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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조라운지 커버스토리] 여성법조인의 代母 이영애 변호사

    “법조인도 최고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에 둬야”

    왕성민 기자 wangsm@lawtimes.co.kr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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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조인의 삶은 지난한 여정을 묵묵하게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합니다."

     

    '여성법조인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이영애(72·사법연수원 3기·사진) 변호사에게는 언제나 '최초'이자 '최고'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서울대 법대 수석졸업, 사법시험 수석 합격에 이어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고등법원 부장판사, 법원장을 지내며 법조계 '유리천장'을 깨는 데 앞장섰다. 하지만 그에게는 지나간 성취에 대한 자만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이 변호사는 "예전 일은 빨리 잊고, 앞으로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신독(愼獨)'의 자세를 강조했다. 그는 인터뷰 내내 법조인의 삶은 화려한 이벤트로 점철된 '넓은 문'이 아닌, 마치 순례의 길처럼 묵묵하게 걸어야 하는 '좁은 문'임을 강조했다. 법원을 떠난 뒤 변호사와 국회의원을 거쳐 지금은 생명존중(Pro-life) 운동 활동가로 우리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자 노력하는 이 변호사를 지난달 초 만나 삶과 인생철학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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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영애(72·사법연수원 3기) 변호사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지 한 달이 채 못 되었던 1948년 무자(戊子)년 9월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서울대 법대에서 헌법을 가르치던 이경호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었고, 외조부는 제헌국회 의원을 지낸 진직현 변호사였다. 명문가 출신으로 그는 엄격한 가풍 속에 '옳고 그름'에 관한 가치관을 체득했다고 한다.

     

    "제가 어렸던 시절은 지금하고는 사회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입시와 같은 실용 위주의 교육이 아니라, 태도나 생각을 다루는 '도덕 교육'이 훨씬 중시됐습니다. 나라는 작고 가난했어도, 가족 간의 유대는 강한 시절이었습니다. 저도 어른들의 말씀을 듣고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삶의 가치관을 형성했는데, 아무래도 법조인이 많았던 집안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습니다."

     

    엄격한 집안 교육 받으며

    ‘옳고 그름’의 가치관 체득

     

    반 세기 전 유교적 사회 분위기를 생각할 때, 여성이 법학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 양성기관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해방 전후 의사로 활약했던 어머니(故 진종순 여사)를 보며 그는 여성도 당연히 직업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여자가 대학에 가면 곧바로 신부수업을 받고 결혼을 한 다음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하지만 의사였던 어머니 덕분에 어려서부터 여자도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당시 우리나라에는 여자가 일할 만한 직장이 별로 없었고, 직장에 들어간다 해도 남성과 동등하게 대접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게 법조인입니다. 전문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적어도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다는 소박한 생각에 법조인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英文科 입학 후 法大로

     수석졸업·司試 수석합격까지

     

    처음에는 집안에서도 그의 선택을 내켜하지 않았다. 그는 "서울대를 가려면 여자에게 적합한 영문과를 가라"는 권유를 받고 1967년 서울대 영문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입학 때부터 사법시험을 볼 요량이었던 그는 곧 법과대학으로 전과를 했고, 1971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같은 해 치러진 제13회 사법시험에도 수석으로 합격하는 기염을 토한다. 여성으로서는 첫 사법시험 수석 합격이었다. 

     

    "수험생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수석 합격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습니다.그 당시 어떻게 공부했는지도 솔직히 기억이 나지 않아요(웃음). 다만 여성 수석 합격자라는 점이 언론에 부각돼 주목을 받았고, 아버지께서 정말 좋아하셨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평소에는 '여자가 법학을 하면 힘들다,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 등의 부정적인 말씀을 하시곤 했는데, 막상 합격하니까 제일 기뻐하시더라구요."

     

    뜻하지 않게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됐지만, 이 변호사는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더 절제하는 마음을 가지려 노력했다고 한다.

     

    여성 첫 고등부장·법원장 거치며

    법원 내 ‘맏언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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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쭐하는 마음에 자만에 빠지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석 졸업이나 수석 합격과 같은 지나간 성취는 빨리 잊고, 지금 할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던 기억이 납니다."

     

    사법연수원 수료 후 판사로 임관한 그는 1973년 서울민사지법에서 법조인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이 변호사의 첫 부장판사는 조진만 전 대법원장의 아들이었던 고(故) 조언(고시 8회) 전 사법연수원장이었다. 이후 이회창(85·고시 8회) 전 대법관과 김용준(82·고시 9회) 전 헌법재판소장이 부장판사로 있던 재판부를 거치면서 사법부 일원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갔다. 

     

    일·가정은 양립하기 어려운 숙제

     양보와 희생 필요

     

    "처음 판사 발령을 받았을 때에는 재판부에서 여성 배석판사를 꺼린다는 소문도 돌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난 부장님들은 성별에는 전혀 개의치 않으셨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로서, 한 사람의 판사로서 대우해 주셨고 제가 법원에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셨습니다."

     

    70~80년대에는 판사들이 휴일에 출근하거나, 사건 기록을 집에까지 가져가 밤 늦도록 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 변호사는 "판사들이 엄청난 업무량을 소화하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건 남다른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법원 구성원들은 공정하고 좋은 판결을 하려는 강한 의지와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법조인 삶은 먼 길을 묵묵히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

     

    이후 이 변호사는 여성 최초로 고등법원 부장판사(1995년)와 법원장(2004년)에 발탁되면서 법원 내 '맏언니'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항상 앞장서 사법부 유리천장을 깨던 그였지만 2004년 후배인 김영란(64·11기) 대법원 양형위원장이 대법관에 임명되자, 법원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한 결단이었다. 

     

    야인(野人)으로 돌아간 이 변호사는 "이왕이면 의미 있는 일에 도전해보자"고 마음먹고 천주교 서울대교구 생명위원회 법조위원장을 맡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2008년에는 이회창 당시 자유선진당 대표의 권유를 받고 자유선진당 비례대표 1번으로 제18대 국회에도 입성했다.

     

    자신만의 페이스를 유지해야

    멀리, 오래 갈 수 있어

     

    "처음에는 정치가 제 적성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초년 판사 시절 부장으로 모셨고, 아버님과도 인연이 있던 이회창 총재께서 직접 참여를 권유하시는데 계속 모른 채 할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 저는 프로라이프(Pro-life) 활동을 하면서 생명윤리 관련 법률을 입법해야 할 필요성을 강하게 느낄 때였습니다. 결국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하나의 소명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정계에 입문한 그는 본격적으로 생명존중 운동을 펼치기 위해 '생명포럼'을 설립하고, 해외 입법사례 등을 면밀히 연구하면서 정책에 반영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꼭 필요한 담론이 생략된 채 졸속으로 법이 만들어지는 등 현실 정치에 실망할 때도 많았다. 


    2004년 변호사의 길로

     18대 국회 비례대표로 입성

     

    "국회에서 처음 충격을 받은 사실은 법을 너무 쉽게 만든다는 점이었습니다. 제대로 된 입법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단계에 걸쳐 충분한 논의가 이뤄져야 합니다. 우선 헌법에 위반되지는 않는지, 국제규범이나 상위법과 충돌하는 부분이 없는지, 또 예산은 어떻게 확보하는지, 사회적 파장은 어떠할지 등을 꼼꼼하게 살펴야 해요. 그런데 이러한 숙의과정 없이 의원 발의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분명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에요." 

     

    이 변호사는 국회를 떠난 뒤에도 법률가들이 주축이 된 생명윤리 연구모임인 '루멘비테(회장 윤형한 변호사)'를 만들어 '낙태 관련 제·개정 법률안' 청원을 준비하는 등 지속적인 활약을 펼쳤다. 루멘비테(Lumen Vitae)는 라틴어로 '생명의 빛'이란 뜻이다. 법률안에는 임부가 낙태의사결정을 신중하게 결정하도록 돕는 '사전 의료·심리상담제도'와 '익명출산제도' 등의 내용이 담겨 있다.

     

    본격적 생명존중 운동 펼치기 위해

    ‘생명포럼’ 설립

     

    "법과 제도가 인간의 존엄을 토대로 이뤄져 있으면, 그 사회는 건강하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법조인 역시 최고의 가치를 '인간의 존엄성'에 두어야 합니다. 한 명의 법조인으로서 생명윤리를 연구하고 생명존중활동에 힘쓰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인간이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본 토대인 생명윤리가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그의 남편은 제15대 국회의원을 지낸 김찬진(79·고시 15회) 변호사다. 여성 변호사들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이 변호사이지만, 그에게도 일·가정 양립은 여전히 어려운 숙제다. 여성 법조인으로 가정과 직장에서 당당하게 홀로서기할 수 있는 비결을 묻자 "내가 아닌 공동체를 중심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국회 떠났어도 낙태 관련

    제·개정 법률안 청원 활동

     

    "남편이든 자식이든 가족 구성원마다 그들이 속한 사회와그곳에서의 역할이 다 다릅니다. 따라서 서로 조금씩 양보하고 희생해가면서 최선의 결론을 내도록 노력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사실에는 '희생'의 개념이 전제돼 있어요. 희생없이 이룰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를 중심에 두지 말고 공동체 안에서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현명한 해결책을 모색하는 게 중요합니다."

     

    법원과 재야, 국회를 넘나들며 광폭 행보를 걸었던 그는 법조인의 삶을 '산티아고 순례길'에 비유했다. 

     

    "법조인의 길은 멀고 험한 길을 묵묵하게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과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법조는 기복이 많거나 화려하지 않은 대신, 꾸준함과 성실성이 요구됩니다. 크고 작은 사건들을 자신만의 페이스로 처리해 나가면서 긴 호흡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멀리, 길게 갈 수 있습니다."

     

     

    왕성민 기자·홍지혜 객원기자   wangsm·jh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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