면).
종전의 대법원 판례 가운데 이 점에 대하여 명시적으로 언급한 것은 없으나, 大判 1990. 12. 21, 90다7586은 이 사건과 같이 피용자의 기망에 의하여 사용자가 사용자책임을 지는 경우에 관하여 결과적으로 사용자책임의 경우에도 민법 제496조가 적용된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 사건 판결은 위와 같은 학설과 판례를 참조한 것으로 생각된다.
2. 使用者責任의 法的 性質
이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리기 위하여는 과연 사용자책임을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가 하는 점과, 민법 제496조의 취지는 무엇인가 하는 점을 따져 보아야 한다. 먼저 사용자책임의 법적 성질에 관하여는 종래 사용자가 피용자의 선임겙㉤뗄?관하여 상당한 주의를 하였음을 입증하면 면책된다는 점에서 순수한 의미의 무과실책임은 아니고 과실책임과 결과책임의 중간에 있는 중간적 책임이라고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고, 이를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는 주장된 바 없다. 그런데 이 사건 판결은 사용자의 손해배상책임은 피용자의 배상책임에 대한 대체적 책임이므로 피용자에게 고의가 있으면 사용자의 사용자책임도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으로 볼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원래 사용자책임이 피용자가 궁극적으로 부담해야 할 손해배상의무를 대신 배상해 주는 기능을 하는 이른바 대위책임인가, 아니면 사용자가 가해행위를 한 피용자의 선임겙㉤뗌?제대로 다하지 못하였다는 자신의 과실에 기한 자기책임인가 하는 점에 관하여는 다소 논의가 있다. 종래의 일반적인 견해는 이를 대위책임으로 이해하고 있으나, 자기책임이라는 견해도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사용자책임을 대위책임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그로부터 바로 피용자에게 고의가 있는 경우에는 바로 사용자책임도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 된다고 하는 결론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종래 대위책임설과 자기책임설은 주로 사용자책임이 성립하기 위하여 피용자의 고의나 과실이 있어야 하는가, 사용자가 손해배상채무를 이행한 경우에 피용자에 대한 구상권이 제한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논의되어 왔고, 사용자책임을 대위책임이라고 본다고 하여 피용자의 고의가 바로 사용자의 고의가 된다거나, 사용자가 부담하는 책임이 피용자의 책임과 동일한 성질이라고는 볼 수는 없으며, 이제까지 이러한 주장이 제기된 바도 없다.
대상 판결이 대위책임을 인정하는 선례로서 인용하고 있는 大判(全) 1992. 6. 23, 91다33070도 피용자와 제3자가 공동불법행위로 피해자에게 손해를 가하여 그 손해배상채무를 부담하는 경우에 사용자도 피용자와 마찬가지로 제3자와 부진정연대관계에 있다고 하였을 뿐이다.
피용자에게 고의가 있는 경우에도 사용자책임이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은 過失相計에서도 나타난다. 즉 판례는 피해자의 부주의를 이용하여 고의로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가 바로 그 피해자의 부주의를 이유로 자신의 책임을 감하여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허용될 수 없지만(大判 1995. 11. 14, 95다30352 등 다수),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가 그 피해자의 사용자에 대하여 사용자책임을 묻는 경우에는 과실상계를 할 수 있으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피용자의 손해배상의무와 사용자의 손해배상의무의 범위가 과실상계의 결과 각기 달라질 수 있다고 한다(大判 2004. 3. 26, 2003다34045 등). 이 사건의 원심판결도 원고의 B에 대한 청구에 대하여는 과실상계를 하지 않았으나 피고 은행에 대한 청구에 대하여는 과실상계를 인정하였다. 이처럼 피고 은행에 대한 과실상계를 인정하면서도 피고 은행의 사용자책임을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라고 보는 것은 모순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법인의 대표자에 의한 불법행위에 대하여 법인 자신이 손해배상책임을 지는 경우(민법 제35조)에는 법인의 대표자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 법인 자신의 불법행위책임으로 의제되는 것이므로, 이 경우에는 민법 제496조가 적용될 것이다.
3. 민법 제496조의 취지
민법 제496조가 고의의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채무를 수동채무로 하는 상계를 금지하고 있는 이유에 관하여, 이 사건 판결과 이 판결이 인용하고 있는 종래의 판례는, 위 규정의 취지는 고의의 불법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채권에 대하여 상계를 허용한다면 보복적 불법행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고, 또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가 현실의 변제를 받을 수 없는 결과가 됨은 사회적 정의관념에 맞지 아니하므로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의 발생을 방지함과 아울러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에게 현실의 변제를 받게 하려는 데 있다고 하는 점을 들고 있다. 종래의 학설도 대체로 이와 같은 취지이고, 민법 제496조와 같은 내용의 독일 민법 제393조에 관한 독일의 학설도 대체로 이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은 좀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고의의 불법행위에 대하여 상계를 허용한다면 보복적 불법행위를 유발하게 될 우려가 있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서는 맞는 말이지만, 적어도 자동채권이 수동채권보다 늦게 성립한 경우에는 이러한 설명이 들어맞지는 않는다. 그리고 고의의 불법행위로 인한 피해자에게 현실의 변제를 받게 하려는 데 있다는 점에 대하여는, 피해자의 변제의 필요성은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이건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이건 차이가 없으므로 그것만으로는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의 경우에 상계를 제한하는 설득력 있는 이유가 된다고 하기 어렵다.
사견으로는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의 경우에 이를 수동채무로 하는 상계를 허용하지 않는 이유 내지 그것이 사회적 정의관념에 맞지 않는 이유는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는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의 경우나 기타 다른 채무의 경우보다 좀더 강한 제재를 받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이다.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를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와 비교한다면 그 結果不法(Erfolgsunrecht)의 면에서는 차이가 없지만, 行爲不法(Handlungsunrecht)의 면에서는 그 비난가능성이 더 큰 것이다. 따라서 법은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의 경우에는 가해자의 상계를 허용하지 않음으로써 이른바 상계의 擔保的 機能을 박탈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피해자의 무자력의 위험까지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상계의 금지는 과실의 경우보다는 고의의 경우에 불법행위의 발생을 억지하는 효과가 더 크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의 가해자가 상계를 할 수 없는 주된 근거는 가해자가 의도적으로 불법행위를 저질렀다는 점에 있다. 종래의 학설과 판례가 고의의 불법행위의 가해자가 상계를 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관념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이유도 이 점에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사용자책임의 경우에는 비록 그 피용자의 불법행위는 고의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사용자에게는 그러한 고의가 있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사용자에 대한 비난가능성이 다른 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에 비하여 크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과 같은 경우에는 비록 피용자의 불법행위가 고의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사용자의 상계를 허용하지 않을 이유는 없는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중과실의 불법행위에 인한 손해배상채권을 수동채무로 하는 상계가 허용된다고 한 大判 1994. 8. 12. 선고 93다52808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사건의 원심에서는 중과실에 의한 불법행위를 원인으로 한 채권을 수동채권으로 하는 상계도 허용할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중과실의 불법행위에 인한 손해배상채권에 대하여 상계를 허용한다고 하여도 다른 채권이 있는 채권자가 의도적으로 중과실의 불법행위를 일으킬 수는 없는 것이므로 이에 대한 상계의 허용여부는 중과실에 의한 불법행위의 발생방지와 특별한 관련성이 있다고 할 수 없고, 고의가 아닌 중과실로 인한 불법행위의 경우에는 피해자가 현실로 지급받지 못하더라도 사회적 정의관념에 부합되지 아니한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아가 위 판결은 민사법의 실정법 조항의 문리해석 또는 논리해석만으로는 현실적인 법률적 분쟁을 해결할 수 없거나 사회적 정의관념에 현저히 반하게 되는 결과가 초래되는 경우에 있어서는 법원이 유추해석이나 확장해석을 할 수 있지만, 민법 제496조의 경우에는 고의의 불법행위에 인한 손해배상채권에 대한 상계금지를 중과실의 불법행위에 인한 손해배상채권에까지 유추 또는 확장 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판시는 대체로 피용자의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의 경우에 사용자가 사용자책임을 부담하는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사용자의 상계를 허용한다고 하여 불법행위의 발생을 유발한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고, 또 가해자에게 중과실이 있는 경우와 비교하여 사용자의 비난가능성이 더 높아서 상계를 허용하는 것이 사회적 정의관념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사용자책임 그 자체를 고의에 의한 불법행위책임이라고 할 수 없는 이상, 민법 제496조를 사용자책임의 경우에까지 확장적용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