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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논단

    일본 민법에서 계약상 의무 위반에 대한 불법행위책임의 인정 여부

    정다영 교수 (충남대 로스쿨)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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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Ⅰ. 서론

    불법행위법이 상정하는 전형적인 케이스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행위에 의해 손해를 입은 경우 그 회복을 가해자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계약의 일방 당사자가 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주의의무, 예컨대 위임계약에서 수임인이 선관주의의무를 고의 또는 과실로 위반하여 계약의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힌 경우 그 자체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수 있는지 여부가 문제된다. 만약 불법행위책임의 성립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계약적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면, 위임계약의 수임인이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위임의 본지(本旨)에 따라 위임사무를 처리하지 않아 위임인에게 손해가 발생한 경우 그 자체로 불법행위를 인정할 여지가 있다. 불법행위의 요건인 위법성을 판단함에 있어 계약적 요소를 원칙적으로 배제하여야 한다는 입장에 설 경우, 계약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무를 위반하였다는 것만으로는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이와 달리 부작위 불법행위에서 말하는 작위의무는 법적인 의무여야 하지만 그러한 작위의무는 계약관계에서도 도출될 수 있으므로, 불법행위의 요건인 위법성을 판단할 때 계약관계에서 요구되는 주의의무를 배제하거나 분리할 수 없으며, 특히 수단채무에서 주의의무 위반으로 상대방에게 손해를 입게 하였다면 이는 곧 불법행위로서 위법하다는 입장도 상정할 수 있다. 이하에서는 계약상 의무 위반에 대한 불법행위책임의 인정 여부와 관련하여 일본 최고재판소의 태도 및 학설상 논의를 살펴보겠다(상세한 내용은 졸고, '일본 민법에서 계약상 의무 위반에 대한 불법행위책임의 인정 여부', 저스티스 통권 제185호, 2021, 69-99면 참고).


    Ⅱ. 일본 판례의 검토
    1. 最決 平成27年(2015年)7月8日[이른바 '스루가(スルガ)은행 대 일본 IBM 사건']

    원고(은행)와 피고(시스템개발업체)는 은행 업무 전반을 처리하는 시스템의 구축에 관한 기본 합의 및 개별 계약을 체결하여 핵심시스템의 개발을 목표로 하였으나, 해당 시스템의 개발은 중간에 중단되었다. 이에 원고는 피고에게 ① 도급계약의 본질적 의무(시스템개발의무) 위반, ② 프로젝트관리의무 위반 내지 ③ 설명의무 위반이 있거나 ④ 각 개별 계약은 모두 사용자의 착오로 인하여 무효라고 하면서, 도급계약의 채무불이행 또는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① 내지 ③) 내지 부당이득에 기한 원상회복(④)을 주장하였다.

    제1심은 피고의 도급계약상 채무불이행책임은 부정하면서도, 프로젝트관리의무 위반을 이유로 불법행위책임(손해배상액 74억 엔)을 인정하였다. 이 사안에서 도급계약에 관한 본질적 의무의 불이행에 기한 채무불이행책임이 부정된 배경에는 최종 합의의 법적 구속력이 개별 계약의 체결을 조건으로 하고 있으며, 개별 계약 대부분이 체결되지 않았다는 사정이 있었다. 이에 대해 원고는 주위적 청구원인을 불법행위책임으로 구성하여 항소하였다. 항소심에서도 피고의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였지만, 손해배상액이 41억 엔으로 크게 감소하였다. 항소심판결에 대해 당사자 쌍방이 항고하였으나, 최고재판소는 쌍방의 상고를 기각하여 항소심판결의 내용에 따라 확정되었다. 이 사안에서 최고재판소는 '설명의무'와 같은 기존의 관념 대신 '프로젝트관리의무'라는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면서, 실질적으로 계약상 급부의무를 위반한 경우에도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였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2. 最判 平成27年(2015年)9月3日[이른바 '제이콤(ジェイコム) 주식 오발주(誤發注) 사건']

    원고(미즈호 증권사)는 "61만 엔으로 1주"라고 입력해야 하는 제이콤(ジェイコム) 주식 매도주문을 "1엔으로 61만 주"라고 입력한 직후 이에 대해 주문취소를 하였으나, 피고(도쿄증권거래소) 시스템의 결함으로 인해 매매정지를 하지 못하고 매각하게 되어 400억 엔 이상의 손해를 입었다. 제1심에서는 거래소의 중과실을 인정하여, 매매정지의무 위반에 따라 채무불이행책임 및 불법행위책임이 인정된다고 하여 약 107억 엔의 손해배상을 명하였다. 당시 시행되던 일본 구 증권거래법 및 증권거래소업무규정에 따르면 증권거래소는 유가증권 시장 운영에 관한 전문가이자 매매정지권한을 부여받은 자주규제기관으로서, 유가증권 거래를 공정·원활하게 해야 할 뿐 아니라 일정한 경우에는 일반적인 감독권의 행사를 넘어 행정개입까지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매정지권의 적절한 행사는 피고의 의무 중 하나라는 것이다. 원심에서는 매매정지의무 위반에 따른 불법행위책임만을 인정하였다. 한편 채무불이행의 주장에 대해서는 거래참가자계약에 따른 면책규정이 적용되며, 피고는 중과실이 없기 때문에 채무불이행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러한 면책규정은 불법행위책임에도 적용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매매정지의무 위반에 중과실이 인정되기 때문에 공익과 투자자보호의 관점에서 피고는 불법행위책임을 부담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당사자 쌍방이 상고하였으나, 최고재판소는 쌍방의 상고를 기각하여 항소심 판결 내용대로 확정되었다. 이 사안에서는 거래소 시스템의 결함에 기인하여 발생하는 손해를 회피하기 위해 피고인 도쿄증권거래소에게 거래정지의무를 부과하면서 불법행위책임을 긍정하였다는 점이 눈에 띈다. 만약 불법행위의 전제로서 가해자의 행위의무가 계약상 의무의 내용과 독립적으로 결정된다고 할 경우, 최고재판소는 계약상 의무보다 고도의 불법행위법상 의무를 설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Ⅲ. 일본에서의 논의 검토
    1. 계약 내용을 위반한 경우 불법행위책임의 인정 여부

    계약의 체결·이행과정에서 신체적 이익이나 정신적 이익이 침해당한 경우 채무불이행책임 뿐 아니라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문제는 인격적 이익이나 일반적인 재산적 이익을 침해하거나 보호의무를 위반하는 경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특별히 규정된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경우에도 채무불이행책임 뿐 아니라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이다. 일본 최고재판소는 프로젝트관리의무 위반의 경우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 경우 전문가·사업체로서 구비해야 할 전문적 지식·경험에 대한 상대방의 신뢰가 불법행위책임의 근거가 된다고 본다. 그러나 고객(사용자)의 전문가(공급업체)의 능력·경험에 대한 신뢰는 보호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양자의 관계는 특히 기업간 거래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전에 위험계산이 가능한 것이며, 계약적인 조정을 통해 해결하는 것이 보다 적합하다는 비판이 있다.

    2. 불법행위법의 역할

    채무불이행(일본 민법 제415조)은 채권총칙에 규정되어 있고(제3편 제1장), 불법행위(일본 민법 제709조)는 채권의 발생원인의 하나로 규정되어 있다(제3편 제5장). 채무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이 기존에 확정된 채무불이행에 대한 구제인 반면,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은 사후적인 평가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책임의 경합을 인정하는 이상, 어느 하나의 책임을 추궁하는 것이 소멸시효기간의 경과 등으로 불가능 또는 곤란하게 되더라도 다른 책임을 추궁할 수 있게 되며, 피해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규정을 선택하여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는 것에 실익이 있는 경우는 계약책임이 불법행위책임보다 가벼운 경우이다. 예컨대 면책조항 또는 책임제한조항이 있을 때나 인격적 이익이 침해된 경우에는 여전히 피해자 보호의 필요성이 있는바, 불법행위법의 영역에까지 면책조항을 적용하여 피해자를 불리하게 하여서는 안 된다. 한편, 계약상 의무 위반으로 목적물이 멸실·손상되는 등 소유권으로 대표되는 재산권이 침해된 경우에는 불법행위책임에 대해서도 계약으로 수정할 수 있다고 본다. 즉, 책임제한조항으로 인하여 불법행위책임 또한 감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사자 간에 대가를 낮추는 대신 책임을 감면하는 등으로, 책임제한조항을 두면서 대가 결정에 반영하였다고 보아야 하고, 재산권은 일반적으로 인격적 이익에 비해 보호의 필요성이 낮은 법익이기 때문이다.


    Ⅳ. 결론

    계약에 따른 급부의무를 위반한 경우 그 자체로 불법행위가 성립한다고 볼 것인지의 문제는 채무불이행법과 불법행위법의 자리매김에 연결되는 지점이다. 계약규범이 포함하지 않는 부분만을 불법행위규범으로 보완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으나, 계약체결에서 이행에 이르는 과정을 통합적이고 지속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불법행위규범을 바로 적용할 수 있다고 보는 견해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에 따르면 진료계약이나 치료계약에서 의사의 선관주의의무 위반을 이유로 불법행위책임을 인정하는 것처럼, 결과채무가 아닌 수단채무에 있어서는 계약관계에서 발생한 주의의무 위반으로 상대방에게 손해가 발생하면 불법행위 성립요건으로서 위법성이 있다고 보게 된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계약의 종류, 의무의 내용 등으로 보다 세분화하여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다영 교수 (충남대 로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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