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1일 그때부터 불과 두 달여 전에 수복된 서울에서 ‘법치주의의 확립’과 ‘법률문화의 창달’을 사시(社是)로 내걸고 법률신문을 창간하였던 선배들의 용기와 결단은 경이롭다. 대한민국이 세계 역사상 드물게 전쟁의 폐허를 극복하고 경제 부흥과 민주주의의 발전을 동시에 이룬 나라 중의 하나가 된 것은 그러한 선각자들 덕분이 아니었을까? 법률신문이 이제 창간 70주년을 지나, 바야흐로 지령(紙齡) 5000호를 발간하게 된 것을 우리나라의 모든 법률가들, 아니 모든 국민과 함께 축하해 마지 않는다.
지나온 70년
한국전쟁 후 세계에서 최빈국이던 우리나라는 이제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에 드는 선진국으로 발전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주는 나라가 되었고, 예술, 체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계적인 인물을 배출하며 곳곳에서 한류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법률 분야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건국 이후 역동적으로 발전해 왔다. 분단, 전쟁, 군사 쿠데타, 권위주의적 독재정부, 민주혁명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 법조는 부끄러운 역사도 남겼지만, 자랑스러운 역사 또한 많이 있다. 이제 누구도 우리가 언론자유가 없는 독재국가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의심하지는 않듯이, 한국의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불가역적으로 정착되었다. 그러나 그것들이 성숙하게 내실화, 선진화, 국제화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70여 년 법률가의 눈 · 귀 · 입으로
법률 정론지로서 정체성 지켜와
판형 바꾸고 내용도 다양한 혁신
젊은 법조인 세계진출 뒷받침해야
앞으로 70년
한국사회 전반적으로 빈부 차이와 이념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전문가에 대한 불신과 탈 진실(post-truth)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한국의 법조 실무계와 학계가 모두 위기에 처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조는 법원, 검찰, 변호사, 경찰 등 직역을 가릴 것 없이 국민의 신뢰가 땅에 떨어져 있고, 학계는 아카데미아로서의 위기를 맞고 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모든 법률가가 법의 지배(rule of law)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고, 관행이라는 이름 아래 음양으로 배어 있는 낙후된 실무를 과감히 벗겨 내서, 국민을 위한 법률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환골탈태하여야 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젊은 법률가들에게는 좁은 국내 시장에서 경쟁할 것이 아니라 세계로, 미래로 시야를 넓히기를 권하고 싶다. 법률시장에서도 뛰어난 자질을 가진 우리나라 젊은 법률가들이 국제무대에서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나라는 이미 각종 국제형사재판소(ICTY, ICTR, ICC, ECCC, IRMCT)와 국제해양법재판소(ITLOS)의 재판관 내지 소장단, 국제법위원회(ILC) 위원, 세계무역기구(WTO) 항소심 패널, 국제검사협회(IAP) 회장, 인터폴 총재 등을 다수 배출한 바 있다. 한국 법률가에게 황무지 같던 네덜란드 헤이그에는 지금 국제재판소 재판관을 비롯해서, 각종 국제법률기구와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한국계 법률가, 유학생 등 수십명이 정기적으로 모여 학술 발표와 토론을 하는 SHILA(Seoul Hague International Law Academy)라는 모임이 있다. 가까운 장래에는 한국인 국제사법재판소(ICJ) 재판관도 배출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가 이야기하였듯이, 가보지 않은 길이라 하더라도 용기를 가지고 개척해 나가면, 내가 가는 길이 새로운 길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법률신문에 바란다
법률신문은 최근 새로운 경영진을 맞아 판형 등 형식을 바꾸고 기사 내용도 다양화하는 등 혁신을 도모하고 있다. 법률신문이 이에 더하여 젊은 법조인들이 넓은 세계 무대로 나가는 것을 뒷받침하는 역할도 수행해 주었으면 한다. 지난 70여년간, 우리나라 법률가들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어준 법률신문이 법률정론지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면서 혁신에 혁신을 거듭하여, 우리나라 법치주의 정착과 법률문화 창달에 동반자가 되어 함께 나아가기를 바라 마지 않는다.
권오곤 국제법연구소장(전 ICC 당사국총회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