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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이 만나는 법] 김현섭 서울대 철학과 교수… 판사에서 철학교수로, 의심하고 질문하고 앎의 가능성에 다가가는 삶

    김도언 시인 (소설가) 입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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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터뷰에 앞서 인터넷 서핑을 통해 그의 강연 동영상을 보면서 어렴풋이 전해져오는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그를 실제로 만나는 동안 조금 더 명료히 확인되는 것이었다. 그의 표정에는 텍스트를 오랫동안 마주한 이에게서 느껴지는, 다시 말해 태만을 모르는 지적 훈련과 침사(沈思)에 따른 나른한 피로감 같은 게 있었던 것. 선입견이 개입했을 테지만 새치가 비치는 그의 머리칼과 문득문득 먼 곳을 향하는 그의 시선은 40대 중반에 들어서는 철학자가 처한 어떤 고유한 현재, 내가 '뜨겁고 치열한 권태'라고 부르고 싶은 것을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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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약 력 ]

    인천 출신으로 대원외고,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1999년 제41회 사법시험에 최연소로 합격하고, 사법연수원을 다니던 2001년 서울대 철학과 석사 과정에 입학했다. 2003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뒤 육군 법무관을 거쳐 2006년 서울동부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철학 공부를 위해 곧바로 판사 생활을 접고 미국 뉴욕대로 유학을 떠났다. 2012년 뉴욕대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 스탠퍼드대 사회윤리학 센터 박사후연구원을 지낸 뒤 귀국했다. 2014년 서울대 철학과 교수로 부임해 윤리학과 정치철학, 법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김현섭 교수(44·사법연수원 32기)는 학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사법고시를 패스하고 연수원을 나온 후 판사로 임용됐다. 그는 연수원 시절 모교인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 미국 뉴욕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다시 모교 철학과 교수로 돌아온다. 이처럼 자신의 삶에서 극적이라고 할 수 있는 전회(轉回)가 있었던 이를 만날 때, 그의 내면에 어떤 동요와 투쟁이 있었던 것인지를 상상하는 것은 인터뷰어에겐 즐거운 권한이 아닐 수 없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을 버리고 돌연 '낡은' 학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는 철학을 공부하러 미국 유학을 결정했을 때 가족은 어떤 반응이었을까.

    "아버지는 저의 삶에 간섭이나 개입을 안 하려고 자제를 하시는 게 느껴졌어요. 유학을 간다고 했을 때 염려하고 만류하시고 싶은 마음이 계셨을 텐데요, 결국엔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제 의사를 존중해 주셨어요. 감사한 일이죠."

    법원 판사에서 철학교수로 변신한 내력이 대중적인 관점에서 보면 워낙 특이한 사례였기에 그는 왜 처음부터 철학을 공부하지 않았는지, 법학에 이어 철학을 공부한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그간 질문을 많이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부에는 순서가 있고, 지금 관점에서 보면 제가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고 싶은 분야가 철학과 윤리학이라는 게 명확한데, 고등학교 때나 학부 때는 그게 잘 보이지 않았어요. 그 시절에 물리학이나 자연과학 심리학 신경과학 쪽에도 관심이 있었는데, 사실은 여러 학문을 조금씩 살펴보면서 정말 제가 하고 싶은 학문이 철학이라는 걸 확인하게 되었어요. 근본적 원리에 대한 관심이 철학으로 귀결된 거라고도 볼 수 있어요. 윤리학에 대한 관심은 유학을 가고 나서 확고해졌고요. 저는 그걸 발견이라고 표현하고 싶어요."

    판사로 있을 때 지적 호기심과 갈증이 일어나서
    철학 쪽으로 관심 분야를 바꾸었다는 말을 하기에는
    일천한 경력자로서 법관이라는 직역에 대한 결례

    법학과 철학은 동질적, 철학의 추상도가 좀 더 클 뿐
    공부하는 게 가장 큰 행복


    그럼에도 내 의문은 흔쾌히 풀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당시 그의 내면에 어떤 내적 파문이 일어났던 것인지. 나는 이런 추론을 해봤다. 이를테면 판사의 일은 가치판단에 대한 결정을 통해 사건에 대한 판결과 판정을 내리는 것이다. 판결을 내리는 순간 판사의 고민은 끝난다. 그런데 김 교수에겐 이처럼 판결을 내리는 일이 혹여 부담이나 괴로움을 안겨주지는 않았던 것일까. 자신이 내린 판결이 100퍼센트 진실과 부합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회의와 의심에서 어떤 모티프를 받은 것은 아닐까. 결국 그것이 회의와 의심으로 추동되는 철학이라는 학문으로의 전향을 결심하게 한 것이 아닐까.

    "음, 어느 정도 동의합니다. 저는 비교적 제가 좋아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싶었고 그 결과 대학에서 학생들, 동료 교수들과 함께 철학을 공부하고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는데,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제가 법관으로 있을 때 지적 호기심과 갈증이 일어나서 철학 쪽으로 관심 분야를 바꾸었다는 말을 하기에는 제 법관 경력이 너무 일천해요. 그건 법관이라는 직에 대한 결례라고 생각해요. 사실, 구체적인 문제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접근해서 의문화 회의, 호기심을 풀어내는 일은 기본적으로 법학이나 철학이나 동질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다만 철학이 추상도가 좀 더 클 뿐이죠. 양적인 측면에서 제 고민을 심화시키고 더 살펴볼 수 있는 분야가 철학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법학이나 철학이 분업이나 협업이라는 측면에서 상호 좋은 자극과 도움을 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여기서 그에게 불편하게 다가갈 수도 있는 질문을 던졌다. 철학에 대해 외면할 수 없는 호기심과 흥미를 느껴 판사직을 그만두고 철학을 공부하고 그래서 학위까지 취득했을 때, 그렇게 각별하게 훈련된 지성을 대학의 강단이 아니라 다른 차원에서 발휘할 수는 없었을까. 이를테면 전업 철학가의 길 같은 것 말이다. 나의 이런 질문은 사실 아카데미즘에 대한 어떤 편견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었을 텐데, 그는 우문을 나무라듯 현답을 들려주었다.

    "추상도가 크고 토픽이 다양한 사회적 의제를 체계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시스템이나 제도가 학교에 잘 갖춰져 있고 저는 그게 저에게 잘 맞는다고 느꼈어요. 스타일상 어떤 철학자는 한 주제에 대해 혼자서 깊이 파고드는 걸 좋아하는 분도 계신데, 저는 개별적인 학문과 연계하고 협업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어요. 제가 하나의 연결고리가 되어 코디네이터도 하고 있는데, 그런 과정에서 시너지가 발생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공부했던 뉴욕대에서 철학과가 법학과와 콜로키움 같은 걸 하면서 이게 다 통하고 연결되는 걸 보았거든요. 그런 경험도 제가 철학자로서 학교를 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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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잘 보여주듯 그는 윤리학을 주 연구 분야로 삼고 있다. 윤리는 인간의 실제적 삶을 규범적으로 정의하는 정언적인 명령이다. 반면 법학은 인간의 현실적 삶을 강제하는 성격을 가진 실천적 규범이다. 그런데 윤리란 것은 시대적 상황이나 사회상의 변화에 따라 그 척도가 변하는 성질이 있고 법은 이를 반영해서 보강하고 개정하는 운명을 가진다. 아마도 김현섭 교수는 이 두 측면을 모두 톺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범박한 관점에서 보아도 법학이나 철학의 연결고리는 아무래도 윤리 또는 도덕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컨텍스트와 상호 간섭을 누구 못지않게 고민해봤을 김현섭 교수에게 우리 시대 다소 위태로워 보이는 윤리적 척도에 대해 물었다.

    "넓은 의미의 윤리는 가치와 규범 일반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는데요. 정치철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규범윤리학은 무엇이 도덕적으로 옳은 행위이고 우리는 어떻게 이를 행하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정치 권력의 행사는 언제 정당하고 어떤 법과 제도가 바람직한지 등의 문제를 다룹니다. 사람은 인식적 이유(epistemic reason) 즉 증거를 인식하고 그에 따라 믿음을 형성하며, 실천적 이유(practical reason)를 인식하는 존재라고 봐요. 예를 들어 아침에 일어나 땅이 젖어 있다면 어젯밤에 비가 왔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또한 사람은 배가 많이 고프더라도 다른 사람의 소유인 음식을 훔쳐먹지 않는 게 옳다고 생각하는 존재예요. 음식이 다른 사람의 소유라는 사실이 훔쳐먹지 않아야 할 실천적 이유를 주는데, 사람은 그 이유를 인식하고 그것을 행위할 실천이성을 지닌 존재죠. 이와 같은 사람의 이성적 능력 발휘를 방해하지 않고 존중하며 가능하면 도와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도덕 원칙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이러한 추상적 원칙이 다양한 시대적, 사회적 환경과 맥락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는데 이 때문에 도덕이 상대적이라고 시대, 사회에 따라 달라진다고 오인하기 쉽죠. 도덕이 땅에 떨어졌다는 말은 오래전부터 줄곧 있어 왔다고 하는데, 저는 기본적으로 낙관주의자라 우리 사회의 윤리도 전반적으로 나아지고 있다고 봐요. 단 적지 않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침식, 퇴행하는 것으로 보고되고, 관련하여 자유주의적 국제 질서가 쇠퇴하고 있으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이 그 징표라는 관측도 있는데, 이러한 우려스러운 현상에 대해 함께 현명히 대처해 극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고요."

    인문학의 위기에 따라서 대학교의 인문학 기반이 붕괴되고 있고, 학생들도 취업과 진로에 유리한 전공 쪽으로 몰리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게 현실이다. 김현섭 교수는 이와 같은 비관적인 환경에서 대학의 인문학 교실로 들어왔다. 철학은 인문학의 중심이 되는 학문이고 인간과 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정신과 의지의 기준을 제시해야 하는 학문일 텐데, 그에게 현장에서 느끼는 대학과 인문학의 위기가 어느 정도인지, 그 원인 진단과 함께 인문학 위기 극복의 솔루션을 물었다.

    "말씀하신 이유들 때문에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다시 운위되고 있는 듯한데요. 민주주의, 불평등, 낙태, 안락사, AI 윤리를 비롯한 여러 사회 현안이 제기하는 가치와 규범 문제에 대해 체계적이고 균형 잡힌 의견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고고, 그 내용을 대중이 이해하기 쉽게 전달해 달라는 수요도 상당해 보여서 인문학 열풍이란 말도 다시 들리더라고요. 이런 문제에 대해 많은 전문 연구자들이 비판적으로 협업하면서 이론적 관점을 종합하고 이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인력이 꾸준히 양성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주주의 사회에서 당면해 있는 과제를 협업의 형식으로 풀어낼 수 있는 인력, 시스템, 제도 등이 완비되는 데 국민들이 공감하면 '인문학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인터뷰 도중, 인터뷰 장소(서울대철학사상연구소)에 우연찮게도 김현섭 교수의 대학원 석사과정 지도교수님(김기현 교수)이 들어오셨다. 그분께 석사과정의 김현섭 교수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을 들려주었다. "철학공부를 늦게 시작해서 그런지, 지적 욕구가 남달랐고 책을 추천하면 스펀지 빨아들이듯 금방 소화를 하더라고요." 김 교수가 학생 시절 열성적인 학생이었듯, 그는 지금은 가르치는 입장에서 열성적인 학생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알아가고 있다.

    "학생들을 지도할 수 있다는 게 큰 보람이고 즐거움이에요. 연구소에서 연구만 할 수도 있는데, 교육하고 교류하는 행위 속에서 가장 많은 배움을 얻거든요. 이게 상호작용 측면에서 굉장히 중요한 의미가 있어요. 지난 1학기 종강파티를 오랜만에 했는데, 줌으로만 보던 학생들을 직접 보니까 다들 너무 반가워하는 거예요. 그걸 보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는 공부하는 게 가장 큰 행복이라고 말했다. 스트레스 역시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성과를 충분히 내지 못할 때 느낀다고 했다. 그는 정말 의심하고 질문하고 앎의 가능성에 다가가는 것이 즐거운 '본투비' 학인(學人)으로 보인다. 그는 이제 겨우 2년 6개월 된 큰딸아이, 7개월 된 작은딸아이와 놀아주는 시간이 여가를 보내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가 두 딸아이로부터 그 어떤 텍스트보다 빛나는 철학적 인사이트를 읽어내리라는 믿음이 생겼다.


    김도언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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