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일본 기업은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배상책임이 없다'는 일본 법원 판결은 대한민국 헌법에 위반한다며 판결 효력을 부인했다. 이에 따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일본 기업을 상대로 승소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이번 판결은 일제의 식민지배로 인해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 국민이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가능성을 인정한 첫 사례다.
대법원 민사1부(주심 김능환 대법관)는 24일 일제시대 강제징용 피해자 이모(86)씨 등 5명이 일본 (주)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2009다22549)에서 원고패소 판결한 원심을 파기하고 사건을 부산고법으로 되돌려보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헌법 규정에 비춰볼 때 일제강점기는 규범적 관점에서 불법적인 강점에 지나지 않고, 일본의 불법적인 지배로 인한 법률관계 중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은 그 효력이 배제된다고 봐야 한다"며 이씨 등에 패소판결한 일본 법원 판결의 국내 기판력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이어 "1965년 체결된 한·일 청구권협정은 양국간의 재정적·민사적 채권 채무관계를 정치적 합의에 의해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협정에 의해 일본 정부가 대한민국 정부에 지급한 경제협력자금은 권리문제의 해결과 법적 대가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일본정부는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강제동원피해의 법적 배상을 원천적으로 부인했고,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는 일본의 한반도 지배의 성격에 대해 합의에 이르지 못한 점 등을 비춰보면 이씨 등의 손해배상청구권 등 개인청구권은 청구권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도 포기되지 않았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또 "이씨 등이 이 사건 소를 제기할 시점까지는 대한민국에서 객관적으로 권리를 사실상 행사할 수 없는 장애사유가 없었다고 봄이 상당하므로 미쓰비시사가 소멸시효 완성을 주장해 이씨 등에 대한 채무이행을 거절하는 것은 현저히 부당한 것으로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해 허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이씨 등 원고들은 1944년 9월 일본정부에 의해 강제로 징용당해 미쓰비시중공업에서 1년여간 노역을 했다. 원고들은 노역에 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고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으로 이한 후유증에 시달리는 등의 피해를 입었다며 1995년 일본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 손해배상과 임금을 청구하는 소송을 제기했으나 소멸시효 완성 등을 이유로 패소했다. 원고들은 2000년 5월 한국에서 다시 소송을 제기했으나, 1·2심은 "일본판결의 효력을 대한민국 법원이 승인하는 결과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위반되지 않고, 승인된 일본판결은 기판력을 가지므로 일본판결과 모순된 판단을 할 수 없다"며 원고패소 판결했다.
이날 재판부는 다른 강제징용 피해자 여모(89)씨 등 4명이 (주)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 상고심(2009다68620)에서도 같은 취지로 원고패소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다.
이 사건 원고 측 소송대리를 맡은 장영석(36·사법연수원 33기) 법무법인 해마루 변호사는 "이번 판결은 정부가 위안부 문제 해결에 나서지 않는 것에 헌법재판소가 위헌결정을 내린 것과 더불어 과거사 문제에 대한 우리 사법부의 의지를 만천하에 밝힌 중요한 사건"이라며 "강제징용 피해자 뿐만 아니라 일제 치하에서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 더 나가 과거사 관련 사건들에 대하여 시금석이 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