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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통신사업법상 통신자료 제공요청 규정의 위헌성
1. 사안의 개요 청구인들은 검사 또는 군수사기관의 장을 포함한 수사관서의 장, 정보수사기관의 장의 요청에 따라 자신들이 가입한 전기통신사업자가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가입일 등의 통신자료를 제공하였음을 알게 되자 1) 위 수사기관 등의 각 통신자료 취득행위(이하 ‘이 사건 통신자료 취득행위’라 한다)와 2) 그 근거법률인 전기통신사업법 제83조 제3항 중 “검사 또는 수사관서의 장(군 수사기관의 장을 포함한다), 정보수사기관의 장의 수사, 형의 집행 또는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 방지를 위한 정보수집을 위한 통신자료 제공요청”에 관한 부분(이하 ‘심판대상조항’이라 한다)에 관하여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 의한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2. 결정의 요지 헌법재판소는 1) 이 사건 통신자료 취득행위에 관한 심판청구는 각하하였고, 2) 심판대상조항에 대하여는 2023. 12. 31.을 시한으로 잠정적용을 명하는 헌법불합치결정을 하였다. 3. 평석 가. 결정의 배경 헌법재판소는 2012년 유사한 사건에서 통신자료 취득행위와 구 전기통신사업법 조항에 관하여 모두 각하결정을 한 바 있다(헌재 2012. 8. 23. 2010헌마439). 그러나 그 이후에도 시민사회뿐만 아니라 유엔 자유권규약위원회와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도 전기통신사업법에 의한 수사기관 등(여기에는 검찰, 경찰, 고위공직자수사처 등이 포함된다)의 통신자료 취득에 기본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는 우려가 계속하여 제기되었다. 대상결정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2016년 및 2022년 청구된 합계 4건의 헌법소원심판 사건을 병합하여 판단에 이른 것이다. 대상결정은 심판대상조항이 통신자료 제공 이후에도 정보주체에게 이를 통지하는 절차를 두고 있지 않아 적법절차원칙에 반한다는 이유로 헌법불합치결정을 하였다. 심판대상조항이 적법절차원칙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점은 타당하나 대상결정에 따른 후속입법에 있어서는 쟁점이 되었던 다른 위헌사유들도 진지하게 검토하여 헌법적으로 최적화된 대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나. 적법요건 대상결정은 적법요건에 관한 중요 쟁점을 몇 가지 포함하고 있으므로 먼저 이에 관하여 본다. 헌법재판소는 우선 이 사건 통신자료 취득행위 부분은 헌법소원심판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았고 이 점은 2012년 결정과 같은 취지이다. 공권력 행사에 해당하기 위해서는 국가기관이나 공공단체의 고권적 작용으로 인하여 청구인의 법률관계 내지 법적 지위를 불리하게 변화시켜야 하는데 통신자료를 제공요청하고 전기통신사업자로부터 이를 자발적으로 제공받은 것은 임의수사에 불과하여 공권력 행사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이다(이에 대해 공권력 행사에 해당하지만 권리보호이익 흠결을 이유로 각하해야 한다는 별개의견도 제시되었다). 2012년 결정과 달라진 부분은 통신자료 제공과 취득의 근거규정인 심판대상조항의 직접성에 관한 판단으로서 이로 인하여 대상결정의 본안판단이 이루어질 수 있게 되었다. 헌법소원의 적법요건 중 기본권침해의 직접성만큼 논란이 많은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이러한 배경에는 헌법재판소법 제68조 제1항에 명시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 외에 경우에 따라서는 판례의 태도에서 일관성을 찾기가 쉽지 않다는 점도 작용한다고 보인다. 법률조항은 구체적인 집행행위를 기다리지 아니하고 그 자체에 의하여 자유의 제한, 의무의 부과, 권리 또는 법적 지위의 박탈을 일으키는 경우 그 직접성이 인정될 수 있다. 사안에서는 공권력주체인 수사기관 등의 통신자료 제공요청과 사적 행위자인 전기통신사업자의 제공행위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 집행행위의 실행이 있어야 비로소 기본권 제한이 발생하므로 원칙적으로는 기본권침해의 직접성이 없게 된다. 2012년 선행결정은 특히 전기통신사업자의 통신자료 제공행위가 재량에 달려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러한 취지로 판시하였다. 그러나 ‘사인(私人)의 행위’는 공권력작용이 아니므로 집행행위로 볼 수 없다는 판례들(가령 헌재 1996. 4. 25. 95헌마331)에 비추어 보더라도 직접성 판단에 있어 이 부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반면 대상결정은 적어도 영장주의나 사후통지 등 절차와 관련하여서는 법률에서 그 제도를 두지 않아 기본권 침해가 직접 문제 된다고 할 수 있고, 집행행위로 인하여 비로소 기본권 제한이 발생한다고 볼 수밖에 없는 부분이 있더라도 “통신자료 취득행위에 대한 직접적인 불복수단이 존재하는지가 불분명”하고, “이용자는 수사기관 등의 통신자료 제공요청의 직접적인 상대방이 아니어서 다른 절차를 통해 권리구제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직접성의 예외가 인정될 수 있다고 보아 기존 판례를 변경하였다. 공권력작용과 사인의 행위가 결합된 형태의 집행행위에 이러한 법리가 향후 일관되게 적용될 것인지 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일부 청구인들은 통신자료 취득시점으로부터 1년이 도과한 이후에 심판청구를 하였으나, 사후통지를 받지 못한 이상 기간도과에 청구인들이 책임질 수 없는 정당한 사유가 있다고 본 점도 눈에 띈다. 다. 기본권 침해 여부 헌법재판소는 심판대상조항에 의하여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제한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심판대상조항의 통신자료는 정보주체의 동일성을 식별할 수 있는 ‘성명, 주민등록번호, 주소, 전화번호, 아이디, 기입일·해지일’을 뜻하므로 사안에서 개인정보자기결정권의 제한이 발생한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청구인들은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외에 통신의 비밀 제한도 발생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헌법재판소는 이에 관하여 명시적인 판단을 하지 않았다. 이는 전기통신사업법상 통신자료가 “구체적인 통신관계의 발생으로 야기된 모든 사실관계, 특히 통신관여자의 인적 동일성·통신장소·통신횟수·통신시간 등 통신의 외형을 구성하는 통신이용의 전반적 상황(헌재 2018. 6. 28. 2012헌마538)”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일 수 있으나 더 명시적인 논거와 판단기준이 드러나지 않은 점은 아쉽다. 심판대상조항의 개인정보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는 명확성원칙, 과잉금지원칙, 영장주의, 적법절차원칙을 기준으로 검토되었다. 명확성원칙과 관련하여서는 심판대상조항 중 ‘국가안전보장에 대한 위해’ 부분만이 문제 되었으나 일반인도 그 취지를 충분히 예측할 수 있다고 보아 명확성원칙 위반을 인정하지는 않았다. 과잉금지원칙과 관련하여서는 통신자료로서 제공되는 정보의 범위, 제공요청의 사유, 통신자료의 사전·사후 관리 등이 집중적으로 고려되었는데, 법정의견은 이 모든 사항과 관련하여 필요 이상의 기본권 제한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한 반면, 별개의견(재판관 이종석)은 통신자료로서 ‘만능키’와 같은 주민등록번호도 수집할 수 있고, 개인정보에 관한 보관기간이나 폐기절차 등 사후관리방법도 부재하는 이상 과잉금지원칙 위반을 인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필자는 선행정보가 후속정보의 대규모 수집, 생산으로 이어질 수 있는 오늘날의 정보통신환경을 고려할 때 별개의견이 제시한 논거들에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상결정은 절차적 통제원칙들인 적법절차원칙과 영장주의의 관점에서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헌법재판소는 적법절차원칙의 ‘절차적’ 요청으로 적절한 고지와 의견 및 자료 제출의 기회 부여를 들고 있고 제도와 사안에 따라 그 구체적 요구의 정도가 달라진다고 보고 있다. 대상결정은 심판대상조항이 사전고지절차를 마련하고 있지 않은 것은 물론, 통신자료 제공 이후 사후통지절차조차 두고 있지 않아 적법절차원칙상 요구되는 최소한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보았으며 이는 타당하다고 평가된다. 재판관들도 이 점에 있어서는 별다른 이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영장주의에 관하여 짚어 볼 필요가 있다. 대상결정은 심판대상조항에 따른 통신자료 제공요청은 통신비밀보호법상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헌재 2018. 6. 28. 2012헌마191)과 달리 임의수사에 불과하여 영장주의 적용이 배제된다고 간략히 판시하는 데 그쳤으나, 기실 이는 상당한 논쟁을 배경으로 한 것이다. 특히 대상결정이 나오기 이전에 통신자료 취득에 관하여 영장주의가 적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상당수 발표되었음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오동석, 황성기, 차진아, 임규철. 반대견해로는 이기수, 유주성). 영장주의 적용론은 정보제공 여부를 결정할 지위에 있는 전기통신사업자가 당해 개인정보의 주체가 아니라는 점과 제3자인 전기통신사업자조차 정보제공 여부의 타당성을 실질적으로 심사할 의무를 부담하지 않는다는 점(대법원 2016. 3. 10. 선고 2012다105482 판결 참조)을 주된 논거로 한다. 위와 같은 논쟁의 배경에 행정상의 인신구속 등에 관하여도 영장주의의 적용이 검토되고 있는 상황(헌재 2020. 9. 24. 2017헌바157 등 보충의견 참조)을 더하여 보면, 대상결정 중 영장주의에 관한 판시와 논증은 충분치 못하였다고 보인다. 통신자료의 취득이 통신사실 확인자료 제공요청 등 보다 강력한 기본권제한조치들과 빈번하게 결부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러하다. 라. 향후의 과제 대상결정은 사후통지절차의 흠결에 초점을 두고 헌법불합치결정을 하였는바, 적용시한인 2023. 12. 31. 이전에 개정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전기통신사업법에 관한 개정안은 이미 수차례 제안된 바 있고 전기통신사업법 자체의 전면개정이 추진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입법자는 개정과정에 있어 헌법재판소가 직접적인 헌법불합치사유로 거론한 ‘최소한의 사후통지절차’를 마련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통신자료의 범위, 적절한 사전적 통제수단의 필요성, 보관기간이나 절차의 마련 등 대상결정에서 검토되었던 다른 위헌사유들을 진지하게 검토하여 헌법적으로 최적화된 대안을 마련하여야 할 것이다. 조동은 교수(서울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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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
조동은 교수(서울대 로스쿨)
2023-02-01
가사·상속
성년후견개시심판에서 처분권주의
1. 사실관계 및 대법원의 판단 사건본인의 장남인 청구인은 사건본인이 1997년경 뇌졸중으로 쓰러진 이후 사건본인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었고, 참가인은 2002년경부터 사건본인을 간병하며 동거해오다가 2018년 혼인신고를 하였다. 사건본인은 2018년 11월경 혈관성 치매 등 진단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였고, 참가인은 사건본인과의 혼인신고와 2019년경 사건본인 소유의 건물을 담보로 대출을 시도하는 등의 문제로 사건본인의 자녀들과 갈등이 있었다. 청구인은 사건본인에 대한 성년후견의 개시와 자녀들을 성년후견인으로 선임할 것을 청구하였으나 제1심 법원은 한정후견을 개시하고 법무사를 한정후견인으로 선임하였다. 이에 청구인은 사건본인의 사무처리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어 한정후견이 아닌 성년후견이 개시되어야 한다며 항고하였고, 사건본인은 후견개시가 불필요하고 후견이 개시되더라도 참가인이 후견인으로 선임되어야 한다며 항고하였다. 원심은 사건본인에 대한 정신감정 없이, 조사 결과 및 심문 전체의 취지를 종합하여 사건본인의 사무처리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청구인과 사건본인의 각 주장을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법원은 민법이 성년후견과 한정후견을 구별하여 개시 요건과 청구권자 등을 개별적으로 정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성년후견과 한정후견의 요건 중 '사무처리 능력의 지속적 결여'와 '사무처리 능력의 부족'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또한 성년후견이나 한정후견에 관한 심판 절차는 가사비송사건이므로 가정법원이 당사자의 주장에 구애받지 않고 후견적 입장에서 합목적적으로 결정할 수 있고, 성년후견이나 한정후견 개시의 청구가 있는 경우 가정법원은 청구취지와 원인, 본인의 의사, 성년후견제도의 목적 등을 고려하여 필요한 절차를 결정해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청구인이 성년후견의 개시를 청구하고 있더라도 필요하다면 한정후견을 개시할 수 있고, 한정후견의 개시를 청구한 사건에서도 감정 결과 등에 비추어 성년후견 개시의 요건을 충족하고 본인도 성년후견의 개시를 희망한다면 법원이 성년후견을 개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2. 가사비송사건과 처분권주의 소송물에 대한 당사자의 결정권을 보장하는 처분권주의는 절차의 개시, 심판의 대상과 범위, 절차의 종결을 당사자의 의사에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변론주의는 변론에서 재판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당사자가 제출하도록 하는 소송자료 수집에 관한 것으로, 소송물 결정에 관한 처분권주의와 개념을 구별해야 한다. 변론주의와 대비되는 원칙인 직권탐지주의와 처분권주의는 양립 가능한 것이므로, 직권탐지주의가 적용된다고 해서 처분권주의가 바로 제한된다고 볼 수는 없다. 성년후견개시심판에서 법원이 청구권자의 청구와 무관하게 한정후견을 개시할 수 있다는 결정은 당사자가 청구한 대상과 다른 대상에 관하여 판단하는 것으로 법원의 판단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고, 가사비송사건에도 적용되는 처분권주의의 제한 범위를 넘어서는 것으로 타당하지 않다. 성년후견개시심판을 비롯한 성년후견제도 관련 사건은 라류 가사비송 사건이지만 법원의 후견개시 심판의 경우 실무상 청구권자 사이의 대립과 청구권자와 사건본인과의 대립양상이 많이 있어 청구인과 관계인 사이의 다툼이 존재하기 때문에 처분권주의를 보장하여 당사자와 이해관계인이 불측의 판결을 받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다. 3. 성년후견개시심판에서 한정후견 개시 성년후견개시심판과 한정후견개시심판은 실체법상 별개의 청구에 해당하여 소송물이 다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소송물의 동일성에 관한 판단기준에는 구실체법설(구소송물이론), 소송법설(신소송물이론), 신실체법설 등 여러 견해가 있으나, 판례는 실체법상의 적용법조가 달라지면 그 권리관계를 소송물로 보아 청구를 달리 보고 있다. 성년후견개시심판(민법 제9조)과 한정후견개시심판(민법 제12조)은 실체법상 별개의 청구에 해당하고, 성년후견개시심판은 가사소송법 제2조 제2호 가목 1)에, 한정후견개시심판은 동법 제2조 제2호 가목 1)의3에 규정된 라류 가사비송사건으로 실체법이나 소송법상으로 각각 소송물이 다른 별개의 청구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년후견의 개시를 청구한 사건에서 법원은 직권으로 한정후견을 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개정 전 민법의 행위무능력 제도에서는 재산관리와 거래 안전에만 목적을 두고 정신적 제약이 있는 사람들을 일률적으로 행위능력을 박탈하거나 제한하였지만, 성년후견제도는 이러한 획일적인 행위무능력 제도를 개선하기 위하여 여러 후견유형을 인정하여 탄력적 운영이 가능하게 입법하였다. 잔존능력의 활용, 본인 의사의 존중, 정상화의 원칙, 필요성과 보충성의 원칙을 기본으로 하여 성년후견제도를 성년후견, 한정후견, 특정후견으로 나누어서 피성년후견인에게 적절한 후견을 개시하도록 한 것이다. 대상판결과 같이 청구인이 성년후견 개시를 청구하였으나 법원이 직권탐지주의에 의한 사실조사 등의 심리 결과 성년후견개시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하였거나 법원이 후견적 입장에서 한정후견을 개시하는 것이 상당하다고 판단할 경우에는 심리에서 석명 등을 통하여 청구인이 청구취지를 변경할 수 있도록 하고, 사건본인의 복리를 위해서 한정후견의 개시가 필요함에도 청구인이 청구취지 변경에 응하지 않는 예외적인 경우에도 법원은 직권으로 한정후견개시 결정을 하기보다는 청구를 기각해야 할 것이다. 4. 한정후견개시심판에서 성년후견 개시 대상판결에서는 한정후견의 개시를 청구한 사건에서도 성년후견 개시의 요건을 충족하고 본인도 성년후견의 개시를 희망한다면 법원이 성년후견을 개시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한정후견의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과 성년후견의 '사무를 처리할 능력이 지속적으로 결여된 사람'은 대상판결의 판시와 같이 정도의 차이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각각 다른 사무처리 능력을 가진 본인을 상정한 것이다. 후견이 개시될 경우 피성년후견인은 행위능력이 인정되지 않는 반면 피한정후견인은 원칙적으로 행위능력이 인정되고, 성년후견인은 포괄적인 법정대리권을 가지게 되지만 한정후견인은 동의권을 행사하며 지정된 범위에서 대리권을 행사한다. 이처럼 한정후견제도는 단순히 성년후견제도와 사무처리 능력 정도의 양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가진 별개의 제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성년후견개시심판 청구에서 한정후견개시의 심판을 하는 경우보다 한정후견개시심판을 청구한 사건에서 성년후견을 개시하는 심판은 특히 경계하여야 한다. 성년후견제도가 도입된 취지가 본인의 잔존 의사능력을 활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을 때, 사건본인의 의사결정능력을 대체하는 성년후견의 개시는 당사자의 청구가 있는 경우에도 직권 탐지를 통하여 신중하게 판단하여야 한다. 청구권자가 한정후견개시의 심판을 청구하였는데 성년후견을 개시하는 심판을 하는 것은 당사자가 청구한 대상과 다른 대상에 대하여 판단하는 것으로 판단 범위를 넘어서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건본인이 필요 이상으로 행위능력의 제한을 받지 않고 잔존능력을 활용하도록 하는 성년후견제도의 이념에도 정면으로 반하는 것이다. 특히 사건본인이 청구인일 경우에는 자기결정권을 침해하여 본인의 의사에 반하는 결정이 내려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성년후견제도의 목적은 정신적 제약이 있는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과 평등하게 법적 권리를 행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년후견제도는 성년후견인이 본인의 의사결정을 대체하여 결정하는 것이 아닌, 본인이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본인의 의사에 부합하는 결정을 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은 장애인이 모든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를 완전하고 동등하게 향유할 수 있도록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동등한 법적 능력을 인정하고, 장애인이 법적 능력을 행사하는 데 필요한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장애인권리협약 제12조).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는 한국 정부의 국가보고서에 대한 최종견해에서 한국의 성년후견제도가 피성년후견인의 신상과 재산에 관하여 성년후견인이 결정하도록 허용하는 것에 우려를 표하고, 그러한 성년후견제도는 협약 제12조의 규정에 반하는 것이므로 우리의 성년후견제도와 같은 의사결정대행 제도에서 의사결정지원 제도로 전환할 것을 권고하기도 하였다. 성년후견개시심판은 사건본인의 행위능력을 대체하여 성년후견인이 재산 관계 뿐만 아니라 신상에 관한 결정까지 하게 되는 것으로 피성년후견인의 기본적 인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재판이고, 청구인에게도 신분 관계 및 상속 등 재산 관계에 대하여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므로 그 절차의 개시와 법원의 판단 범위는 소를 제기한 당사자의 처분에 따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법원의 직권조사에도 당사자의 의견진술권을 보장하는 가사소송법 개정이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직권조사에 관하여도 당사자에 대한 절차보장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대상판결의 내용이 앞으로 법원이 당사자가 신청한 후견제도의 종류 및 실체법상 청구권자와 무관하게 직권으로 성년후견을 개시할 수 있는 근거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오진숙 변호사(서울대 공익법률센터)
성년후견
한정후견
자기결정권
오진숙 변호사(서울대 공익법률센터)
2022-01-10
국가배상
민사일반
일본군 위안부 판결과 국가면제이론
Ⅰ. 사건 경과 원고들은, 일본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침략전쟁 수행을 위하여 조직적·계획적으로 ‘위안소’를 설치·운영하였고, 의사에 반하여 유괴·납치하여 모집하였을 뿐만 아니라 위안소에 감금한 채 상시적 폭력, 고문, 성폭행을 일삼았다면서, 국제법 위반 및 민사상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재판부는 일본국이 소장 등 서면 송달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공시송달절차를 통해 2021.1.8. 원고 승소판결(이하 이사건 판결이라 한다)을 선고하였고, 피고가 항소하지 않아 확정되었다. 한편, 다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2016.12.28. 제소한 사건(2016가합580239)은 1.13. 선고 예정이었으나, 재판부가 추가 심리를 이유로 변론을 재개하여 현재 계류중이다. Ⅱ. 이사건 쟁점 재판부는 국가면제론을 배척하는 한편 1965 청구권 협정 및 2015 한일합의로 소멸하지 않았다면서 일본국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하였다. 다만 본 고에서는 지면 관계상 국가면제이론 적용에 따른 재판권 유무에 대해서만 검토한다. Ⅲ. 국가면제 적용 여부에 따른 재판권 유무 1. 국가면제 이론의 개요 국제법 이론에서 국내 법원은 원칙적으로 외국 국가가 스스로 외교상 특권을 포기하는 경우 등을 제외하고는 외국 국가에 대한 소송에서 민사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절대적 국가면제이론이 대세였고, 대법원 역시 그러한 태도를 보였으나(대법원 1975. 5. 23.자 74마281 결정), 20세기에 들어서 다수 국가가 사법적·상업적 행위와 같은 비주권적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상대적 면제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대법원 역시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상대적 면제를 인정하는 태도로 변경하였다(대법원 1998. 12. 17. 선고 97다39216 전원합의체 판결). 2. 이탈리아 페리니 강제노역 사건 진행 경과 가. 대표적인 국가면제관련 사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체포되어 군수공장에서 강제노역 당한 이탈리아인 Ferrini가 1998.9.23. 독일국을 상대로 Arezzo 지방법원에 제기한 손해배상청구 사건 {Ferrini v Germany, Appeal decision, no 5044/4; ILDC 19 (IT 2004)} 이다. 나. Arezzo 지방법원은 2000.11.3. 독일의 행위는 국가면제를 원용할수 있는 권력적 행위에 해당한다면서 소를 각하하였고, 2002.1.14. Firenze 항소심 또한 항소를 기각하였다. 그런데 이탈리아 대법원은 2004.3.11. 독일의 행위는 주권적 행위이고 인권보호는 불가침성이며 강행규범을 위반하는 국제범죄국가의 행위에는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며 원심 파기하였다(Decision of Italian Court of Cassation, Ferrini v. Federal Republic of Germany, Judgment No. 5044, 11 March 2004.). 이에 독일은 2008.12.23. 이탈리아 국내법원의 판결은 국가면제 원칙에 위반된다는 이유로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였다. 다. ICJ는 2012.2.3. 15인 재판관중 12인 다수의견은 이탈리아 법원이 국가면제를 부인하고 민사소송을 허용한 것은 국가면제권을 존중할 의무를 위반한 것이라면서, 각국의 입법례 및 판결을 검토해보더라도 국가 간 무력 충돌 과정에서 다른 국가의 영토 내에서 자신의 무장병력과 국가 기관들에 의해 저질러진 군사행위에 대하여도 국가면제를 부여하는 국제관습법은 여전히 유효하고, 국가면제는 절차와 관련된 문제이고, 강행규범 준수는 실체법적인 문제이므로 국가면제 적용을 고려함에 있어 실체법적으로 강행규범을 준수하였는지는 무관하다는 취지로 판시(GERMANY v ITALY:GREECE intervening. JUDGMENT OF3 FEBRUARY 2012)하였다. 이에 대하여, 반대의견을 밝힌 3인 중 Cancado Trindade 재판관은 국제범죄, 인권의 중대한 위반, 국제인도법의 중대한 위반에 대해서는 국가면제가 인정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으며, Adbulqawi Ahmed Yusuf 재판관은 다른 구제 수단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국가 면제가 피해자 보상 의무를 회피하기 위한 장벽으로 이용돼서는 안 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아울러 Giorgio Gaja 재판관은 불법행위가 이탈리아 영역 내에서 행해진 사건에 관해서는 그와 같은 국제관습법의 존재가 부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라. 결국 이탈리아 국회는 2013.1.1.4 UN헌장 및 ICJ 제59조, 제60조에 따라 ICJ 판결을 국내법으로 수용하기 위해 동종 사건이 계류하는 법원에 직권으로 관할권 배제를 선언할 것을 의무화하고 확정 판결의 재심사유에 관할권 배제를 추가하는 법률(2013. 1. 14. 법률 제5호)을 제정하였는데, 이탈리아 Firenze 지방법원은 2014.1.21.위 법률에 대해 위헌심판을 제청하였다. 마. 이탈리아 헌법재판소는 2014.10.22. 관할권 면제 법률에 대하여 재판관 12명 전원 일치 의견으로‘반인륜적 범죄로 인정되는 추방, 노예 노동, 대량 학살과 같은 행위들은 그 범죄의 희생자들의 불가침적 권리에 대한 사법적 보호라는 국내법적 질서의 절대적인 희생을 정당화할 수 없다. 이탈리아 법원에 대하여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를 구성하는 외국국가의 행위에 관한 사안에서 재판권을 부인하도록 한 ICJ 판결을 따르도록 의무화하는 범위에서 위헌’이라고 결정(JUDGMENT NO. 238?YEAR 2014. THE CONSTITUTIONAL COURT)하였다. 3. 이사건 재판부 판결 요지 이사건 재판부는 국가면제를 배척하면서 아래와 같이 판결하였다. [이 사건 행위는 일본제국에 의하여 계획적, 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제 강행규범을 위반한 것이며, 당시 일본제국에 의하여 불법점령 중이었던 한반도 내에서 우리 국민인 원고들에 대하여 자행된 것으로서, 비록 이 사건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면제를 적용 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본다. 국가면제 이론은 항구적이고 고정적인 가치가 아니고, 국제질서의 변동에 따라서 계속하여 수정되고 있다. 위안부 피해자들은 일본, 미국 등의 법원에 여러 차례 민사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모두 기각되거나 각하되었다. 청구권협정과 2015년‘일본군위안부 피해자 문제 관련 합의’ 또한 피해를 입은 개인에 대한 배상을 포괄하지 못하였다.] Ⅳ. 이사건 판결에 대한 평가 1. 외국 사례 가. 그리스 대법원은 2000.5.4. 나찌에 의한 그리스의 디스토모 218명 집단 학살사건 관련 독일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국제법상 강행규범에 위반한 불법행위는 주권적 행위로 볼 수 없고, 독일은 강행규범에 위반함으로써 묵시적으로 국가면제를 포기하였다고 하면서 독일의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약 3,000만 달러의 손해배상을 명하는 판결을 선고한바 있다. 나. 한편, 법정지 내에서 발생한 사망, 상해. 훼손에 따른 보상절차시 국가면제를 주장할수 없다는「국가면제에 관한 유럽협약」 제11조나 「유엔국가면제협약」 제12조 또한 상대적 면제이론에 입각하여 법정지국 내 외국의 불법행위에 대해서 국가면제를 배척하고 있다. 다. 1996년 개정된 미국 「외국국가면제법」에 따르면 미국정부가 테러지원국가라고 인정한 국가에 대해서는 고문이나 초법규적 살해 등의 행위에 관해서는 국가면제를 부인하고 있으며, 실제 미국 연방지방법원은 2018.12 위 법을 근거로 미국인 오토 윔비어의 유족들이 북한을 피고로 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국가면제를 배척하고 배상판결을 선고하였다. 라. 일본 최고재판소 또한 2006.7.21 판례를 변경하여 명시적으로 상대적 면제이론을 채택하였고, 이에 일본국은 2007년 유엔국가면제협약에 서명한 후 2009. 4. 17. 예외적으로 사람의 사망이나 상해 등에 따른 손해배상에 관하여 국가면제를 배제하는「외국 등에 대한 우리나라의 민사재판권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였다. 영국, 싱가포르, 파키스탄,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도 상대적 국가면제 법리를 채택하여 입법화하였다. 2. 국가면제론에 대한 의견 중대한 반인권적 범죄 행위에 대해 국가면제를 부인하고 재판 관할권을 인정한 2000년 그리스 및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 판결, 그리고 2014년 이탈리아 헌법재판소 결정, 그리고 상대적 국가면제를 확장하고 있는 입법례 등에 비추어, 2012년 ICJ가 인정한‘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국가면제의 국가관습법’이 현재에도 존재하는지 의문이다. 어느 국가가 타국 국민에 대하여 1921년 여성과 아동의 인신매매 금지 조약 및 1926년 노예협약 등 국제협약에 반한 반인권적 범죄를 범하였음에도 이를 제재하고 피해배상을 명할 수 없다면, 결국 피해자들은 국제협약 및 당해국가 헌법에서 보장한 재판받을 권리를 박탈당하여 자신의 권리구제를 받지 못하게 된다. 이는 헌법을 최상위 규범으로 하는 자국 법질서 이념에도 부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중대한 인권침해를 한 국가가 국가면제 이론 뒤에 숨어 이를 회피하도록 허용하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국제협약과 헌법상 권리가 하얀 종이위의 검은 글씨여야 하는가. 3. 이사건 판결에 대한 평가 이사건 판결은 이러한 ICJ판결 등 국가면제의 불가변적인 논의를 배제하고 사법부가 인권보호의 최후 보루임을 자임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찌 침해국가가 아닌 일본국 피해국가인 대한민국에서 아시아 최초로 판결하였다는 점에서, 나아가 향후 국가의 중대한 인권침해에 대한 시론적 판결이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물론 국가면제의 배제·예외로 인정할수 있는 실체적 요건으로 국가기관의 관여, 침해기간, 방법, 피해 내용과 정도 등‘국제법 내지 강행법규에 위반한 국가의 중대한 인권침해’가 무엇인지, 나아가 절차적 요건으로‘다른 구제수단이 없는 최후수단성’에 대한 보다 정교한 논의가 필요한 때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러한 국제법적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도 백척간두 진일보한 판결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는 여전히 이탈리아 Abdulqawi Yusuf 재판관이 말한“국가면제는 결코 국제법상 불변(immutable)의 가치가 아니다”라는 말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조영선 변호사 (법무법인 동화)
일본
위안부
국가배상
조영선 변호사 (법무법인 동화)
2021-03-22
군사·병역
국제인권법이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는 근거
- 광주지방법원 2015노1181, 1535, 1668 판결 -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판결 - 1. 사실관계 및 항소의 요지 피고인들은 원심에서 현역병 입영통지서를 수령하고 정당한 사유 없이 3일이 지나도록 입영하지 아니한 경우 3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병역법 제88조 제1항(이하 ‘이 사건 법률’이라고만 함) 위반으로 유죄선고를 받았는바, 이에 대하여 피고인들은 우리나라가 가입한 시민적 및 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규약(이하 ‘규약’이라고만 함) 제18조 및 헌법 제19조에 의한 양심의 자유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였고, 이러한 행위는 이 사건 법률 제1항의 ‘정당한 사유’에 포함되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함에도 정당한 사유가 없다고 본 원심은 법리오해의 위법이 있다는 취지로 항소를 하였다. 2. 관련 대법원 판결들의 요지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관한 사건에 관하여 2004년 “헌법 제19조(양심의 자유), 제20조(종교의 자유)가 보호하는 자유는 헌법 제29조 제1항(국방의 의무) 및 제37조 제2항에 의하여 제한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헌법상 허용된 정당한 제한이어서 이 사건 법률 제1항의 정당한 사유에 피고들이 주장하는 양심의 자유가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시하면서 규약 제18조 규정도 헌법 제19조(양심의 자유), 제20조(종교의 자유)의 해석상 보장되는 기본권의 보호 범위와 동일한 내용을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규약의 위 조항으로부터 이 사건 법률조항의 적용을 면제받을 수 있는 권리가 도출된다고 볼 수 없다”(대법원 2004. 7. 15. 선고 2004도2965 전원합의체 판결), 2007년 “규약 제18조는 물론 규약의 다른 조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인정하는 명문의 규정이 없고 규약의 제정 과정에서 규약 제18조에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포함시키자는 논의에 대하여 관여 국가들의 의사가 부정적인 점 등을 근거로 규약 제18조로부터 양심적 병역거부권이 도출될 수 없다”고(대법원 2007. 12. 27. 선고 2007도7941 판결) 각각 판시하였다. 3. 국제인권법의 국내법 적용에 관한 항소심(대상판결)의 판단의 요지 및 근거 대상판결은 우리 헌법 제6조 제1항의 국제법 존중주의원칙에 따라 국가가 체결 공포한 조약과 일반적으로 승인된 국제법규는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 정부가 가입한 자유권규약 및 그 선택의 정서상 보장된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야 하고 자유권규약 제18조는 특별한 입법 조치 없이 우리 국민에 대하여 직접 적용되는 법률에 해당한다는 것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의 의견인 점 등을 종합하여 이 사건 법률상의 ‘정당한 사유’를 해석함에 있어서 규약 제18조가 일종의 특별법으로서 그 법원(法源), 즉 재판규범이 된다고 할 것이라고 전제하였다. 나아가 대상판결은 자유권규약위원회가 2006. 11. 3. 이후 5차례 채택한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제기한 4건의 사건에서 연속적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가 규약 제18조에 의하여 보호된다는 의견을 밝혀 왔는바, 국제인권규약에 대하여는 제정 당시 문헌에 구속되지 않고 시대정신에 맞게 이를 해석하여야 한다는 소위 ‘살아 있는 문서이론’을 고려하여 명문의 규정이 없다고 하여 기본권을 도출할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자유권규약위원회 자체의 규약에 관한 해석은 ‘상당한 설득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인정하여야 한다고 판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대상판결은 동 위원회의 제18조에 관한 해석이나 유럽인권재판소의 2011년 바야탄 사건의 판단에서 관련 인권규약에 명문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규정하지 않았어도 해석상 이를 권리로 인정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상 신의성실원칙에 따라 국내 사법부도 국제조약에 대한 이행의무가 있으므로, 결국 규약 제18조 규정과 동 위원회의 위 규정에 관한 해석이 헌법 제6조 제1항에 따라 이 사건 법률의 정당한 사유를 해석함에 고려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 사건 법률의 정당한 사유에는 양심적 병역거부가 포함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였다. 4. 평석 (1) 전통국제법의 한계 및 이에 따른 사법부 소극주의 국제인권법은 전통 국제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특히 1945년 2차 세계대전 후 도입되었다. 즉 전통 국제법은 전적으로 주권국가들의 행위만을 규율하고 다른 국가와 사이의 “양자적” 성격의 법률관계를 토대로 조약을 통하여 상호 권리, 의무를 주고받는 “상호적” 성격, 그 조약위반에 대한 집행도 해당 조약위반으로 피해를 본 상대 국가에게만 인정되는 “주관적” 성격이 특징이었다. 전통 국제법은 그 단점으로 국제법상 의무위반 집행을 각국 스스로 해결하여야 하기 때문에 약소국가는 강대국의 국제법상 위반에 제대로 집행을 할 수 없게 되고 다른 국가들에 의한 침략, 인권침해로 인하여 자국 내지 타국내의 인간이 수백만 명 단위로 전쟁으로 죽는 등 인간의 존엄성이 엄청난 규모와 심각한 정도로 훼손된 경우에도 조약을 맺지 않은 국가들은 이에 개입할 수 없기 때문에 국제적 차원에서 전통 국제법은 가치몰각적(價値沒却的) 국제법이 되고 말았다. 나아가 전통 국제법은 국가의 국제법상 권리, 의무를 해석하고 집행함에 있어서 조약 또는 국내법상 규정의 해석을 자구 그대로 존중하는 소위 실증법적 태도, 자구중심의 해석에 충실할 수밖에 없어 결국 사법부의 국제법의 국내적용 시 소극주의로 귀착되었다. (2) 국제인권법 제정 목적에 따른 국내법 적용· 해석원칙 - 사법부 적극주의 국제인권법은 전통 국제법에서 단지 객체 또는 대상에 불과했던 개인,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 혹은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정되고 보호되어야 하는 가치를 국제법 차원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고안되었기 때문에 국제인권법상 인권은 본질적으로 국가의 동의나 국가의 조약체결에 의하여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개념을 전제로 하였다. 나아가 국제인권법(조약)에 따른 국가의 인권보장의무는 전통 국제법상 체약국가의 다른 조약 가입국에 대한 양자적, 상호적, 주관적 성격이 아니고 국제공동체(국제연합 등)의 평화, 인권 등 공공질서 내지 기본가치를 공동체를 대신하여 수호하는 ‘객관적’, ‘통합적’ 성격을 지닌다고 본다. 위와 같은 국제인권법의 도입목적, 성격에 따라 국제인권법은 사법부가 국제인권법 또는 조약 조문상 인권내용이 불분명한 경우에도 그 인정을 위하여 관련 조약 내용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입장, 달리 말하면 탈실증법적 태도, 자구 중심의 해석에서 벗어나 보다 적극적으로 인권친화적 해석을 요청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사법부가 국제인권법을 국내법에 적용·해석하는 경우 적극적, 발전적 태도를 취할 것을 요청한다. 다만 현재 국제공동체의 발전단계 내지 모습이 국내공동체(국가) 또는 발전된 공동체(유럽연합)에 비해 미약하고, 특히 우리나라가 가입하고 있는 국제연합(유엔)차원의 국제공동체는 국제인권법을 창설할 당시부터 국제인권법에 따른 국가의 인권보장의무의 국내적 효력인정 여부에 관하여 즉시 국가에 대해 구속력이 있는 것으로 하지 않고 해당 권리의 보편적 인정 여부, 그 피해자의 숫자, 피해의 심각성 정도, 각 회원국의 국내 사정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해당 국가가 이를 점진적, 발전적으로 이행, 집행하는 재량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3) 대법원의 국제인권조약의 해석에 관한 문제점 대법원은 위와 같은 2004년, 2007년 판결에서 규약 제18조 조문에 명문으로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권리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를 국내법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계속 판시함으로써 자유권규약 등 국제인권규범의 국내적용·해석에 관하여 기본적으로 전통 국제법에 따른 실증법적 태도, 자구해석에 충실한 태도, 나아가 사법부 소극주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따라서 대법원은 국제인권법의 국내법 적용에 관한 해석원리, 즉 국내법상 권리처럼 명문 규정의 구체적 근거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관련 인권이 국제공동체에서 보편적으로 인정되는지 여부 등을 고려하여 적극적, 발전적으로 해석하여야 하는 원칙, 헌법 제6조의 국제법 존중주의 원칙을 간과 내지 위반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5. 결론 대상판결은 유럽인권재판소에서 널리 인용되고 있는 ‘살아있는 문서이론’을 원용하여 규약 제18조 조문에 명시되지 않았지만 위 규정에서 양심적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고 판시함으로써 국제인권법의 제정목적에 따라 요청되는 적극적, 발전적인 태도를 충실히 반영하였을 뿐만 아니라 인권규약이 조약법에 관한 비엔나협약상 신의성실의 원칙 등을 근거로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지고 이 사건 법률을 적용ㆍ해석함에 있어 일종의 특별법으로서 그 법원(法源), 재판규범이 된다고 판시함으로써 헌법 제6조 제1항의 국제법 존중주의 원칙을 제대로 존중하는 판결을 하였다. 특히 대상판결은 국제인권규약이 국내 사건에 구속력을 가질 수 있는 논거를 국내 법원 차원에서 최초로 설득력 있게 밝힌 획기적 판결로서 앞으로 대법원을 비롯한 사법부가 국제인권법을 국내법에 적용·해석하는 경우 선례로 자리 잡기를 소망해 본다.
양심적병역거부
국제인권법
병역
2016-12-05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 요건에 대한 고찰
Ⅰ. 서설 우리는 요즘 언론 매체를 통하여 성전환자를 쉽게 접하고 있고 이러한 사회현상은 성문화 내지 성별질서에 대한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는 아직까지 성전환에 대하여 아무런 법·제도적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과학문명 이기와 왜곡된 가치관의 결합으로 무분별한 성전환이 이루어져 성별질서의 혼란을 가져오고 성전환증 환자로서 최종적 치료개입 수단으로 성전환수술을 받은 자의 법적 지위가 불안정하여 심각한 인권침해가 초래되고 있다. 대법원은 근자에 해석론에 의한 법관의 법형성작용을 통하여 일정한 요건하에서 해부학적 성과 다른 반대의 성을 인정하고 가족관계등록부상의 성별정정을 허가함으로써 성전환자의 법적 지위를 인정하고 제도권으로 포섭시켜 왔다. 그런데 이번 대상판결은 기존의 입장과 달리 성전환자의 성별정정을 허가함에 있어서 성전환자가 현재 혼인 중에 있는 경우나 미성년인 자를 둔 경우를 각각 성별정정의 독자적 소극적 요소로 파악하고 있다. 그러나 대상판결의 소수 의견이 주장하는 것처럼 성별정정 허가를 결정함에 있어서 이러한 요소들을 소극적·절대적 기준으로 삼는 것은 성전환자의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가족공동체 형성의 자유 측면에서 볼 때, 법적 안정성 또는 자의 복리에 치우친 해석으로 문제가 있다 할 것이다. Ⅱ. 사실관계 학창시절부터 여성복을 즐겨 입고, 여성을 동성처럼 여기는 등 여성적 성향을 보이며 심한 성정체성 장애를 겪으면서 수차례 정신과 치료를 받아오다가 2006. 8. 8. 태국에서 성전환수술과 유방성형수술을 받아 여성의 외부 성기와 신체 외관을 갖추고 그 때부터 현재까지 여성 호르몬제를 투약해 온 성전환자가 가족관계등록부상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별 정정을 신청하였으나, 1심과 원심은 과거의 혼인경력 및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다는 이유로 정정 신청을 기각하였고 대법원은 과거의 혼인경력은 성전환자의 성별 정정의 독자적 소극적 요소가 되지 않으나, 미성년자인 자녀가 있다는 점은 이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원심의 결론을 유지하였다. Ⅲ. 대상판결의 요지 1. 구체적 요소 사람의 성을 결정함에 있어 과거 생물학적 요소뿐 아니라 성 귀속감, 성 역할 등의 정신적·사회적 요소들 역시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이다. 성장과정에서 생물학적 성에 대한 불일치감 및 위화감·혐오감을 갖고 반대의 성에 귀속감을 느끼면서 반대의 성 역할을 수행하며 성기를 포함한 신체 외관 역시 반대의 성으로 형성된 사람에 대해서는 일정한 경우 법률적인 성의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 이에 대한 구체적 요소들로 ①의학적으로 성전환증 진단을 받고 상당기간 정신과적 치료나 호르몬 치료 등을 받고도 위 증세가 치유되지 않고, ②반대의 성에 대한 정신적·사회적 적응이 이루어졌고, ③일반적 의학적 기준에 의하여 성전환수술을 받아 외부 성기를 비롯한 신체적 성징이 변경되었으며, ④전환된 성을 가진 사람으로서 만족감을 느끼고 공고한 성정체성의 인식 아래 그 성에 맞춘 의복, 두발 등의 외관을 하고 성관계 등 개인적 영역 및 직업 등 사회적 영역에서 모두 전환된 성 역할을 수행하고, ⑤주위 사람들로부터 그 성으로 인식되는 정도에 이르러 사회통념으로 볼 때 전환된 성을 갖추고 있다고 인정되고, ⑥다른 사람들과의 신분관계에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지 아니하는 등 사회규범적으로도 허용될 수 있는 경우이어야 한다. 2. 독자적 소극적 요소 가. 혼인 중에 있는 경우 헌법 제36조 제1항의 혼인제도는 무릇 남녀 간의 육체적·정신적 결합으로 성립하는 것으로서, 민법은 이성 간의 혼인만을 허용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현재 혼인 중에 있는 성전환자에 대하여 성별정정을 허용할 경우 법이 허용하지 않는 동성혼의 외관을 현출시켜 결과적으로 동성혼을 인정하는 셈이 되고 이는 상대방 배우자의 신분관계 등 법적·사회적 지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이 경우에는 가족관계등록부의 성별정정이 허용되지 아니한다. 나. 미성년자인 자가 있는 경우 민법 제909조 제1항, 제912조, 제913조에 의하여 부모는 미성년자인 자의 친권자가 되고 친권자는 자를 보호하고 교양할 권리의무가 있으며 친권을 행사함에 있어 자의 복리를 우선적으로 고려하여야 한다는 친권자와 미성년인 자 사이의 특별한 신분관계가 발생하고, 동성혼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현실 적응능력이 성숙되지 아니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미성년자인 자의 복리에 미치는 현저한 부정적 영향 등을 고려할 때 미성년자인 자의 복리를 위하여 친권자의 성별정정을 불허하는 것은 현재의 우리 사회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하여 이성과 혼인하고 자녀를 출생시켜 가족을 이룬 사람에게 요구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요청이다. Ⅳ. 성전환자 법적 지위 1. 개념 정리 성전환증 : 의학적으로 성전환증은 성정체성장애의 가장 심한 형태로 사춘기 이후에도 자신의 선천적 성에 대해 지속적으로 불편감과 부적절함을 느끼며 2년 이상 1차 및 2차적 성징(性徵)을 제거하고 반대 성징을 획득하려는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를 말한다. 국제보건기구(WHO)는 제10차 국제질환분류(ICD-10, 1994년)에서 성전환증을 성정체성장애(Gender Identity Disorder)의 하나로 분류하여 '자신의 해부학적 성에 대한 불편함이나 부적절감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신과 반대되는 성으로 살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 그리고 그가 선호하는 성의 신체에 가능한 일치되도록 호르몬 치료와 수술을 받고자 하는 욕구'라고 정의하면서, 성전환증으로 진단되려면 반대 성에 대한 귀속감정이 최소한 2년 이상 지속되고 다른 정신장애증상 또는 성 염색체 이상이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다. 대한의사협회는 성전환증(transsexualism)이란 해부학적인 성과 정신적 성에서 성적 주체성의 불일치를 주 증상으로 하는 성정체성장애라고 한다. 성전환자 : 트렌스젠더(transgender) 또는 트렌스섹슈얼(transsexual)이라고 불리는데 수술이나 다른 치료를 통해 자신의 성이 아닌 반대의 성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한다. 이에는 육체적으로 남성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여성의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Male to Female Transsexual(MTF)', 육체적으로는 여성이지만 남성의 성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Female to Male Transsexual(FTM)' 두 가지가 있다. 2. 외국의 입법례 비교법적으로 독일은 1980년 성전환자에 대하여 '특별한경우에서의이름변경및성확인에대한법률'을 제정하여 당사자가 신청할 경우 성별 재전환이 가능하고 신청인의 동의 없이 변경 이전의 이름을 개시하거나 조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네덜란드는 1985년부터 성전환을 법제화하고 성전환 수술시 의료보험 혜택을 받도록 하고 있으며, 미국 대부분의 주는 2002년부터 성전환자에게 수술 후의 성에 따른 법적 지위를 승인하고 있다. 영국은 2004년 '인지법'을 제정하여 성전환자의 현재의 성에 맞는 새로운 출생증명서 발급을 가능하게 하였다. 유엔인권이사회는 2011. 6. 16. 제17차 회의에서 '성적 지향 및 성정체성에 대한 결의안'을 통과시켜 각국의 성적 지향과 성정체성에 대한 차별적 법률과 관행 등을 조사, 공개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3. 우리의 현실 최근 우리 사회는 젠더(gender)의 문제, 양성 평등, 성적 소수자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성전환증의 원인 분석 및 성전환자에 대한 인권보장을 중심으로 활발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성전환에 대한 사회인식 역시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2002년 김홍신 의원이 '성전환자 성별변경에 관한 특례법안'을, 2006년 노회찬 의원이 '성전환자의성별변경및개명에관한특례법안'을 대표 발의하였으나 모두 회기만료로 자동폐기된 바 있다. 2005년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 수립을 위한 성적 소수자의 인권 기초현황조사가 이루어졌고 2007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성별변경의 비밀보장 및 성전환자의 기본적 권리를 보장하고 인권침해를 예방하기 위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권고안'을 마련하는 등 사회 각계 각층에서 법·제도적 정비를 위한 시도가 있었다. 그러나 성전환에 대한 입법적 불비로 말미암아 성전환자는 여전히 법·제도적 보호영역의 사각지대(死角地帶)에 놓여 있다. 이로 인하여 성전환 수술요건에 대하여 의학계마저도 통일적인 기준이 없고 법·제도적 성과 변경된 성 및 성 역할의 불일치는 여전히 사회 불안요소로 작용하고 있으며 법질서 경직성으로 사회적 소수자의 권익이 침해되는 결과가 초래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300 내지는 400명 정도가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며, 2009년 기준으로 4,500명 가량의 성전환증 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성별정정 허가는 2002년 7월부터 2003년 8월까지 21건이 허가 되었고, 2004년에는 10건, 2005년에는 17건에 불과하여 성전환의 현실과 법·제도적 갭(gap)은 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법원도 담당판사의 성향에 따라 허가율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성별정정을 위해 소위 '법정 쇼핑'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대법원은 2006. 6. 22. 2004스42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하여 성전환자의 성별정정 허가에 관한 일정한 기준을 제시한 바 있다. Ⅴ. 평석 1. 그동안 우리의 현실은 성 이분법적 사고에 입각하여 법·제도권 밖이라는 이유로 성전환에 관하여 아무런 해답도 주지 아니한 채 그를 자신의 성에 반대되는 성으로 구속시키고 비정상인으로 취급 하였다. 문화는 그 시대 구성원들이 함께 만들어 가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살아있는 유기체이다. 따라서 과거 문화의 잣대로 현재 문화를 구속하는 것은 항상 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물론 인류애, 사랑, 자유, 진리와 같은 불변의 가치들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가치의 핵'에 해당하는 부분을 제외한 그 외연(外延)과 관련된 법·질서·제도 등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여야 된다. 변화된 성문화에 속에서 관심과 애정으로 성전환자들을 바라보는 것은 양성 패러다임 문화에서 벗어나 차이(差異)를 가치있게 여기고 존중하는 다문화 사회의 성숙된 모습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수십년 동안 성적 소수자로서 사회의 음지에서 살아 온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 인간답게 살 권리 등을 보장하기 위한 '총체적 기획'을 제시하여야 할 때이다. 2. 지속적인 반대성의 귀속감이 형성되고 장기간의 심리적, 정신적 상담 및 호르몬 투여의 치료과정을 거쳐 전환된 성에 부합하는 성기 및 외관을 갖추고 사회적 성 역할을 수행하는 그들을 정상적인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전환된 성에 따른 법적 지위를 인정하는 것이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기본권 보장의 최고이념으로 삼는 헌법 제10조의 정신에 부합한다고 본다. 그런 관점에서 성전환자의 가족관계등록부의 성별 정정에 대한 사법부 변화는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고 이번 대상 판결 역시 같은 맥락에서 바라볼 수 있다. 그러나 성전환자가 혼인 중에 있거나 미성년자인 자를 둔 경우를 성별 정정의 독자적 소극적 요소로서 절대적 기준으로 파악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고 본다. 3. 성전환자에게 해부학적 성역할을 강요하기 보다는 그의 선택에 따라 성을 결정하고 그에 따른 가족공동체 형성의 자유를 인정해 줌으로써 가족공동체 생활을 통한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어야 한다. 성전환자에게 그 자녀가 성년에 이르는 오랜 기간동안 법·제도적으로 반대의 성 으로 살 것을 강요하는 것은 너무나 가혹할 뿐 아니라 변화된 성문화 속에서 미성년자인 자가 부모의 성전환 사실을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고 이미 부모의 전환된 성에 따라 자연스런 가족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점에서 미성년자인 자를 둔 경우를 성별정정의 독자적 소극적 요소로 포섭하는 것은 동의할 수 없다. 미성년자인 자가 부모의 성전환으로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받게 되는 상황이 우려되는 경우 법원이 성별정정 허가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하나의 중요한 고려요소로 삼으면 충분하다. 나아가 혼인 중에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별거를 하거나 이혼 소송 중에 있는 등 성별정정을 허용하더라도 배우자의 신분관계에 실질적인 변동을 초래할 우려가 크지 않은 경우를 얼마든지 상정할 수 있고 가족관계등록부상 동성혼의 외관이 현출되는 문제점은 제도적 보완을 통해 해결할 일이지 굳이 혼인 중에 있다는 것을 성별정정의 독자적 소극적 요소로 포섭하는 것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4. 결론적으로 성전환자에 대한 가족관계등록부상의 성별정정의 허부를 판단함에 있어서 혼인 중에 있거나 미성년자인 자를 두고 있다는 사실은 당해 법관의 법형성작용 과정에서 성전환에 대한 법적 승인으로 인한 성전환자의 이익과 배우자·자의 신분변동이나 자의 복리 사이의 구체적 형량의 문제로 파악하면 충분하고 이를 굳이 독자적 소극적 요소로 포섭하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2011-12-01
교사의 체벌과 정당행위
I. 사실관계와 경과 여자중학교 체육교사 겸 태권도 지도교사인 피고인은 자신이 체육교사로 근무하는 여중학교 운동장에서 피해여학생들이 “무질서하게 구보한다”는 이유로 손이나 주먹으로 두 차례 머리 부분을 때리고, 자신이 신고있는 슬리퍼로 피해여학생의 양손을 때렸으며, 같은 달 태권도대회출전과 관련해 질문하는 유모양 등 2명에서 낯선 학생들이 보는 가운데 “싸가지 없는 년”이라고 욕설해 폭행·모욕혐의로 기소됐다. 제1심과 항소심은 유죄를 인정하고 벌금 100만원을 선고했다. 피고인은 “자신의 행위가 교육목적상 정당한 징계행위이므로 정당행위”임을 주장하며 상고했다. 이에 대법원은 피고인이 행한 체벌이 정당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상고를 기각했다. II. 판결요지 대법원은 판결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초·중등교육법령에 따르면 교사는 학교장의 위임을 받아 교육상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에는 징계를 할 수 있고, 징계를 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밖의 방법으로 지도를 할 수 있는데, 그 지도에 있어서는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에만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방법인 이른바 체벌로 할 수 있고 그 외의 경우에는 훈육, 훈계의 방법만이 허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교사가 학생을 징계아닌 방법으로 지도하는 경우에도 징계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교육상의 필요가 있어야 될뿐만 아니라 특히 학생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가하는 체벌, 비하하는 말 등의 언행은 교육상 불가피한 때에만 허용되는 것이어서, 학생에 대한 폭행, 욕설에 해당되는 지도행위는 학생의 잘못된 언행을 교정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으며 다른 교육적 수단으로는 교정이 불가능했던 경우로서 그 방법과 정도에서 사회통념상 용인될 수 있을만한 객관적 타당성을 갖추었던 경우에만 법령에 의한 정당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III. 대상 판결의 의미 1. 초중등교육법시행령상 ‘지도’로서의 체벌의 법적 지위 확인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31조 제1항은 학교 내의 봉사, 사회봉사, 특별교육 이수, 퇴학처분 등 학생에 대한 ‘징계’를 제한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제7항은 ‘징계’ 외의 ‘지도’를 규정하고 있다. 제7항은 “학교의 장은… 지도를 하는 때에는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아니하는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행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 바, 그 ‘지도’는 원칙적으로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뤄져야 하지만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에는 예외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체벌’은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지도’의 일종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이전의 판례나 학설의 경우 ‘징계’와 ‘지도’를 혼동해 논의를 전개하고 있었던 바, 대상판결은 이 점을 바로 잡고 있다. 2. 학교장의 ‘위임’에 따른 교사의 체벌권의 인정 동 시행령 제31조 제7항은 학생에 대한 지도권은 학교장에게 있음을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육현실에서 통상 체벌은 학교장이 아니라 교사에 의해서 이뤄진다. 이전의 판례나 학설은 이러한 교사의 체벌이 어떻게 정당화되는가에 대해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대상판결은 초·중등교육법령에 따르면 교사는 “학교장의 위임을 받아” 체벌을 할 수 있다고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3. 체벌의 위법성 판단기준의 종합적 제시 한편 대상판결은 교사의 체벌이 형법 제20조의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는 종전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어떤 경우에 예외적 인정범위를 벗어나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는지보다 정리되고 구체화된 지침을 제시하였다. 대상판결은 이전 관련 판례와 같이 교육상 체벌의 필요성이 있었는지, 체벌이 최후수단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따져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대상판결은 교사의 체벌이 정당행위로 인정받을 수 없는 예로 ① 학생에게 체벌의 교육적 의미를 알리지도 않은 채 지도교사의 성격 또는 감정에서 비롯된 지도행위, ② 다른 사람이 없는 곳에서 지도할 수 있음에도 낯선 사람들이 있는 데서 공개적으로 체벌·모욕을 가하는 행위, ③ 학생의 신체나 정신건강에 위험한 물건 또는 교사가 신체를 이용해 부상의 위험성이 있는 부위를 때리는 행위, ④ 학생의 성별·연령·개인 사정에 따라 견디기 어려운 모욕감을 준 행위 등을 구체적으로 열거했다. VI. 비 판 필자는 원칙적으로 체벌은 그 교육적 효과가 의심스럽고, 교육목적달성을 위해 학생의 신체의 완전성을 침해하는 수단을 사용하는 것은 수단과 목적의 비례성 및 보충성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폭력에 의한 통제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학생의 자율과 책임감의 형성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강하게 금지돼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유엔아동권리위원회’는 1991년 ‘유엔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한 한국 정부에 대해 1996년과 2003년에 걸쳐 “모든 형태의 체벌을 명백하게 금지할 것”을 권고한 바 있으며, 2007년 12월 신설된 초·중등교육법 제18조의 4는 “학교의 설립자·경영자와 학교의 장은 「헌법」과 국제인권조약에 명시된 학생의 인권을 보장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필자는 이러한 관점에서 체벌의 법적 근거를 제공하고 있는 초·중등교육법과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을 해석하고자 한다. 1. ‘직접체벌’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대상판결이나 기존의 학설에서 모두 고민하지 않고 있는 점이 있다. 즉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31조 제7항의 ‘신체적 고통을 가하는 지도’에 도구나 신체를 사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직접적인 고통을 가하는 ‘직접체벌’과 도구나 신체를 사용하지 않고 학생에게 의무없는 일을 하게 함으로서 신체적 고통을 느끼게 하는 ‘간접체벌’-통상 ‘얼차려’로 불림-이 모두 포함되는가의 문제이다. 평석자는 대상판결에서 제시하는 여러 허용요건이 충족할 경우 ‘간접처벌’은 법령상 허용되는 정당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 장기적인 교육정책의 관점에서 볼때 ‘간접처벌’도 궁극적으로는 없어져야 하겠지만, 우리 교육현실에서 ‘간접체벌’도 금지한다면, 교사는 오히려 ‘직접체벌’로 바로 나아가 버릴 수 있으므로 ‘간접처벌’은 허용하는 것이 학생의 인권 보호와 교사의 학생규율 확보 사이에 균형점을 확보할 수 있다(물론 ‘간접체벌’도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않는 지도’를 선행하지 않고 바로 시행되었거나, 그 정도가 심하여 학생에게 심각한 고통이나 상해를 야기했거나 한다면 정당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직접체벌’은 달리 취급돼야 한다. ‘직접체벌’은 교사의 신체나 도구를 사용하여 학생의 신체에 직접 고통을 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학생이 받은 정신적 충격이나 인격적 모멸감이 ‘간접처벌’에 비해 매우 커진다. ‘직접체벌’에서는 학생의 반응에 따라 교사가 흥분할 가능성과 그에 따라 체벌이 과도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또한 ‘직접체벌’의 교육적 효과가 얼마나 있는지, ‘간접체벌’에 더하여 ‘직접체벌’을 반드시 가해야 할 교육적 필요성이 있는지도 의문스럽다. 이상의 점에서 볼 때 동 시행령이 전제하는 체벌에는 애초에 ‘직접체벌’을 포함하지 않고 ‘간접처벌’만 포함될 뿐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직접체벌’은 법령에 의해 정당한 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되지 않는다. 다만, 형법 제20조의 논리상 ‘직접체벌’도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행위로 정당화되는 경우를 상정할 수 있을 것이나, 이 때 매우 엄격한 기준이 적용돼야 한다. 특히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아니하는 지도’나 ‘간접체벌’이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러한 방법을 선행되지 않은 ‘직접처벌’은 ‘직접처벌’의 종류, 방식, 강도 및 결과 등을 따질 것도 없이 바로 위법하다고 봐야 한다. 2. 교사의 체벌자격은 인정돼야 하는가? 동 시행령 제31조 제7항은 ‘학교장’의 지도권을 규정하고 있는데, 대상판결은 교사는 “학교장의 위임을 받아” 체벌을 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있다. 동 조항은 지도를 행함에 있어서 “교육상 불가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학생에게 신체적 고통을 가하지 아니하는 훈육·훈계 등의 방법으로 행해야 한다”고 하고 있는 바, 이는 학교장에게 적극적으로 ‘체벌권’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체벌이라는 ‘지도’는 매우 예외적으로 이뤄져야 함을 강조하는 취지로 읽혀야 한다. 그렇다면 이 조항의 취지는 과거 통상 교사들에 의해서 행해지던 체벌을 학교장이라는 비교적 객관적인 주체에게 제한적으로 허용하여 체벌의 오·남용을 막겠다는 것으로 해석돼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사가 체벌을 해야할 상황이면 바로 자신이 직접해서는 안 되며, 교사는 학교장에게 학생의 문제점과 체벌의 필요성을 보고하고, 학교장은 교사와 학생의 의견을 청취한 후 학교장이 체벌을 해야 한다는 것은 동 조항의 취지에 부합하는 해석이다. 이 점에서 원칙적으로 교사는 법적인 체벌자격이 없고 학교장만이 법적인 체벌자격을 가지며, 이 체벌자격은 교사에게 위임될 수 없다고 본다. 이러한 해석은 체벌을 행하는 순간 발생하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감정적 대립과 긴장, 이로 인한 과도한 체벌 초래라는 위험을 방지할 수 있으므로 교육정책적 차원에서도 타당하다. 다만 교사가 학교장에게 보고하지 않고 자신의 판단에 따라 적정한 정도의 ‘간접처벌’을 행하였다면, 예외적으로 사회상규에 반하지 않는 행위로 위법성이 조각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학교장의 체벌자격이 교사에게 위임된다는 논리는 위헌의 문제가 있다. 판례의 논리대로 동 시행령 제31조 제7항이 학교장에게 체벌권을 부여하는 적극적인 근거 규정이 된다면, 이는 학생의 신체의 자유의 침해를 수반하게 된다. 그렇다면 법률에 의하여 이뤄져야 할 신체의 자유 제한을 포괄적으로 시행령에 위임한 것이기에 위헌이 된다. 사실 현행 교육관련법에서는 체벌에 대한 적극적인 허용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도 동 시행령 제31조 제7항은 제한원리 내지 예외조항으로서 보는 편이 합헌적인 해석이다.
2008-01-24
외국중재판정의 집행과 중재약정의 실효
[사건의 경과] 원고회사는 1988.10.5. 위 피고회사와의 1978.11.8.자 노우하우 실시계약에 따라 국제상업회의소 국제중재법원에 사건번호 6363/BGD로 중재신청을 하면서, 위 중재절차에서 원고는 자신이 피고회사와의 사이에 위 노우하우 실시계약에 따라 보유한 권리는 소외 사우디회사에게 유효하게 양도되지 아니하였고, 가사 양도되었다면 소외 사우디회사를 대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피고는 위 노우하우 실시계약상의 모든 권리, 의무는 소외 사우디회사에게 유효하게 양도되었으므로 원고회사에게는 이 중재절차의 당사자 적격이 없을 뿐 아니라 소외 사우디회사가 사우디국의 위 분쟁해결위원회에 제소함으로써 중재합의조항 자체도 실효되었으며, 또 소외 사우디 회사는 사우디국에서의 위 위원회절차에서 패소하여 피고회사가 승소하였으므로 원고의 이사건 중재청구는 기판력에도 저촉된다고 주장하였다. 위 국제상업회의소 중재의 중재판정부는 피고의 항변을 배척하고 1991.3.19. 피고에게 원고에게 추가실시료에 해당하는 금원과 지연이자를 지급하라는 중재판정을 선고하였고, 이에 원고회사는 대한민국에서 위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을 구하기 위해서 이 사건 소를 제기하였다. 1심법원인 서울민사지방법원은 원고회사의 위 중재판정에 관한 승인 및 집행 청구를 인용하였고, 이에 피고회사가 항소하였으나 2심법원인 서울고등법원도 항소를 기각하고 원고의 청구를 인용하였으며, 이러한 원심의 판결은 이 사건 대법원판결에서도 유지되었다. [대법원 판결요지] 중재합의의 원시적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중재합의와 합체되어 있는 본안계약이 제3자에게 포괄적으로 이전되어 결국 당사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거나 원·피고 사이의 중재약정이 실효되었다고 주장되고 있는 경우에는, 중재약정의 실효여부의 판단은 본안에 관한 판단과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본안에 대한 판단에 준하여 그 자체가 중재인(중재판정부)의 판단에 따를 사항인데, 이 문제에 관하여 중재판정부는 다수의견으로 위 채권양도 유효여부를 판단할 준거법은 양도행위와 가장 관련이 많은 사우디법이 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사우디국의 분쟁해결위원회 및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입장을 기초로 사우디법 아래에서는 위 양도는 유효하지 아니하다고 판단하였는 바, 그 준거법의 결정 및 사우디법하에서의 이 사건 사실관계에 대한 법적 평가 등이 명확하지 아니한 이 사건에 있어서 중재판정부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도덕과 정의관념에 반한다고 인정되지 아니하는 한 중재판정부의 판정내용은 존중되어야 하고, 집행국의 법원이 그 본안에 관하여 다시 심사할 수 없다. [판례평석] I. 서설 외국에서 내려진 중재판정은 우리나라가 1973.2.8.에 가입한 ‘외국중재판정의승인및집행에관한유엔협약 (The United Nations Convention on the Recognition and Enforcement of Foreign Arbitral Awards, 통상 뉴욕협약이라고 불린다)’에 의하여 국내에서의 승인 및 집행이 보장된다. 즉, 뉴욕협약 제5조에서 열거된 제한적인 집행거부사유에 해당하지 않는 한, 중재판정의 집행을 구하는 당사자는 중재판정의 원본 혹은 정본과 중재합의의 원본 혹은 정본을 제출함으로써 그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II. 대상판결의 쟁점에 관한 판단과 분석 - 중재약정의 실효 이 사건에서 피고는 원고회사가 소외 사우디회사에게 이 사건 중재계약이 포함되어 있는 노우하우실시계약을 양도한 바 있고, 원고회사가 소외 사우디회사 명의로 피고회사를 상대로 사우디국 담만 소재 상사분쟁해결위원회에 분쟁해결을 신청함으로써 위 노우하우실시계약에 의한 중재약정을 스스로 포기한 셈이니 원·피고간의 위 노우하우실시계약상의 중재합의는 결국 실효되었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러한 피고의 주장에 대하여 대법원은 원심판결의 이유를 그대로 인용하면서 피고의 주장을 배척한 원심의 판단이 정당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대법원이 인용하고 있는 원심판결의 내용은 아래와 정리해 볼 수 있다. (1) [피고가] 중재합의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과 같이 중재합의와 합체되어 있는 본안계약이 제3자에게 포괄적으로 이전되어 결국 당사자의 지위를 상실하였다거나 원·피고 사이에 중재약정이 실효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경우에는, 그 중재약정의 실효여부의 판단은 본안에 관한 판단과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본안에 관한 판단에 준하여 그 자체가 중재인(중재판정부)의 판단에 따를 사항이다. (2) 이 문제에 관하여 중재판정부는 다수의견으로 위 채권양도의 유효여부를 판단할 준거법은 양도행위와 가장 관련이 많은 사우디법이 될 것이라고 전제하고, 사우디국의 분쟁해결위원회 및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입장을 기초로 사우디법 아래에서는 위 양도는 유효하지 아니하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준거법의 결정 및 사우디법하에서의 이 사건 사실관계에 관한 법적 평가가 명확하지 아니한 이 사건에 있어서, 중재판정부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나라의 기본적인 도덕과 정의관념에 반한다고 인정되지 아니하는 한 중재판정부의 판정내용은 존중되어야 하고 집행국의 법원이 그 본안에 관하여 다시 심사할 수 없다. 또한, 대법원 판결에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원심의 판결이유를 보면, 위와같이 해석하는 근거로서 “뉴욕협약 제5조 제1항 (a)는 중재합의가 무효(not vaild)인 경우만을 승인 및 집행의 거부사유로 규정하여 중재계약이 실효(inoperative)된 경우에는 승인 및 집행을 요구받은 법원이 심사할 수 있는 그 승인 및 집행의 거부사유에서 제외”하고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무효(null and void 또는 not valid)라 함은 중재계약상 처음부터 계약의 성립에 무효원인이 있는 경우를 의미하고, 실효라고 함은 중재계약의 효력이 일정한 사유로 사후에 상실되는 경우를 의미한다”고 판시하면서 “따라서, 위와같이 중재합의가 후발적으로 실효되었다는 것은 뉴욕협약 제5조가 제한적으로 열거하고 있는 집행거부사유의 어디에도 해당하지 아니한다”라고 판시하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위와같은 대법원 판결과 대법원 판결이 정당한 것으로 수긍한 원심판결은 아래에서 설명하는 바와 같이 뉴욕협약 제5조 제1항의 법리를 완전히 오해하고 있는 잘못된 판결이라고 생각된다. 첫째, 대법원 판결은 유효한 중재계약이 없다는 피고의 주장을 무효와 실효를 구분하면서 실효는 뉴욕협약 제5조 제1항 (a)호의 중재판정 승인 및 집행거절의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있는데, 필자의 판단으로는 이는 매우 잘못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무효와 실효의 대법원과 원심의 판결처럼 뉴욕협약 제5조 제1항 (a)호를 해석함에 있어 이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하여 다룰 수 있는 것인지는 대단히 의문스럽다. 원칙적으로 국내중재와 국제중재를 불문하고, 당사자간에 유효한 중재약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중재약정에 기초하여 내려진 중재판정은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뉴욕협약 제5조 제1항의 취지도 당사자간에 유효한 중재계약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경우 집행국가의 법원이 외국에서 내려진 중재판정의 승인이나 집행을 거절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재약정이 처음부터 무효이거나, 나중에 효력이 없어졌거나, 중재약정이 부존재하거나 어떠한 경우이든, 당사자간의 중재약정이 그 규정된대로의 효력을 인정받을 수 없는 상황이 인정된다면, 당사자간에는 유효한 중재약정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고 그런 경우 집행국가의 법원은 뉴욕협약 제5조 제1항 (a)호에 따라 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을 거절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대법원 판결은 중재약정의 실효여부에 관한 판단이 본안에 관한 판단과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으므로 본안에 관한 판단을 할 권한을 가진 중재판정부가 내린 판단을, 공서양속에 반하지 않은 한 받아들여야 한다는 취지로 판단하고 있는데, 이는 중재계약의 독립성(separability) 내지 독자성(autonomy)에 반하는 판단일 뿐 아니라 유효한 중재계약의 존재여부를 판단하여야 할 법원이 스스로 그 권한과 의무를 방기하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중재계약 혹은 중재약정은 그것이 다른 계약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별도의 계약으로서의 독립성 내지 독자성이 인정된다. 즉, 중재계약이 포함된 전체계약이 효력을 무효가 되거나 효력을 상실하는 경우에도 중재계약은 별도의 계약으로서 별도로 그 효력여부가 판단되어야 한다. 따라서, 중재계약이 실시계약에 포함되어 있다고 해서 중재계약의 유효성여부의 판단이 실시계약의 효력에 판단과 불가분적으로 결부되어 있다는 법원의 판단은 이러한 중재계약의 독립성과 독자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대법원 판결은 중재계약의 유효성을 따지는데 있어 준거법의 결정이나 준거법으로 적용된 사우디법의 해석에 있어서도 중재판정부의 판단을 별도의 검토없이 따라가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법원으로서는 의당 중재계약의 유효성을 판단하기 위한 준거법을 정하고 그 준거법의 적용에 있어서도 독자적인 조사를 하였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중재계약은 그것이 전체계약의 일부로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독립성과 독자성이 인정되어 별도의 계약으로 취급되는 것이고 그 준거법 또한 전체계약의 준거법에 관한 판단과 별도로 결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이 사건에 있어서도 중재계약의 준거법은 법원이 따로 심리하여 결정하였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특히, 이 사건 원고와 피고간의 실시계약의 준거법은 계약상 네덜란드 안틸레스의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데 중재계약의 준거법을 판단함에 있어서도 우선적으로 당사자가 전체계약의 준거법으로 정한 네덜란드 안틸레스의 법이 고려되었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사건에서 법원은 이 사건 노우하우실시계약이 소외 사우디회사에게 양도되었는지 여부에 관하여 중재판정부가 다수의견으로(이는 소수의견은 이에 반대하였다는 의미로 중재판정부내에서도 이견이 존재하였다는 의미이다) 채권양도계약에 적용될 준거법이 사우디법이라고 판단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는데 이 부분 판단도 이해하기 힘들다. 이 사건에서 피고가 주장하는 바는, 원고가 이 사건 중재계약을 제3자에게 양도하였으니 더 이상 계약당사자로서의 지위에 있지 아니하다는 점과 원고가 스스로(소외 사우디회사의 명의로) 이 사건 중재계약에서 정한 ICC와는 다른 중재기관에 중재신청을 한 바 있으니 더 이상 이 중재계약이 유효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중재계약이 유효하게 양도되었는지 여부는 채권양도에 관한 준거법에 따라 판단할 사항일지 몰라도 스스로 다른 중재기관에 중재를 제기함으로써 중재약정이 실효되었다는 주장은 중재계약의 준거법에 따라 판단할 사항이라고 할 것이다. III. 결 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 사건 대법원 판결은 국제중재판정의 승인과 집행에 관련된 여러가지 의미있는 쟁점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결론의 타당성을 별론하고 하고 판결이유에 설시된 이론적 근거나 분석에 있어 여러 가지 아쉬움을 남기고 있다. 이 사건 판결이 국제중재가 그리 활성화되지 아니한 시기에 내려진 판결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뉴욕협약의 핵심조항의 해석에 있어 부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부정확한 해석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국제중재판정의 승인 및 집행을 다루는 법원으로서는 이 판결을 참고하는데 있어 신중한 검토와 주의가 요구된다고 할 것이다.
2006-09-25
이른바 선택적 중재조항의 효력
1. 대상판결의 의미 대상판결은 이른바 선택적 중재조항에 관하여 대법원 2003. 8. 22. 선고 2003다 318 판결에 이은 두 번째의 대법원 판결인데 종전 판결이유를 그대로 되풀이하면서 결론에서도 상대방의 이의가 없을 때에 한하여 중재합의의 효력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종전 대법원판결은 대상판결과는 그 중재조항의 유형이 서로 다른데도 그 차이를 간과하고 단순하게 같은 이유와 결론을 되풀이 한 잘못이 있다. 즉 앞서 2003다 318 판결은 그 선택적 중재조항의 내용이 계약일반조건에 편입된 계약특수조건에 규정된 ‘판결 또는 중재(adjudication/arbitration)’이고, 이에 반하여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은 조정 또는 중재, 조정불복시 소송으로 위 유형과는 그 규정형식이 다르고, 이에 따라 그 해석도 달라져야 하는데도 이를 간과한 것이다. 참고로 종래 대부분의 하급심판결이 유효로 판단한 경우는 바로 이 사건과 같은 유형의 선택적 중재조항이다. 2.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의 해석 가. 규정의 형식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은 기본적으로는 법원의 소송절차를 배제하고 조정 또는 중재라는 비송적 해결수단 중 하나를 선택하여 그 분쟁을 해결하도록 한 것이라는 점에서 그 특색이 있다. 이는 아예 처음부터 법원의 판결을 배제하지 아니하고 그것도 분쟁해결의 한 수단으로 열거하면서 중재와 병렬적으로 분쟁해결수단으로 정한 ‘판결 또는 중재’라는 형식의 선택적 중재조항과는 근본적으로 그 성격이 다르다. ‘법원의 판결 또는 중재법에 의한 중재에 의하여 해결한다’라는 조항은 문언상 일응 분쟁해결절차로서 중재와 판결을 병렬적으로 예시하여 그 의사에는 법원의 판결절차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석할 최소한의 여지가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사건 중재조항처럼 1차적으로 조정 또는 중재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하기로 한 경우에는 조정이 아닌 중재를 선택하였으면 이에 따라 중재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하기로 하는 당사자의 의사에 명백히 합치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건 중재조항은 앞서 2003다 318 판결의 중재조항과 동일하게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 나. 종전의 공사계약일반조건과의 비교 이 사건 중재조항과 같은 내용으로 개정되기 전의 공사계약일반조건에서는 분쟁해결의 수단으로 조정 또는 중재를 열거하면서 그 중 하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임의적인 것이어서 조정 혹은 중재에 의한 분쟁해결이 활성화되지 아니하자 이를 조정 혹은 중재에 「의한다」고 변경하여 강제·의무화 한 것이다. 즉 당사자들은 그 전과는 달리 조정 또는 중재를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둘 중 하나를 반드시 해야 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을 무효로 해석하는 것은 위와 같은 이 사건 중재조항이 도입되게 된 경위나 전후 사정, 취지 등에 비추어 볼 때 불합리하고 이 사건 중재조항의 문언적·논리적 해석에도 반하는 것이다. 다. 사적자치의 원칙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은 최소한 법원의 판결절차는 일단 배제하고 조정 또는 중재에 의하여 분쟁을 해결한다는 데 있어서는 당사자간에 의사의 합치가 이미 이루어진 것이고, 사적자치의 원칙상 제 1차적 분쟁해결수단으로 판결보다 간편한 조정 또는 중재를 우선하여 선택하고자 하는 당사자의 의도가 명백히 표현된 조항이므로 이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3. 중재합의의 조건부 또는 제한적 해석의 부당성 대상판결은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은 일방당사자가 상대방에 대하여 조정이 아닌 중재절차를 선택하여 그 절차에 따라 분쟁을 요구하고 이에 대하여 상대방이 별다른 이의없이 중재절차에 임하였을 때 비로소 중재계약으로서의 효력이 있다고 설시하고 있으나, 일방당사자가 분쟁해결수단으로 일단 중재를 선택한 이상 특별히 부당한 결과가 되는 경우이외에는(예를 들어 관할에 관한 일반거래약관의 효력을 부정한 대법원판례와 같은 경우) 상대방은 당초의 중재합의에 따라 이에 응하여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고, 다른 분쟁해결수단을 내세워 새삼 중재합의의 부존재를 이유로 이에 반대할 수 없으며, 그러한 주장은 법률상 아무런 이유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반대로 일방 당사자가 중재가 아닌 소송을 선택하여 법원에 제소한 경우에 상대방이 (선택적) 중재합의를 이유로 이에 반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와 달리 해석할 수 없는 논리인 것이다. 이른바 선택적 중재합의가 제대로 성립되어 유효하다면 그 다음은 선택에 따른 문제만 남을 뿐이고, 새삼 그 후의 다른 사정에 의해 유·무효가 번복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민사실체법상 선택채권의 특정이나 소송상 소의 청구에 있어서 선택적 청구와 같이 당사자가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이고, 다만 선택권이 일방적 선택권이냐 쌍방적 선택권이냐의 차이에 따른 선택권자의 구분이 있을 뿐이다. 요컨대 선택적 중재합의에 있어서 선택의 문제와 중재합의의 존부자체와는 엄격히 구별하여야 할 것이다. 일부 부정론자들이 지적하는 쌍방적 선택권에 있어서 소송이냐 중재냐 하는 쌍방간 선후에 따른 부당한 결과나 혼란은 이러한 중재합의의 존재자체를 소급하여 그 효력을 부정할 근거가 될 수는 없다 하겠다. 이 점에 관하여는 중재합의를 민사소송법상 관할합의와 법적 성격을 같이 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선택적 중재합의는 부가적 관할합의와, 전속적 중재합의는 배타적 관할합의와 각각 유사한 것으로 주장하는 논지도 있는 바, 평석자의 견해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 4. 중재와 법원사이의 상호관계(엄격해석주의의 완화) 현행 중재법 제 6조는 “법원은 이 법 (중재법)이 정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 (중재법)에 관한 사항에 관여할 수 없다”고 정하고 있는데 이 규정은 단순한 선언적 규정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수세기 간의 중재법의 발전 역사에서 보여준 중재와 법원의 관계를 설정해주는 중요한 규정이다. 또한 중재법 제 7조는 법원이 중재에 관해 어떤 사안에 대해 개입할 수 있는 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들 규정들은 법원이 중재에 대해 감독자 내지 통제자의 입장이 아니라 중재 역시 분쟁해결을 통해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동반자의 관계로 인정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유엔무역법위원회(UNCITRAL)의 모델중재법 (1985)이 법원과 중재간의 관계에 대한 현대 중재법의 중요한 요소를 포함한 국제적 기준의 중재법체계를 제시하였고, 우리나라 현행 중재법은 이 모델중재법의 규정을 수용하였으므로 중재법 제 7조와 제 8조는 이러한 연혁적 배경을 염두해 두고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따라서 중재합의의 유효성 여부 판단에 당사자가 장래 또는 현재의 분쟁을 중재를 통하여 해결할 의사가 있었는지를 판단하면 충분하지 당사자가 법원에서 소송을 제기할 권리를 포기하였는지 여부를 포함시켜 판단하는 것은 해당 법 조문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즉 법원은 당사자간에 중재합의가 있었는지 또는 유효한 중재합의를 하였는지 여부를 단지 제 3조 제 2호의 정의에 따라 “일정한 법률관계에 관하여 당사자간에 발생하였거나 장래 발생할 수 있는 분쟁을 중재에 의하여 해결하려는” 의도를 분석하는 것에 그쳐야 할 것이다. 중재라는 심판절차는 법원이 해결하기 어려운 사인간의 사법적 분쟁을 당사자가 선정한 중재인에 의한 중재절차에 의하여 해결한다는 점, 소송절차가 가지고 있지 아니한 비공개성, 전문성, 탄력성, 중립성에서 국가의 소송절차를 보완하는 동반자관계에 있다는 점을 법원은 인식하고 판단의 잣대로 병행하여야 한다. 아울러 중재절차는 판단주체 선정의 자치성(autonomy), 국제분쟁에 있어서 중립성(neutrality), 국제분쟁의 승인과 집행의 용이성 등의 장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 내에 발생하는 많은 분쟁을 국가의 재판제도 만으로 소화하기 어려운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법원은 중재절차와의 관계에 있어서 단순히 과거의 연혁적 이유에 얽매어 상호 배타적 관계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법원은 국가적 차원에서 사법상의 법률관계와 관련된 분쟁해결을 중재절차에서 아웃소싱(outsourcing) 받아 기술적, 전문적 분야의 분쟁을 처리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판과 중재는 상호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 의존하고 상호 보완적인 동반적 관계로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현행법 하에서 법원은 중재합의의 유효성 여부에 대한 판단을 할 경우에는 위와 같은 중재절차의 동반자적 관계의 정신을 염두에 두고 중재제도의 활성화를 위한 국제적 경향에도 관심을 갖고 중재합의에 대해 보다 관대하게 해석하여야 한다. 5. 외국법원의 판례 외국법원의 판례는 대체로 소송과 중재를 동시에 규정한 선택적 중재합의를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고 있다. UNCITRAL 모범법을 채택한 캐나다, 홍콩은 물론 독일, 미국에서도 이를 인정하고 있다. 미국연방법원은 당사자가 중재합의의 범위에 대하여 명백히 범위를 축소하지 않는 한 당사자의 의도를 넓게 해석하여야 한다는 입장이 지배적이다. 이를 모세스 콘 추정의 법칙(Moses Cone Presumption)이라고도 부른다. 즉, 중재합의조항에서의 중재대상의 범위에 관하여 의문이 발생하면 중재를 선호하는 방향으로 해석한다는 것이며 이 원칙은 수많은 연방사건 판결문에서 광범위하게 인용되고 있다. 대법원은 이와 같은 외국판례 및 선택적 중재합의의 해석의 기본원칙 등을 토대로 중재합의의 해석 및 범위 확정에 있어 중재조항 문구에 매달려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중재의 대상 및 범위에 관하여 의심이 나면 중재합의에 포함되는 방향으로 해석하여야 한다는 이른바 모세스 콘 추정의 법칙을 인식하여야 할 것이다. 6. 기타 가. 그밖에 상고이유에서 주장된 바와 같이 거꾸로 국가가 국가 발주 공사를 낙찰한 기업들에게 전속적 중재합의만을 규정할 경우, 이는 국가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하여 분쟁해결수단으로 중재만을 강요한 것으로 인정되어 헌법상 보장된 재판청구권 박탈 및 약관의규제에관한법률 제 14조(소제기 금지 등)의 위반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이를 피하기 위하여 국가 발주의 공사도급계약에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공사계약 일반조건에 이러한 선택적 중재조항을 넣게 된 것인 바, 이러한 선택적 중재조항은 국가와 사인간의 분쟁해결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한 특별조항이고, 더우기 위와 같은 사정에 따라 국가에 의하여 공사계약일반조건 제 50조로 들어가게 된 것인데, 이제 스스로 그 선택적 중재합의가 무효라고 주장함은 금반언의 원칙, 신의성실의 원칙에도 반하는 것이다. 나.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이 편입되어 있는 공사계약일반조건은 국가가 피고등 건설업체와 정부관급건설공사계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정형화된 양식으로 미리 마련한 계약의 내용으로서, 이는 약관의규제에관한법률 제 2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약관에 해당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 바, 동 법률 제 5조 약관의 해석규정에 따라 약관은 신의성실의 원칙에 따라 공정하게 해석되어야 하고, 약관의 뜻이 명백하지 아니한 경우에는 고객에게 유리하게 해석되어야 하므로, 이 사건 중재조항에서 조정 또는 중재의 선택권은 고객인 피고들에게 부여된 것이라고 해석하여야 하며, 일단 고객인 피고들이 중재를 선택한 이상 그 선택적 중재조항이 무효라는 국가의 주장은 위 법률 제 5조에도 위반하여 타당성이 없다 하겠다. 약관의 작성자인 국가는 중재절차가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하여 이제와서 그 약관이 무효라고 주장할 수는 없는 것이고, 또한 약관의 해석에 있어서 불명확한 부분에 따른 불이익도 감수하여야 할 것이다. 7. 결어 대상판결은 이 사건 선택적 중재조항의 규정형식에 따른 차이를 간과하고 이와는 경우가 다른 종전 대법원 판결의 논지를 맹목적으로 되풀이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러한 중재조항이 임의규정에서 강제의무규정으로 변경되었고, 국가가 이를 공사계약일반조건에 두게 된 경위, 이에 따른 신의칙위반이나 약관해석상 무효주장에 따른 판단을 그르쳤고, 나아가 종전 대법원 판결과 같이 사적자치의 원칙에 따른 중재합의의 존부자체를 선택의 문제와 혼동하였으며, 재판에 대비하여 중재제도 자체의 자치성, 비공개성, 전문성, 국제적 중립성등 기능에 관하여 그 연혁적 배경에 따른 동반자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크게 못미친다 하겠다.
2005-06-13
支出費用의 賠償과 債權者의 損害輕減義務
[사실관계] 원고(건설회사)는 피고(사찰)가 1988년5월17일 소외인 A에게 사건 토지를 임대보증금 3,000만원, 임대기간 19년으로 정하여 임대하여 A가 위 토지를 사용하고 있는 사실을 알면서도, 피고 사찰 주변이 국민관광단지로 지정되자 그 일대에 스포츠타운 및 오피스텔을 건축하고자 피고에게 요청하여 사건 토지를 임대하게 되었다. 피고는 선행 임차인인 A를 상대로 사건 토지의 인도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1992년6월25일 패소한 후 원고는 그와 같은 사실을 알면서도 1992년12월10일경 당초 의도했던 대로 사건 토지 위에 스포츠타운 등을 건축하기 위한 공사에 착수하여 대지조성 및 지하굴토작업을 상당부분 진행하였다. 그런데 피고는 1992년11월9일 A에게 사건 토지를 3억5,000만원에 매도하였고 결국 1994년10월18일 A명의로 소유권이전등기를 경료하여 주었다. 원고는 A 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가 경료된 이후 이를 알면서도 스포츠타운 등의 공사를 계속하다가 A로부터 토지인도 및 시설물 철거를 요구받게 되어 결국 1995년4월25일경 공사를 중단하였다. 이에 원고는 피고에게 임대차계약의 존속을 믿고 임차대지상에 스포츠타운 등 시설공사를 위하여 지출한 공사비용 전액에 대하여 배상책임을 묻는다. 원심은 원고의 청구를 인정하였다. [대법원의 판단] 1. 손해배상의 범위에 대하여: 원고가 피고의 채무불이행으로 입게 된 손해는 이 사건 임대차계약의 존속을 믿고 임차대지상에 스포츠타운 등 시설공사를 위하여 지출한 공사비용 상당액이다. 2. 과실상계에 대하여 : 원고는 피고로부터 이 사건 토지를 임차하더라도 이행불능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충분히 예견하고 있었음에도 손해가 발생되지 않거나 발생되더라도 최소한에 그치도록 필요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스포츠타운 등 공사를 위한 비용을 지출하였다고 할 것이므로, 원고에게도 피고의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의 발생 내지 확대에 관하여 과실이 있다고 할 것이고, 이와 같은 과실이 인정되는 이상 법원으로서는 직권으로 손해배상의 책임 및 범위를 정함에 있어서 이를 참작하여야 한다. [評釋] I. 債務不履行의 可能性과 信賴投資의 賠償문제 사안에서 원고는 피고의 계약이행 즉 임대차의 목적토지를 지장없이 사용·수익케 할 것으로 믿고 계약의 진행중에 목적토지에 대해 비용을 투자하였다. 이러한 투자비용 이른바 ‘신뢰투자’는 손해배상의 범위에 들어가는가가 문제된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채무불이행을 이유로 계약해제와 아울러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경우에 그 계약이행으로 인하여 채권자가 얻을 이익 즉 이행이익의 배상을 구하는 것이 원칙이지만, 그에 갈음하여 그 계약이 이행되리라고 믿고 채권자가 지출한 비용 즉 신뢰이익의 배상을 구할 수도 있다’(大判 2002년6월11일, 2002다2539)며 이를 인정하고 있다. 그런데 아직 진행중인 계약관계에서 채무불이행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도 채권자의 신뢰투자는 보호되는가? 참고로 개정독일민법은 채무자의 이행을 신뢰하여 지출한 채권자의 지출비용의 배상을 인정하는 규정(동법 제284조)을 신설하였는데 요건으로 비용지출의 ‘정당성’(Billigkeit)을 요구하고 있다. 정당성이 인정되는 기준은 채권자가 비용지출시 채무자가 급부를 이행하리라는데 대해 의심을 할 만한 사정이 있었는가이다. 예컨대 채무자의 이행의 곤란성이 예견된다거나 계약의 유효성이 다투어지고 있다거나 하는 경우에는 채권자에게 문제들이 해결될때까지 비용의 지출을 중단할 것이 요구된다고 한다. 대상판결에서는 ‘이행불능이 될 가능성을 충분히 예견할 수 있었음에도’라고 표현하여 이행불능의 가능성을 예견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채권자의 지출은 배상범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 경우 채권자의 지출에는 정당성이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이 사안에서 도출해낼 수 있는 법리는 채권자가 채무자의 이행을 신뢰하여 지출한 신뢰투자에 대하여는 비용의 지출시에 채권자가 채무불이행이 일어날 가능성을 알지 못한 경우에 한하여 배상범위에 들어간다는 것이다. 이것은 종래 판례가 해온 채권자의 지출이 ‘통상적인 지출비용의 범위내에 속하는가’ 라는 지출비용의 통상성의 판단에 있어 하나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II. 債權者의 損害輕減義務의 법리 사안에서 대법원은 원고를 ‘손해가 발생되지 않거나 발생되더라도 최소한에 그치도록 필요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않은 상태에서’ 비용을 지출했으며 이는 원고에게도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의 발생 내지 확대에 관하여 과실이 있다고 비난하고 이를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하는데 마땅히 참작하여야 할 것이라고 설시하고 있다. 여기에서 채권자는 일반적으로 채무자의 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를 회피하거나 경감할 조치를 취할 의무를 지는가가 이론적으로 문제될 수 있다. 비교법적으로도 이러한 채권자의 손해경감의무는 영미법에서는 이른바 손해경감(mitigation)의 법리로 발전하였으며 유엔매매법(제77조)이나 최근의 유럽계약법(Art. 9:505)등에서 규정되어 있고 독일민법도 채권자의 손해경감의무(Schadensminderungspflicht)를 정하고 있다(동법 제254조 제2항). 이미 우리 판례도 다양한 유형에서 채권자에게 채무자의 불이행으로 인한 손해의 확대를 방지할 의무를 채권자에게 부과하고 있으며 이를 다하지 못한 경우 채무자의 손해배상의 범위를 제한하고 있다. 예컨대 매도인이나 수급인이 하자있는 물건이나 완성물을 인도한 경우에 매수인이나 도급인이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거나 하자를 보수하고 그 비용을 청구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지 아니하여 하자가 확산된 경우 등에 매수인의 이러한 과실을 참작하여 손해배상범위를 제한한 다수의 사례들이 있다(大判 1993년11월23일, 92다38980, 大判 1990년3월9일, 88다카31886). 또는 도급인이 수급인의 공사중단시 즉시 해제하고 제3자와의 잔여공사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가능함에도 이를 지체한 경우에 지체기간에 상응하여 지체상금을 인정하지 않기도 하였다(大判 1999년10월12일, 99다14846 등). 또는 채무자의 불이행시에 채권자는 잔여재료나 유휴노동력을 적절히 처분 또는 활용하여 손해를 줄여야 하며 채권자가 태만이나 과실로 인하여 얻지 못한 소득은 손해액을 산정함에 있어 공제되어야 한다고 하였다(大判 2002년5월10일, 2000다37296). 사안에서도 법원은 채권자에게 손해의 확대에 대하여 책임을 물어 손해배상을 감액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고 있는데, 이를 위해 기존의 판례들과 같이 과실상계의 법리를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의 확대에 기여한 채권자의 행태를 일괄하여 채권자의 과실로서 파악하는 것은 이에 관한 실제적인 법리의 발전을 저해하는 면이 있다. 첫째로 채권자의 손해경감은 이미 발생한 불이행에 대해 그로 인한 손해를 감소시키는 합리적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는데 비해, 과실상계의 법리는 채무불이행의 발생 자체에 채권자의 부주의가 기여하는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따라서 이미 발생한 손해의 확대에 관하여는 채권자의 과실의 법리보다는 손해배상의 범위의 제한의 문제로 다루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사안처럼 채무불이행의 가능성이 문제되는 경우에 채권자의 행위에 대한 판단으로 나아가게 되면 채권자의 과실개념을 적용하는 것이 더욱 부적절해진다. 행위주체에게 어떠한 행위의무가 부과되지 않고 단지 자신에게 돌아올 손익을 계산하여 손해를 회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원리를 과실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오히려 흐리기 쉽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과실상계의 법리를 제한없이 계약상의 채무불이행의 경우에 적용하는 것은 부적절한 경우가 많다. 채무불이행의 경우에 과실상계이론을 적용하여 법원이 적절하게 채무자의 손해배상액을 감액하는 것은 법원에게 계약당사자간에 합의된 위험의 분배를 변경하는 권한을 허용하고 계약책임의 예측가능성을 해하는 면이 있다. 계약상의 채무의 이행여부의 판단은 원칙적으로 결과의 달성여부 또는 계약상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채무자가 다하였는지 등 채무자의 행태를 기준으로 판단되어야 할 것인데, 채권자측의 행태를 이와 동가치의 의미를 갖는 과실로서 파악하여 법원이 그것을 불이행책임의 여부와 금액을 정하는데 채무자의 항변도 필요없이 임의로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은 계약책임에 있어 불확실성을 증가시키는 면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 민법상 채권자의 손해경감의무의 법리를 인정한다면 이는 어디에 근거지울수 있는 것인가가 문제된다. 그것은 제393조의 손해배상의 범위를 정하는 또 하나의 기준으로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즉 통설은 제393조를 상당인과관계설에 입각하여 해석하면서 인과관계의 상당성의 판단기준으로서 개연성 이외에 규범목적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수용함으로써 상당성의 내용을 풍성하게 할 것을 제안한다(이은영, 채권총론 289면). 바로 이러한 상당성의 내용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요소로서 채권자에게 손해를 경감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이 요구될 수 있었는가 즉 손해의 회피가능성이 또 하나의 요소로서 추가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최근의 한 판례에서 ‘원고가 주장하는 영업손실 상당의 손해는 원고가 회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하지 아니한 탓에 발생한 것으로도 볼 수 있어 피고의 채무불이행과 상당인과관계에 있다고 보기 어렵다’(大判 2002년5월24일, 2000다42540)고 한 것은 흥미롭다. 결국 채무불이행에 있어 과실상계가 적용되는 경우는 불이행 자체의 발생에 대하여 채권자가 공동의 원인제공자인 경우에 한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채무불이행의 발생후에 채권자가 불이행의 결과를 악화시키거나 또는 손해를 경감시킬 수 있는 적극·소극의 합리적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경우는 이를 ‘회피할 수 있었던 손해’로 보아 인과관계의 상당성이 부인되어 제393조 상의 손해배상의 범위안에 들지 않는다고 구성하는 것이 좀 더 명쾌한 이론구성이 되었을 것이다.
2002-12-23
수취인·발행일 기재 없는 어음의 효력
1. 사실관계 청구인 K는 J1이 발행한 액면금 1,500만원, 지급일 1995.10.10. 지급지 서울, 지급장소 한일은행 퇴계로지점, 발행지 서울시 성북구 안암동 1가 69, 발행일란 및 수취인란이 각 백지로된 약속어음 1매를 J2로부터 지급거절증서작성의무가 면제된 채로 배서양도받았다. K는 이 약속어음의 최종소지인으로서 지급기일에 지급제시하였으나 지급거절당하자 약속어음의 발행인인 J1과 배서인인 J2를 상대로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에 약속어음금 지급을 구하는 소를 제기하였다(96가단 11576). 이에 대해 배서인인 J2는 이 약속어음이 필요적 기재사항인 발행일란과 수취인란이 백지인 채 지급제시되어 무효이므로 약속어음금을 지급할 수 없다는 항변을 하였다. 이에 K는 같은 법원에 약속어음의 효력요건을 규정하고 있는 어음법 제76조 제1항 전문, 제75조 제5호 및 제75조 제6호중 ‘발행일’부분이, 발행일과 수취인 기재가 누락된 어음소지인의 배서인에 대한 소구권을 상실하게 하는 것은 과잉입법으로서 위헌이라고 주장하여, 이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제청신청(97카기157)을 하였으나, 동법원이 이를 1997.6.11. 기각하자 1997.6.30. 그 기각결정정본을 송달받고 1997.7.7. 위 어음법규정들이 헌법 제23조 제1항의 재산권보장과 헌법 제37조 제2항 및 헌법 제103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며, 이 사건 헌법소원심판을 청구하였다. 2. 쟁 점 어음법 제75조 제5호에서 “지급을 받을 자 또는 지급을 받을 자를 지시할 자의 명칭”(수취인)을, 그리고 제75조 제6호에서 “발행일”을 각각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규정하고 제76조 제1항에서 이를 기재하지 않은 증권은 약속어음의 효력이 없다고 규정한다. 그런데 실제의 어음거래에 있어서는 발행일 및 수취인이 기재되지 아니한 어음도 어음요건을 갖춘 완전한 어음과 마찬가지로 당사자간에 발행되어 널리 유통되고 있으며, 어음교환소와 은행 등을 통한 결제과정에서도 발행일 및 수취인의 기재가 없다는 이유로 지급거절됨이 없이 발행일 및 수취인이 기재된 어음과 마찬가지로 지급·결제되고 있다. 사정이 그렇다 하더라도 일단 부도가 되어 법률상의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에는 사정이 달라진다. 어음소지인이 어음상의 권리를 행사하려면 적법한 지급제시를 하여야 하며(어음법 제38조 제1항, 제77조 제1항 제3호), 적법한 지급제시는 원칙으로 제시기간내에 완성된 어음을 제시하는 것이고, 완성된 어음이란 어음요건으로 규정되어 있는 어음의 필요적 기재사항을 흠결없이 모두 갖춘 자를 말한다. 그 중 하나라도 흠결하면 완성된 어음이 아니며, 그런 어음을 제시하는 것은 적법한 제시가 아니다. 특히 배서인에 대해 소구책임을 묻기 위하여는 만기일 또는 만기일에 이은 2거래일 이내에 적법한 지급제시를 하여야 한다(어음법 제53조 제1항, 제38조 제1항). 그런데 이 기간은 매우 짧아서 수취인 및 발행일이 흠결된 어음이 부도처리되어 반환된 경우에는 이미 이 기간을 경과한 것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이 사건의 법률상의 쟁점은 실제에는 약속어음소지인이 수취인이나 발행일의 기재가 흠결된 어음을 지급제시할 경우 배서인에 대한 소구권이 상실되는 결과를 가져오는 이 사건 법률조항들이 헌법에 위배되는지 여부이다. 3. 외국의 입법례 제네바에서 체결한 1930년의 어음법통일조약의 내용에 따라 제정된 통일법계어음법들에서는 발행일 및 수취인은 어음의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규정되어 있다. 미국법은 발행일을 어음의 필요적 요건으로 규정하고 있지 않다(미국통일상법전 제3장 제114조 제1항). 미국법은 종전에는 수취인을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하여 그 기재가 없는 증권은 흠결증권으로 하여 증권상의 권리가 상실되는 것으로 하였으나, 1994년 법개정을 하여 수취인을 임의적 기재사항으로 하여 그 기재가 누락된 경우에는 소지인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규정하였다(미국통일상법전 제3장 제109조(a)(2)항). 영국법은 발행일을 임의적 기재요건으로 규정(영국환어음법 제3조(4)(a)항)하고 있는 반면에 수취인은 필요적 기재요건으로 규정하고 있다(영국환어음법 제6조(1)항). 그 밖에 1988년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국제환어음, 국제약속어음에 관한 UN협약’안에서는 발행일은 필요적 기재요건으로 규정하였으나, 수취인은 임의적 기재사항으로 규정하였다. 4. 헌법재판소의 판단 재산권의 내용과 한계를 구체적으로 형성함에 있어서 입법자는 일반적으로 광범위한 입법형성권을 가진다. 그렇지만 입법형성권을 통하여 재산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여서는 아니되고 사회적 기속성을 함께 고려하여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하는 등 입법형성권의 한계를 일탈해서는 안된다. 그런데 입법자가 어음법을 입법하고 이 사건의 법률조항들을 형성함에 있어서 수취인과 발행일을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규정한 입법목적과 의미는 다음과 같다. (가) 입법자는 어음제도를 형성함에 있어 어음면상에 기재할 어음요건들을 특히 엄격하고 명확하게 규정함으로써 거래의 안전과 원활한 유통을 보장해야 하며, 이러한 입법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수취인과 발행일 역시 다른 어음요건과 함께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하여 어음관계를 명확히 하고자 한 것이다. 국제간의 어음거래의 편의를 위하여 독일 등 국가와 보조를 맞추어 제네바 통일조약의 내용들을 수용하여 수취인과 발행일을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규정하였다. (나) 발행일은 발행일자후 정기출급어음의 만기를 정하는 표준이 되고(어음법 제36조, 제77조 제1항 제2호), 원칙으로 일람출급어음의 지급을 위한 제시기간을 정하는 표준이 된다(어음법 제34조 제1항). (다) 수취인을 기재하지 아니한 어음은 ‘소지인출급식 어음’이 되어 수표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입법자가 입법목적에 비추어 어음관계자의 이해와 공익적 필요 등을 비교형량하고 조정하여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서 발행일과 수취인을 어음의 필요적 기재사항으로 함과 동시에 그 기재를 흠결하는 경우 어음의 효력이 없다고 규정하더라도 그것은 입법형성권의 범위내이지 입법형성권의 한계를 일탈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에서 문제된 법률조항들은 헌법 제23조 제1항에 위반된다고 할 수 없다. 그 밖에 이 사건 법률조항들은 기본권제한의 한계를 정한 헌법 제37조 제2항에도 위반되지 않는다. 어음제도나 이 사건 법률조항들을 포함한 어음법은 사유재산권을 부인한 것이 아니며, 헌법 제23조 제1항 제2문에 의거 어음상의 권리의 득실·변경·행사 등에 관한 내용과 한계를 법률로서 정하여 형성한 것이다. 그결과 이 사건 법률조항들에서 규정한 수취인과 발행일의 기재를 누락하여 소지인이 어음요건흠결로 배서인에 대한 소구권을 상실한다하더라도 이는 기본권의 제한을 정한 규정이라 할 수 없다. 5. 평 석 종래 대법원은 어음요건으로서의 발행지(대법원 전원합의체 1998.4.23. 선고, 95다36466판결)(이 판결에 대하여 반대하는 평석으로는 이기수, 어음요건으로서의 발행지, 법률신문 1998년 5월 18일, 14쪽; 최기원, 발행지기재의 흠결과 어음의 효력, 법률신문 1998년 6월 1일, 14, 15쪽이 있고, 찬성하는 평석으로는 정찬형, 발행지의 기재없는 약속어음의 지급제시의 효력, 법률신문 1998년 5월 11일(제2692호), 14, 15면이 있다) 및 발행지기재 없는 수표의 효력(대법원 전원합의체 1999.8.19. 선고, 99다23383 판결)에 대한 판결에서 어음과 수표에서 국내에서 발행되고 지급될 것이 분명한 경우에는 발행지가 기재되어 있지 않아도 어음·수표로서의 효력에 지장이 없다고 판단하여 그 이전의 판단을 번복한 바가 있다. 어음은 엄격한 요식증권으로서 법에서 규정하는 요건을 다 구비하여야 하고 그 요건가운데 일부라도 흠결되면 특히 법에서 구제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한 증권으로서 효력이 없다(이기수, 어음법·수표법학, 제4판, 1998, 95쪽 아래). 그런데 어음(수표)요건으로서 발행지와 이 사건에서 문제가 된 수취인(수표의 경우에는 수취인의 기재는 필요적 사항이 아니다), 발행일을 차별취급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점에서 이번 헌법재판소의 결정례는 특히 환영하여야 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어음법·수표법은 제네바 어음법통일조약, 수표법통일조약에 근거하여 제정되었고 어음은 엄격한 요식성을 요건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정법의 오해에서 비롯된 일부 실무계에서의 관행을 고려하여 법을 개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법원이 법률의 명문규정에 반하는 판결을 선고한 것은 삼권분립의 원칙이나 국민의 법준수의식 등에 비추어 문제가 심각하다. 종래 발행일, 수취인(발행지도 마찬가지이다) 미기재의 어음·수표(수표에서 수취인의 기재는 예외)에 대하여 일부 지급이 이루어졌던 것은 은행실무가들의 법의 규정의 취지의 무지로 요건흠결의 증권에 대하여 지급을 하였던 것이고 그것은 결코 현행법하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위의 대법원판례는 그러한 잘못된 법위반행위를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헌법재판소가 발행일과 수취인에 대하여 어음의 엄격한 요식성을 들어 그 기재없는 어음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는 취지의 결정을 함으로써 헌법재판소가 대법원보다는 한 수 위임을 보여준 것이라 평가하면서 크게 환영한다. 종래 우리의 법제도의 정비·운용의 실상을 보면 입법부는 지키기 어려운 법을 치밀한 준비없이 제정하는 경우가 있었고 또 법을 집행하는 기관인 행정기관이나 사법부가 위법을 초래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었다. 특히 사법부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대법원이 실정법을 저버리고 판례의 법형성(Rechtsfortbildung)의 한계를 일탈하는 판단을 내렸었는데 이번에 헌법재판소는 그래도 명백한 실정법을 준수하는 쪽으로 판단을 하여 많은 지지를 보낸다. 이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는 정확한 실태조사를 토대로 한 법개정을 통하여 합리적인 내용의 법률규정을 마련하고 그를 준수하도록 하는 것이 핵심관건이다. 이 때에도 우리의 어음법·수표법이 서 있는 토양 내지 뿌리의 인식과 제외국 가운데 특히 그러한 같은 토양위에 서 있는 국가들의 논의 및 법개정과 보조를 맞추는 쪽으로 가야한다는 점을 망각하여서는 안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은 현단계에서는 발행지, 수취인(수표의 경우 예외), 발행일은 명백한 어음요건으로서 이를 기재하지 않은 채 지급제시한 경우는 소구요건을 흠결하여 배서인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다. 결국 어음·수표의 엄격한 요식성, 우리법의 성립토양, 근대국가의 삼권분립의 원리 및 국민의 실정법파악과 그의 준수의식 등에 비추어 이번의 헌법재판소의 판단에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바이다.
2000-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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