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들어가면서
가. 헌법 제27조 제3항은 ‘모든 국민은 신속한 재판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고, ‘지연된 정의는 정의의 부인(Justice delayed is justice denied)’이라고 한다. 재판은 또한 공정해야 한다. 신속하면서 공정한 재판! 법원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달릴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아야 한다는 책무를 지고 있는 듯하다.
나. 신속한 재판은 재판을 받는 당사자만의 욕구는 아닐 것이다. 법관 역시 담당 사건을 신속히 종결하여 판결을 기다리는 당사자들에게 답을 주고 싶지만, 공정한 결론을 위하여 당사자의 주장 및 입증 기회에 대한 욕구를 단칼에 잘라 버리기 어려운 경우도 있어 미제사건이 쌓이는 것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다.
다. 이러한 사건들 중에는 다른 사건과의 관련성 때문에 당사자들이 합의를 하고자 하여도 그 결과를 대기하여야 하거나, 다른 사건에 미칠 영향 때문에 사건을 법원의 재판에 묶어 놓고 세월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2. 사안의 개요
사례A. 원고는 피고에게 금원을 대여하였는데, 피고는 원고가 소개한 사람에게 거금을 투자하였다가 투자금을 회수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여금을 변제하지 않고 있어 원고가 대여금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다. 원고는 피고의 투자에 대하여 도의적 책임은 느끼고 있으나 피고의 투자금회수 여부는 불명확한 상태라고 한다.
사례B. 원고는 피고가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명예훼손을 하였다는 이유로 피고를 형사고소하고, 가압류 및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피고는 명예훼손으로 약식기소되었으나 명예훼손행위를 부인하고 있다.
사례C. 원고는 비자발급대행업자인 피고에게 미국비자발급을 의뢰하였으나 약정기한이 지나도록 비자를 발급받지 못해 계약을 해제하고 그 수속비용 전액의 반환을 요구한다. 피고는 미국변호사에게 의뢰하여 비자발급절차를 진행중이므로 좀더 기다려 달라고 하고, 원고는 피고가 채무불이행을 시인하지 않아 이행보증을 한 보험회사로부터 보험금을 지급받지 못했고, 앞으로도 동일한 위험이 예상된다고 우려하고 있다.
사례D.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낸 채무자는 그 소유의 유일한 부동산을 형인 피고앞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하였고, 채권자인 원고는 피고를 상대로 사해행위취소의 소를 제기하였다. 조정기일에 피고는 자신도 채권자라서 대물변제받은 것이지만, 동생의 원고에 대한 채무를 일부 대신 변제할 의사도 있으나 또 다른 채권자가 사해행위취소를 구할 것이 염려된다고 한다.
사례E. 원고는 피고에게 점포를 전대하였는데, 피고가 차임을 연체하므로 차임연체를 이유로 전대차를 해지하고 명도 및 연체차임을 청구하였고, 1심에서 전부 승소하였다. 피고가 항소하였고, 피고는 차임이 과다하다고 주장하면서 별도로 차임감액청구의 소를 제기하였는데 아직 1심 진행중이다.
3. 조정의 내용
가. 사례A의 경우 : 피고가 우선 대여금 중 약 50%를 변제하고, 나머지는 피고가 소외인으로부터 투자금을 회수하는 경우 지급하도록 하는 내용의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하였고, 이 결정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나. 사례B의 경우 : 명예훼손사건에 대한 형사판결 결과를 기다리느라 변론이 속행되던 중 재판부는 조정센터 조정에 회부하였고, 조정과정에서 원고와 피고는 형사사건에 대하여 유죄의 판결이 확정되는 것을 조건으로 일정액의 손해배상금을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조정이 성립되었다.
다. 사례C의 경우 : 1심에서는 원고 전부승소의 판결을 하였는데 항소심에서 조정센터의 조정에 회부하였고, 원고의 우려와 피고의 요청을 반영하여 원고는 일정 기한까지 비자발급을 기다리기로 하고, 피고는 위 기한까지 비자가 발급되지 아니하는 경우 일부 금액을 반환하기로 하며, 보험회사에 대하여 그 책임을 인정하기로 하는 내용으로 합의가 이루어져 조정이 성립되었다.
라. 사례D의 경우 : 피고가 일단 일정금원을 원고에게 변제하되 제3자로부터 사해행위취소의 소가 제기되어 확정되는 경우, 원고는 피고에게 위 수령금원을 반환하기로 하는 내용으로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하였고, 이 결정은 그대로 확정되었다.
마. 사례E의 경우 : 이미 임대차가 해지된 것을 피고가 다툴 입장이 되지 못하고 진행중인 차임감액소송에서 피고의 승소여지는 있으므로 장래 위 소송에서 차임감액이 확정되는 경우 그 금액을 반영하도록 하는 내용으로 조정에 갈음하는 결정을 하였다.
4. 이 사건 조정의 특성
가. 근대화 과정의 특성 중 하나는 분업화라 할 것인데, 사법제도 역시 유사한 면이 있다. 재판의 내용에 따라 민·형사 재판이 나누어지고, 극단적으로는 소송물에 따라 재판을 달리하는 정도로 분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서로 결론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벌써 10여년이 흘러 우리의 기억에서 멀어진 O. J. Simpson 사건에서 형사사건에서는 무죄가 확정되었으나, 민사사건에서는 배상책임이 인정된 사건은 당시 전세계를 후끈 달구었었다.
나. 재판의 분화로 입증과정을 서로 달리하고, 입증정도도 달라 O. J. Simpson 사건과 같이 결론을 달리하는 경우가 발생할 수는 있으나, 대부분의 사건은 형사사건의 결론을 배척하기 어렵다. 형사사건의 경우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다른 사안 또는 당해 사안의 진행상황이 재판의 결론에 영향을 미치거나 적어도 당사자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고, 이로 인한 재판의 지연은 재판에 임하는 법관이나 당사자 모두에게 참으로 답답하고 무의미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이다.
다. 이러한 사안들에서 관련사건의 결과 또는 우려되는 상황에 따른 조건부 결론은 판결로는 불가능한 분쟁해결방법이다. 조정은 법관이나 분쟁당사자 모두를 무의미한 시간과 노력의 낭비로부터 해방시켜 상황에 적합한 정의를 신속히 실현시킬 수 있는 탈출구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